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207화이상한 나라의 산영(1)
* * *
엘리스의 대답은 정후에게 머리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주었다. 어찌보면 간단한 해결방법이긴 했지만 만약 죽고 잘못되면 어쩔 것이며, 지금 이 세상이 혹시라도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인마, 그게 말이 쉽지!”
“왜 로그아웃한다고 생각하면 돼. 편해. 게임으로 치면 Alt + F4?”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하는 엘리스의 말에 정후는 기가 찼다.
‘이거 이거, 엘리스가 아니라 어디서 악마가 나타나서 날 꼬득이는 건가?’
말도 안되는 해결책을 듣자 정후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거나 악마가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 볼따구를 세게 꼬집었지만 느껴지는 통증은 진짜였다. 그리고 엘리스도 정후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아저씨, 지금 내 말 못 믿지.”
‘니가 엘리스인지 새삼 의심스럽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가슴은 납득을 못했다고나 할까...”
겨우 설득을 시켜놨나 싶은데 헛소리를 하는 정후를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본 엘리스는 슬쩍 운을 띄웠다.
“아저씨, 섀넌 보고 싶지 않아?”
“응? 섀넌?”
그랬다. 자신은 섀넌과 함께 생텀에 들어왔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함께 들어왔었다. 워낙 엘리스의 등장과 엘리스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충격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섀넌은 지금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은?”
“육체는 아저씨 옆에 있긴 한데 의식은 다른 서버에 있는 것 같아. 적어도 지금 아저씨가 있는 해당 서버에선 안 느껴져. 그래서 섀넌 보러 갈거야, 안 갈거야?”
“섀넌 보러 가야지...”
정후의 답변을 들은 엘리스 정후와 함께 있는 시뮬레이션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의 육체로 의식을 나눠 다른 손가락으로 정후의 옆에 매달린 캡슐 안에 있던 섀넌이 접속하고 있는 서버에 접속해 섀넌의 위치를 찾아냈다.
“어, 섀넌이 있는 서버 찾았다. 아저씨 의식을 그 서버로 이전하고 같이 나갈까?”
“근데 이대로 일을 벌려놓고 그냥 떠나기엔...조금 그렇네. 내가 없어지면 릭도 없어지는 거라면서.”
“아저씨가 걱정하는 것처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어떤?”
“잠깐만 기다려봐.”
엘리스가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머리에 검지를 갖다 대자 엘리스의 검지에서 보라색 빛이 피어오른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엘리스는 빙그레 웃으며 어떻게 할지를 알려줬다.
“정확히 아저씨와 릭은 같은 존재는 아니잖아. 릭의 의식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고 해야 되나? 지금이야 일시적으로 아저씨의 의식이 육체의 표면 위로 올라오고 릭이라는 존재의 의식은 잠들게 해놓은 상태인 거고.”
“그래서?”
“원래 있던 대로 둘의 데이터를 갈라놓는 거지. 완전히 둘의 자아가 결합되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그게 가능해?”
“응, 가능해.”
씨익 웃는 엘리스의 모습에 정후는 자신의 몸은 아니지만 등허리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맞나...’
“어떤 식으로 할 건데?”
“간단해. 아저씨의 의식을 릭이라는 NPC에게서 깔끔하게 제거하는 거야. 이렇게.”
엘리스가 정후 아니 릭의 육체에 손을 얹고 마치 무를 뽑듯이 잡아올리자 정후의 의식이 릭으로부터 쉽게 분리가 되었다. 그러자 릭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에서 원래색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했고 정후는 엘리스의 손에 잡힌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나 지금="" 유령="" 상태가="" 된="" 건가?=""/>
“예전의 나랑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고 보면 돼.”
<근데 우리가="" 이렇게="" 쟤="" 앞에="" 있어도="" 되냐?=""/>
잠들어 있던 릭의 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나면 자신과 영혼체의 형태인 정후의 존재를 마주한 뒤 이리저리 거슬릴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스는 자신의 의식을 시뮬레이션 내에 만든 육체를 제거하면서 분리하여 정후처럼 영혼의 상태로 바꾸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돼=""/>
엘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릭이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지? 내가 어떻게 이곳에...”
릭이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정후는 자신도 모르게 숨기 위해 웅크려 주저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엘리스가 박장대소를 하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아닌가
<야야, 그렇게="" 시끄럽게="" 웃으면="" 들켜,="" 인마!=""/>
정후가 웃음소리를 내뱉는 엘리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들자 엘리스가 고개를 돌려 거부하며 계속 웃었다.
<크크크크큭, 아저씨,="" 우리가="" 지금="" 뭐야?=""/>
<여...영혼?/>
<릭의 눈에는="" 우리가="" 안="" 보여.="" 만약="" 보이고=""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우리="" 쪽을="" 쳐다봤겠지.="" 아니야?=""/>
그제야 엘리스의 말대로 릭을 쳐다봤지만 릭은 자신과 엘리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바람도 안 부는데 이상하게 춥네...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릭이 자신의 양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하곤 기억을 되짚고 있는 사이 루아나와 다른 세 사범이 정후를 찾아 나타났다.
“릭, 여기서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그게 나도 잘...”
어안이 벙벙한 릭이 추위를 느끼는 것 같자 루아나가 옆으로 다가와 자신의 손으로 릭의 팔을 위아래로 비비며 감싸 안아주었다.
“그라운드 본부로 돌아가자. O.H 잔당들이 인간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괴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이야.”
