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206화바닐라쉐이크라 부르지 못하는 바닐라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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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말은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이 대략 10억개는 되는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라는 거지?”
“쪼옵, 맞아. 아저씨.”
엘리스가 자신의 눈앞에서 만들어낸 바닐라쉐이크를 빨대로 마시며 대답했다.
“이 세상이 내가 있던 곳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했어. 지금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니까. 이 몸의 주인의 꿈 속에서 내가 깨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것도 기억이 나고.”
하지만 너무 진짜같은 세상이라 마치 내가 환생 혹은 빙의를 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체감하고 있는 높은 사실구현은 지금 이 공간이 시뮬레이션 속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게 한다.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바닐라쉐이크?”
“진짜로? 진짜로 내가 마시고 있는 게 바닐라 쉐이크라고 생각하는 거야? 쪼옵.”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고 있는 저것이 바닐라 쉐이크가 아니라면 내가 그동안 마셨던 수많은 쉐이크는 가짜란 말인가.
“아저씨, 아무 것도 없는 공간으로 아저씨를 불러다 놓고 갑자기 만들어낸 이게 진짜 바닐라 쉐이크라고 생각한다고? 이건 바닐라 쉐이크가 아니야. 정보지.”
티테이블에 마주보고 있는 내 앞에 놓인 것은 바닐라쉐이크인데 바닐라 쉐이크가 아니란다. 이게 무슨 홍길동같은 시츄에이션인지 모르겠다.
‘홍길동이 아버지와 형에게 호형호제를 못하는 기분이 이랬을까? 답답하네.’
그러나 정작 더욱 답답해하는 것은 정후가 아니라 엘리스였다. 엘리스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마시던 바닐라 쉐이크를 손가락을 튕겨 없애버렸다.
“자,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 있던 게 아저씨가 잘 아는 바닐라쉐이크라면 이렇게 없앨 수 있는 거야?”
정후는 순식간에 바닐라쉐이크를 마법처럼 없애버리는 엘리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엘리스는 저런 마법을 구현할줄 몰랐다.
“그래, 그것도 이상한데 지금 내 눈 앞에 나타나서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있는 너도 이상해.”
꿈을 꾸다가 깨고 나서 생각해보면 전혀 말도 안되는 그런 전개를 지금 경험하고 있는 기분이라 납득이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아저씨가 보고 있는 내 몸은 생텀에 옮겨놨던 인체배양기를 통해 만들어낸 육체를 이 시뮬레이션 속에 그대로 투영한 것에 불과해. 난 아저씨가 정신을 못 차리고 여기서 눌러 앉아 있을까봐 이 시뮬레이션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들어온 거고. 아저씨가 지금처럼 정신 못차리고 있는 동안 밖에선 레드와 화이트가 뭔가를 저지르고 있어.”
엘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가 생텀에 있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그래, 난 생텀에 있었어. 근데 어떻게 이렇게...”
엘리스는 정후가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람을 붙잡고 갑자기 깨워 빨리 정신차리라고 하면 아무도 정신을 바로 찾진 못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한동안 조용해진 정후가 생각에 빠져 있자 엘리스는 이번엔 밀크쉐이크를 불러내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새하얗고 적막만 가득할 공간에 밀크쉐이크를 흡입하는 소리만 가득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이런 새하얀 공간같은 게 있을리 없으니까. 근데 니 말대로면 존재하지도 않는 쉐이크를 넌 왜 그리 들이마시고 있는 거야.”
“쉐이크의 정보는 그대로 구현이 되었거든. 쉐이크를 마실 때 느끼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달달한 쉐이크를 0 칼로리로 당분 걱정 없이 마실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건 아니잖아.”
벤티사이즈는 될 법한 컵에 담긴 밀크쉐이크를 모두 마신 엘리스는 컵을 뒤로 집어던져버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아무 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되냐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뒤로 날아가던 컵은 사라져버렸다.
“여긴 게임 속으로 입장하기 전의 대기실같은 곳이야. 아저씨랑 편하게 대화하려고 내가 불러낸 가상 공간.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똥을 싸든 쓰레기를 뿌리든 그건 남지 않아. 어차피 정보니까.”
정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싶자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후와 함께 릭이 검술을 수련하던 공터로 이동했다.
