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208화이상한 나라의 산영(2)
* * *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산영아. 오늘 컨디션 안 좋아보이던데 몸관리 잘하고.”
“예.”
산영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하기로 해서인지 매장 입구를 나서자마자 몸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몸이 안 좋아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조퇴하는 날 교정 밖을 나설 때의 그 기분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분명 광명 토박이로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랐지만 산영은 이 콘크리트 정글이 갑갑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주말이면 가까운 공원을 찾던가 근처 산을 찾아가곤 했다.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지라 몇 안되는 가까운 친구들은 그런 산영을 보고 말했다.
“야, 쉬려면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야지. 무슨 산을 가냐 산을.”
“맞아. 이불 밖은 위험한 거 몰라?”
“난 집에만 있으면 더욱 늘어지고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아. 산에 가면 정신도 맑아지고 축 처진 몸에 생기가 들어오는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이 좋잖아.”
“으에...젊은 녀석이 등산 다니는 어르신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별종이야 별종.”
산영의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런 산영을 특이하게 취급하곤 했다.
자연 속에 있는 걸 좋아하는 산영은 아이러니하게도 먹는 것만큼은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보다는 단백질과 지방 위주의 식사를 좋아했다. 파릇파릇한 야채나 과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육류를 좋아했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게 된 것도 고기가 좋아서였다. 그러나, 짜장면 집 자식들이 짜장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듯이 좋아했던 햄버거는 이제 질려서 쳐다도 보기 싫은 상태가 되었다. 하루 종일 매장을 가득 채운 튀김 냄새와 고기가 열과 만나 지방이 녹으며 나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서 고기 위주의 식사를 멀리하게 되고 닭가슴살 샐러드같이 담백한 식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오늘도 그냥 서브로드가서 샐러드가 사서 가야겠다.”
찹샐러드를 사서 매장에서 나온 산영은 이상하게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에 뒤를 휙 둘러봤다. 그러자 누군가 숨는 것만 같은 모습이 보였다.
“나오세요.”
이런 경험이 많은 산영은 짝다리를 짚고 매장 앞에 놓인 간판 뒤에 숨은 그림자를 쳐다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경고합니다. 지금 나오지 않으면 경찰한테 신고할 거에요.”
산영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퉁퉁한 남자가 나타났다.
“신고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 아닙니다.”
“네네, 알아요.”
평소에 유독 다른 캐셔들도 많은데 자기한테만 와서 줄을 서서 주문을 하던 손님이었다.
“저 아시죠? 저기...그러니까 다른 게 아니라...”
매장 안에서 산영이 보여주던 밝은 미소는 온데 간데 없이 차갑고 무표정한 산영의 모습을 처음 맞이한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겨우 용기를 다시 내 스마트폰과 함께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꽃이나 나무를 좋아하는 산영은 자기도 모르게 꽃다발에 손이 나갈 것만 같았지만 자제하고 뒤로 손을 가져가 숨기고 대답했다.
“안됩니다.”
“네?”
칼같이 자르는 산영의 말에 남자는 자신이 품었던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
“평소에 제가 가면 밝게 웃어주시고...그랬는데....제가 잘못 이해한 건가요?”
“손님, 흠, 지금은 아니구나. 영업시간 끝났으니 매장의 직원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여성으로서 답해드릴게요. 그쪽말고도 어떤 사람이 오건 전 손님에게 미소로 접객을 하도록 교육받았고 그래서 그쪽에게도 웃어드린 거예요. 딱히 그쪽에게 유달리 제가 이성적 호감을 느낀 건 아닙니다. 혹시라도 오해하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예 접근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싹을 잘라버리는 산영의 태도에 남자는 착각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돌렸다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잠시 쳐다보더니 산영에게 안겼다.
“그래도 산영 씨에서 드리려고 산 건데 주인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버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사죄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깔끔하게 받아들인 남자가 고개를 꾸벅이고 등을 돌려 축 처진 발걸음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산영은 자신의 품 안에서 향기를 내뿜는 꽃다발을 보며 남자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상쾌한 미소를 띠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그치?”
