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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화 〉 210화­이상한 나라의 산영(4) (210/239)

〈 210화 〉 210화­이상한 나라의 산영(4)

* * *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눈표범이 뿜어내는 지독한 살기를 맞닥뜨린 산영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그러나 패닉에 다다른 머리와 다르게 자신의 몸은 익숙하다는 듯이 순식간에 정후라는 남자가 건네준 활에 시위를 걸어 눈표범의 미간을 향해 쏴버렸다.

“캬아악!”

어미 설표에게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자신의 어미가 죽는 것을 본 아기 표범도 달려들자 산영의 손은 다시 한번 물이 흐르듯이 움직여 위협사격을 통해 쫓아내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불과 몇초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꺄아아아악!”

“입이랑 행동이랑 좀 일치라도 하지.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은 완전 타고난 기술자야 기술자.”

“엘리스. 섀넌 상황이 상황이잖아.”

“아저씨, 아무튼 내 말이 맞지? 사람이 위기를 마주하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니까.”

산영은 자신의 앞에서 목숨을 잃은 어미 눈표범의 생기 없는 눈빛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쏜 화살에 생명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된 일이긴. 장사 하루 이틀 해보나. 수십년 넘게 생활해온 활잡이 짬바가 어디 가겠어? 슉슉슉슉~몸이 기억하는 대로 알아서 움직인 거지. 팟!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온 존재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아와 다르게 몸은 위기의 순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직하게 움직였다.

“비켜봐.”

엘리스가 손으로 스윽 방향을 움직이자 설표의 가죽이 마치 허물이 벗어지듯 자연스럽게 설표의 시체로부터 분리가 되었다. 그러자 가죽이 벗겨진 표범의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으윽.”

“징그러우세요? 죽인 건 제가 아니고 그쪽이거든요?”

현대인으로서 살아온 산영의 감성에는 생명체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었다는 것은 일면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록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일하는 알바생이긴 하지만 자신이 음식을 만드는 모든 재료들은 이미 1차적으로 가공을 끝낸 상태로 오는 것이기에 자신은 소나 돼지 혹은 닭을 도축하는 경험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나마도 알바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어머니께서 다 알아서 해주셨기에 하다 못해 생선조차 다듬을 일도 없었던 것이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의 손으로 사람은 아니지만 방금 전까지 생명체였던 존재의 목숨을 끊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자신의 앞에서 엘리스라는 여자는 능숙하게 가죽을 벗기고선 내장을 빼내고 고기와 뼈를 분리한 뒤 내장은 저 멀리 뿌려버리고 고기와 뼈 그리고 힘줄같은 것들을 모아 정후라는 남자를 통해 보관해줄 것을 부탁했다. 산영은 그런 과정에서 빨갛게 피어오른 혈화(血花)가 너무 눈에 선연하게 들어와서 자신도 모르게 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꼭 그렇게 바로 도축을 해버려야 했나요?”

“그쪽 말대로 그냥 아무렇지 않게 죽어버린 이 자리에 내버려두고 썩든 말든 지나가는 짐승들이 뜯어먹게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비록 이 설표가 그쪽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 것도 사실이어도 어찌되었든 당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버린 순간 이 표범의 죽음의 가치는 뒤처리를 통해서 다시 재평가 될 수 있는 거잖아. 그냥 개죽음 당하고 버려지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내가 가공해서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지는 죽음이 어미 설표에겐 더 의미있지 않겠냐구.”

엘리스란 여자의 말이 일견 궤변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산영에겐 동시에 합리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할 수 있었던 설표의 개죽음이 저 여자에 의해 재정의가 되고 가죽을 남기고 고기와 뼈를 남겨 유의미해졌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을 추구했던 산영은 사냥꾼의 방법대로 죽음을 맞이한 설표를 통해 그동안 자신이 막연히 상상으로만 생각해왔던 자연의 속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환상임을 깨달았다. 아니, 무지한 자신의 망상이었던 것 같았다.

‘인간이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결국 무언가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하는 거야.’

이곳엔 정육점도, 마트도, 편의점도 없다. 고기를 먹고 싶다면 스스로 잡아 도축해야만 했고, 농작물을 먹고 싶다면 유해조수의 방해 공작들로부터 철저히 농산물을 지켜야만 했다. 그 모든 과정에 인간인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크든 작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떤 존재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차분해진 섀넌의 모습을 본 정후는 그 모습이 일순간 산영이 아니라 섀넌으로 느껴졌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움직이다보면 기억이 떠오르곤 하는 법이니까.’

급작스럽고 의도가 담긴 사냥사건 이후, 이동 중에 나눴던 산영과의 대화는 정후에게 꽤나 이색적이었다. 섀넌일 때는 대한민국에서의 현대인으로서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섀넌의 이해는 간접적이고 엘프로서의 시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섀넌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섀넌의 말을 전부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산영이 된 지금 ‘현대인’으로서의 자아를 갖게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더 서로가 잘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으으으. 그래서 아무리 내가 혼자서 이런 저런 것들을 하고 다니긴 했지만 아직까진 혼자 고깃집에서 구워먹는 건 나한테 어려운 것 같아.”