“비앙카, 레플리칸트들은 어떻게 대처했으면 하지?”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릭이 천천히 다른 이들과 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의논하며 서서히 자리를 떠나자 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정후는 원래대로면 자신의 의식이 시뮬레이션 밖으로 나감과 함께 사라졌을 릭의 여기에 남아 앞으로 하고자 하는 바가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이제 섀넌한테="" 갈="" 거지?=""/>
<가야지. 내가="" 뭐="" 할="" 일도="" 없는데="" 이젠.="" 섀넌은="" 잘="" 있지?=""/>
<가서 봅시다.="" 가서.=""/>
엘리스가 엄지와 검지로 핑거스냅을 하자 정후와 엘리스의 앞으로 마치 포탈과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근데 영혼상태는="" 처음이라="" 조금="" 얼떨떨하다.=""/>
<막상 있어보면="" 편해.=""/>
<이게 니가="" 말한="" 죽음이었으면="" 나도="" 진작="" 한다고="" 했지.=""/>
<거짓말! 엄청="" 겁냈으면서.="" 그리고="" 릭을="" 죽여서="" 아저씨의="" 의식을="" 잡아="" 꺼내나="" 릭으로부터="" 뽑아내서="" 분리하는="" 거나="" 아저씨가="" 영혼="" 상태로="" 되는="" 건="" 별반="" 차이="" 없거든요~="" 보통="" 육체="" 없이="" 상태가="" 되면="" 죽는다고="" 표현하는="" 거고=""/>
<제대로 설명했어야지.=""/>
<피이/>
약을 올리는 엘리스와 함께 정후가 다른 시뮬레이션으로 포탈을 타고 넘어간 순간 릭은 뭔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자신이 있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뭐라도 두고 왔어?”
“아니...이상하게 허전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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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찬 번화가였다.
<한국?/>
<응./>
<여기에 섀넌이="" 있다고?=""/>
이곳은 자신이 살던 대한민국과 똑같은 형태로 구현된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영혼 상태인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길 위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들을 투과해 스쳐 지나갔다. 느낌이 이상했다.
<여기 아저씨가="" 있던="" 세상="" 아니야.=""/>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마냥 정후가 주변을 보며 멍해있자 엘리스가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그...그렇지./>
<주변을 봐.="" 마스크="" 쓴="" 사람들이="" 있나.=""/>
그랬다. 분명 2020년 자신이 떠나오던 대한민국의 최신 유행가가 길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지만 사람들 어느 누구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시뮬레이션 정보를="" 읽어보니까="" 이="" 세상은="" 아저씨가="" 있던="" 세상에서="" ‘코로나’가="" 퍼지지="" 않았다면="" 존재했을="" 세상인="" 것="" 같아.=""/>
<신기하네.../>
반짝이는 밤거리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다르게 활발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롭게 떠들고 다녔다. 길거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술에 취한 취객들이 2차를 외치며 노래방을 가자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전화를 하면서 길을 걸었다. 어떤 외국인들은 커피라든가 음료수를 들고 시끌벅적한 대화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움찔움찔하는 걸 보면 코로나는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바꿔놓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있는 이곳이 친구들과 가끔 놀러오던 광명사거리 역의 상가지구라는 것은 주변을 둘러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이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로 시끌벅적한 여름의 밤거리였다.
<섀넌이 이="" 근처에="" 있어?=""/>
<저기./>
엘리스가 가르킨 방향에는 24시간 운영을하는 맥트럼프가 노란색의 조명을 켠 채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섀넌이 저기에=""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맥트럼프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나 아무리 손으로 문을 밀려고 해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제서야 자신이 영혼 상태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영혼은 문="" 안="" 열고="" 그냥="" 통과하면="" 됩니다.="" 영화="" 한="" 두번="" 보셨나.=""/>
<귀신은 처음이라고.="" 으으,="" 느낌이="" 이상해.=""/>
유리로 된 입구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와 2층까지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섀넌 비스무리한 사람도 없었다. 엘리스는 그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보. 저기="" 있는데="" 못="" 찾네.=""/>
엘리스가 바라보는 곳에는 검은 머리를 하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여자가 캐셔 일을 보고 있었다.
<못 찾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려나?=""/>
계속 이어지는 손님들을 상대하면서도 몇 번 손님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를 외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후가 섀넌을 바로 못 찾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의 모습에선 하나의 미숙함도 없이 자신의 업무에 익숙한 캐셔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샅샅이 살펴보던 정후는 1층의 창가에 있던 엘리스에게 찾아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다면서 다시 찾아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아닌="" 것="" 같다.="" 없어.=""/>
<진짜로 없어?="" 잘="" 찾아보세요~=""/>
<위 아래를="" 몇="" 번="" 훑었는데.="" 없어.="" 섀넌같은="" 사람이="" 흔하냐?=""/>
엘리스가 데리고 와놓고 같이 찾아봐주지도 않자 정후가 살짝 짜증을 내는 것 같자 엘리스는 카운터를 향해 턱으로 스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을 봐도?=""/>
<저기는 캐셔들이랑="" 직원들="" 밖에...어?=""/>
검은색 머리를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분명 섀넌이었다.
<내가 왜="" 몰라봤지?=""/>
클락 켄트로 분장한 슈퍼맨을 몰라보는 사람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했던 자신이었건만 자신의 연인이 노란색 맥트럼프 셔츠를 입고 능숙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못 알아볼 수가 있나 싶었다.
섀넌의 옆으로 다가가 안아주려고 했으나 영혼 상태인 자신을 섀넌은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에어컨이 센 것 같다며 뒤에 지나가는 매니저에게 살짝 에어컨을 줄여달라고 이야기할뿐이었다.
“왜 이렇게 춥지...아, 25번 손님, 주문하신 빅트럼프 세트 나왔습니다.”
에어컨을 줄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추위가 가시지 않자 섀넌 아니 산영은 속으로 오늘은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아 매니저에게 말하고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살기운이 있나...집에 가는 길에 약국에 좀 들러서 약 좀 짓고 가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