꽃다발의 향기를 맡자 산영은 이상하게 으슬으슬했던 몸에 기운이 도는 것만 같았다.
“흐음, 향기 좋다~”
원룸의 자취방에 도착한 산영의 방은 몇 개의 작은 화분들과 꽃다발이었던 것들이 화병 여기저기에 꽂혀 방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씻지 않고선 절대 침대에 엉덩이도 올리지 않는 산영은 평소라면 하루동안 자신의 몸 주변에 깊게 베인 육향과 불향을 지워내기 위해 샤워부터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샤워보다 일단 꽃다발을 풀어헤치고 꽃의 줄기 끝부분을 꽃꽂이를 위해 구매한 전용 가위를 가지고 대각선으로 잘라준 뒤 라이터 불로 살짝 지져줬다. 그리고 나서 잘 가다듬은 꽃뭉치를 넣을만한 화병이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다 벤티 보다 한 사이즈 큰 트렌타 사이즈의 커피 컵에 물을 채워넣고 꽃들을 담아 넣어줬다.
“너희들은 이렇게 시한부 생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을텐데 미안해. 나 때문에...”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어주듯 꽃을 살짝 쓰다듬자 산영이 만져준 꽃들이 살짝 생기가 도는 것만 같이 보였지만 산영은 목이 말랐던 꽃들이 물을 빨아들이며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은 뒤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좀 따뜻한 물로 샤워해야겠어. 으으. 이상하게 으슬으슬하네.”
산영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정후와 엘리스는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엘리스, 섀넌은="" 어떻게="" 할거야?="" 빨리="" 깨워서="" 나가자며.)=""/>
이상하게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정후의 모습에 엘리스는 피식하고 웃으며 평소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뭘 그렇게="" 걱정돼서="" 목소리를="" 낮추는="" 거야,="" 아저씨?=""/>
<(야!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나서 하는 정후의 대답에 엘리스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정후를 가리키더니 정후의 손을 떼고나서 섀넌 아니 지금은 산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여성의 자취방 문을 들어갔다 나왔다 함으로써 정후에게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확실하게 인식시켜줬다.
<이런 상황인데="" 우리="" 목소리가="" 들리겠어?=""/>
<뭐야, 그렇지.="" 안="" 들리겠구나.="" 참...말했잖아.="" 귀신은="" 처음이라니까.=""/>
<지금같은 상태에선="" 고래고래="" 고함을="" 쳐도="" 안="" 들려.="" 섀넌도="" 우릴="" 건드리지="" 못하고="" 우리도="" 섀넌을="" 못하는="" 거지.="" 우리가="" 여기=""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영혼체로="" 있으면="" 서로="" 채널이="" 겹쳐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니까.="" 홀로그램이="" 겹쳐="" 있다고="" 해서="" 홀로그램을="" 만질="" 순="" 없잖아.="" 그런="" 거야.=""/>
엘리스의 설명을 들은 정후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섀넌의 자취방을 한바퀴 비잉 둘러보려고 했다. 그 순간 화장실 문이 벌컥하고 열리더니 산영이 고개를 내밀었다.
“응? 누가 찾아왔나?...”
자신도 모르게 얼음 상태가 되어버린 정후가 엘리스에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며 엘리스를 쳐다보며 눈을 치켜 떴지만 엘리스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보이는 건가?
그러나 둘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라 당황한 것과 다르게 산영은 분명 화장실 밖에서 무슨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아무 것도 없자 이상하게 기분이 싸해져서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잘못 들었나보다.”
<(엘리스, 안="" 들린다며!="" 홀로그램="" 겹친="" 거랑="" 비슷한="" 거라며!)=""/>
목소리를 낮춘 상태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설명하라는 정후를 말리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몸을 수건으로 감싼 산영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기가 많이 허해졌나 일부러 온수샤워했는데 아직도 몸이 으슬으슬한 것 같네. 으으”
그같은 산영의 목소리를 들은 둘은 산영을 피해 조심스럽게 산영의 자취방 밖으로 이동했다.