“아무래도 고깃집에서 혼밥은 처음엔 어렵죠. 근데 고깃집에서 혼밥하는 것에 어느 정도 적응되면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곳이나 뷔페에서 혼밥하는 것도 한번 해볼만 해요. 혼자 오롯이 내가 원하는 메뉴에 집중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게 꽤나 매력적이라고 할까?”

“난 혼밥 싫어. 어릴 때 맨날 지겹게 생존을 위한 영양식만 혼자 먹어야 했던 기억이 있어서. 아저씨랑 함께 했던 첫 식사의 기쁨이 지금도 추억 속에 선해.”

“그랬어?”

처음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나자 세 사람간 대화는 섀넌일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산영은 엘리스로부터 정후라는 남자가 자신과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를 정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었다. 하루 종일 손을 잡고 다니고 달달한 눈빛을 서로 교환하는 꼬라지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말이 나오곤 했었다는데 엘리스라는 여자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후라는 남자가 자신을 볼 때면 그 눈빛엔 부모님의 대가 없는 무한한 사랑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자신을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연애를 많이 해본 적 없는 자신일지라도 충분히 인지가능한 것이었다.

‘이 남자가 나랑 연인이었다는 거지?’

남자는 항상 산영의 안전을 위해 움직였고 산영이 불편하지 않도록 매 순간 배려해줬다. 이 모든 것들은 산영에게 있어 꽤나 기분 좋으면서도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저 앞에 조심해요. 크레바스가 있는 것 같으니까.”

“크레바스요? 그게 뭐죠?”

남자의 말에 따르면 크레바스는 스노우 브릿지라고 부르는 단차같은 것에 가려져 있거나 혹은 가려져 있지 않고 노출된 깊은 골짜기 내지는 틈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했다. 물론 가려져 있지 않은 깊은 골짜기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얼마든지 피해가거나 우회할 수 있지만 스노우 브릿지라는 이름 그대로 눈으로 만들어진 다리에 가려져 버린 상태로 있는 경우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눈길로 보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지나가버리는 순간 텅 빈 틈 사이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 크레바스가 가진 위험성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들어본 것도 같아. 유명한 산악인들도 이 크레바스에 빠져서 사망하곤 한다면서 한국의 산악인도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했다고 했었지.’

엘리스와 정후 그리고 자신 사이에 이어진 끈의 존재가 이런 빙상 위에서 다닐땐 왜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정후가 주의한 곳에 다다르고 발로 살짝 구르자 아무렇지도 않았던 곳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깊은 낭떠러지로 변해버린다.

“우와...이렇게 깊다면 그냥 떨어지는 순간 나락이겠네...”

산영은 정후가 알려준 방법대로 엎드려서 천천히 움직여 깊은 갈라짐 사이에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어 깊은 골짜기를 잠시 살펴봤다.

자신이 틈 근처로 가까이 가자 돌덩어리처럼 굳은 눈부스러기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어딘가에 부딪힌 듯 파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떨어지면 그냥 죽었겠네.’

그런 산영의 모습을 지켜보는 정후와 엘리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섀넌과 같은 엘프들이 지닌 특유의 걸음이라면 체중분산에 있어 워낙 탁월하기에 크레바스에 빠져 죽는 일따위는 없었을테지만 위기의 순간이 아닌 지금, 섀넌으로서의 자아를 잊었다는 듯이 평범한 지구인처럼 걷는 산영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후나 엘리스가 크레바스에 훅하고 빠져버릴 산영을 가만히 내버려둘 일도 없었지만 말이다.

“봤죠? 이제 갑시다.”

“네...넵.”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섀넌이라니 정후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면 본인은 얼마나 쪽팔리겠어.’

산영이 하루 빨리 섀넌으로 돌아와 웃으며 지금을 떠올리는 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싶어졌다.

산영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정후와 엘리스 사이에 이어진 끈으로 연결된 자신의 끈을 마치 유일한 생명선인 것처럼 소중하게 꼭 부여잡고 자신과 엘리스를 졸졸 따라왔다. 슬쩍 뒤로 볼 때면 산영은 어색한 미소를 피워올리곤 했다.

“(야, 어떻게 빨리 섀넌으로 돌릴 방법 없어? 좀 갑갑한데...)”

“(아저씨, 컵라면으로 치면 이제 뜨거운 물 끓이기 시작한 거야. 라면을 익혀서 입에 넣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기다려?)”

“(그렇지. 기다려야지.)”

당연하다는 듯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후는 얄밉게 느껴졌다.

‘저거 그냥 깨울 방법이 있는데도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

셋이 그렇게 눈길을 걷는 사이 해가 천천히 지고 있어 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정후는 눈 위에서 텐트를 치고 자야할지 아니면 눈을 파고 들어가 설동을 만들고 잠을 자야할지 판단하기가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왜?”

“슬슬 잘 준비를 해야 하는데 눈 위라 트레일러같은 걸 꺼낼 수도 없잖아. 텐트를 치든가 눈 밑으로 파고 들어가든가 해야 하니까.”

“아저씨, 우리 그러지 말고 그냥 지구로 돌아가서 잠자면 안되나?”

“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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