<이상하네. 우리가="" 느껴지고="" 그런=""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산영의 자취방이 건물 앞으로 나온 엘리스와 정후는 건물 앞에 마치 담배를 피는 불량청소년마냥 쪼그려 앉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성인 두명이 일상적인 현대인들의 복장과 다른 옷을 입은 상태로 있음에도 길을 지나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후가 새삼 확인해보려고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보기도 하고 크게 고함을 쳐보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섀넌만 우리를="" 느끼는=""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어떻게 된 거냐고 성화를 치던 것과 다르게 차분해진 정후가 섀넌의 방이 있는 층의 창문이 꺼지자 다시 한번 들어가보자고 했다.
<야, 이제="" 자나보다.="" 눈="" 감고="" 있을="" 때="" 접촉해서="" 스윽해서="" 영혼="" 상태로="" 데리고="" 나가자.=""/>
정후의 말을 들은 엘리스는 좀 전까지 있던 섀넌의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산영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와, 우리="" 섀넌은="" 이래도="" 이쁘구나.)=""/>
정후가 섀넌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쳐다보며 팔불출같은 소리를 하고 있자 엘리스는 그 모습이 퍽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가택에 불법침입한 변태같아 보여 살짝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현실은 둘이 죽고 못 사는 연인이자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후가 하는 걸 지켜보며 어떻게 상황을 처리할지 고민에 빠졌다.
엘리스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한참을 잠에 든 섀넌을 지켜보며 ‘어화둥둥 내 사랑’을 외치는 이도령 같았던 정후가 정신을 차렸다.
<다 봤슈?="" 아주="" 얼굴이="" 닳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지켜만="" 보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손="" 잡고="" 서로="" 대화하는="" 게="" 더="" 좋지.="" 빨리="" 나한테="" 했던="" 것처럼="" 깨워="" 봐.=""/>
엘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섀넌의 이마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정후는 몇 초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뭐하냐고 엘리스를 다시 재촉했지만 엘리스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라?/>
<뭐해, 장난="" 그만="" 치고="" 시작해.=""/>
섀넌의 이마에 접촉해 정신을 연결하여 섀넌의 자아를 깨우려던 엘리스는 섀넌의 상황이 정후가 릭의 의식 안에 갇혀 있을 때랑은 살짝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처럼은 못="" 꺼내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엘리스가 힘을 집중해서 상황을 분석한 뒤 정후에게 왜 정후처럼 깨울 수 없는지를 설명해줬다. 엘리스의 설명을 전부 들은 정후는 어이가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 시뮬레이션의 세계 안에서 산영으로서의 삶을 아기때부터 살아온 상태인 섀넌은 산영으로서 보낸 시간이 25년이나 지나 산영으로서의 자아가 확고하게 피어났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 상태에서 영혼을 추출하게 되면 한동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혼동할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엘리스의 설명이었다.
<아저씨, 왜,="" 깊게="" 잠들었다가="" 갑자기="" 깨면="" 꿈에서="" 덜="" 깨서="" 비몽사몽하며="" 현실이랑="" 혼동하고="" 그러잖아,="" 근데="" 섀넌같은="" 경우는="" 그게="" 좀=""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럼 일단="" 깨워서="" 데리고="" 나가?=""/>
<아마 지금="" 상태로="" 부작용이="" 나타나면="" 캡슐="" 밖으로="" 나갔을="" 때="" 갑자기="" 이세계에="" 끌려온="" 현대인이랑="" 비슷한="" 느낌을="" 받지="" 싶은데.="" 그래도="" 부작용="" 발생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떻게="" 할까?=""/>
<골치 아프네.=""/>
곤히 잠들어 있는 산영을 보고 있는 정후의 머리 속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섀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