정후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던 칼을 다시 뽑아 검에서 오러를 만들어냈다.
“이게 가짜다? 이렇게 포스의 힘이 느껴지는데도?”
“오러라는 정보는 진짜야. 하지만 이 세상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지. 그저 오러가 구현될 수 있도록 시스템으로 짜놓은 거야.”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 곳은 릭이란 몸으로 수련을 하던 장소가 맞았다. 그러나 엘리스는 언제인지 모르게 내 옆으로 나타나 내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고통은 진짜였다.
“언제까지 여기서 정신 못차리고 헤롱거릴거야. 어차피 아저씨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은 구현되지도 않는 가짜 세상인데.”
엘리스는 엉덩이를 부비며 자꾸만 바보처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의 정후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저씨, 이 세상에서 아저씨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아저씨가 바라보지 않는 곳들은 실제로 구현되지 않고 있어.”
‘이게 무슨 슈뢰딩거의 고양이같은 소리란 말인가.’
정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엘리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10억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데 그 많은 세상에 담긴 모든 것들 하나하나를 구현하기 위해사용하는 소스는 너무 낭비야. 그러니까 대기 상태로 있다가 아저씨가 인지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면 아저씨의 뇌는 그게 항상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많은 정보량이 필요하지도 않아.”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모든 정리가 끝이 나고 머리로 이해한다고 가슴으로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호접지몽(??之夢)을 꾸었던 장자가 자신이 나비인지 장자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에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릭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레플리칸트 이야기가 가짜야?”
내 질문에 엘리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이 세상이 가짜라더니 또 고개를 흔드는 엘리스를 보고 있자니 다시 혼란이 찾아올 것만 같다.
정후가 다시 혼란스러워할 징후가 보이자 귀찮다는 듯 엘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한번 설명충이 되어 정후의 이해를 도왔다.
“레플리칸트의 저항은 진짜야. 다만 밖에 존재하는 우리 입장에선 이미 지나간 과거야. 여긴 그 과거를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인 거고. 아저씨의 실제 몸은 캡슐 안에서 잠들어있어. 그러니까 아저씨는 빨리 정신차리고 나가면 되는 거야. ok?”
엘리스의 말은 게임 빨리 끄고 밥 먹으러 나오라는 엄마의 말처럼 가벼웠으나 내가 여태껏 살아온 릭으로서의 자아는 납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저씨, 우리는 우리 일 해야지.”
“어...근데 내가 여기서 만약 나가버리면...그러니까 릭이 없어지면 레플리칸트의 저항은 어떻게 돼?”
“음...”
엘리스가 잠시 기억을 되짚는 듯하더니 답했다.
“이 시뮬레이션 내에선 과거 레플리칸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존재로 뽑은 릭이란 존재가 권리 회복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가 사라지면 매우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될 거고, 레플리칸트들은 결국 인간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데 실패해서 다시 아무런 감정 없는 로봇이 되어 인간의 뒤처리를 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
너무 처참한 미래가 아니던가. “ ‘노예반란이 실패하여 노예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 라는 디스토피아적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는 엘리스에게 거리감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쟤 엘리스 맞아?’
“레플리칸트가 권리를 갖게 되고 이후에 인공지능 개발이 계속된다면서? 인공지능 개발로 가는 역사가 멈추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화성으로 이주하는 미래같은 것은 오지 않는 거야? 그냥 종말이 오면 지구에서 다 멸종해?”
“아마도...인간 특성상 살려고 바둥거리지도 않고 바로 죽지는 않겠지.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지구 밖에 우주도시를 건설하고 한동안은 버틸거야.”
“그리고?”
“모든 물자를 소모하기 전에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고 이주할만한 동력을 만들어내면 화성에 이주할 수 있겠지.”
너무나 희망적인 가설이었으나 동시에 성공을 위해선 조건들이 너무 많이 붙어있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이주 성공 확률은 어느 정도? 50%는 넘어?”
“그렇게 높진 않을 거야. 우주도시로 나갈 인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선발된 자와 선발되지 못한 자들의 갈등이 발생할 거고, 그 갈등 속에서 겨우겨우 발목을 잡는 존재들을 뿌리치고 나서 일부 인류가 우주도시로 나와도 희망을 품고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안을 찾아야겠지. 그렇게 찾아낸 대안 가운데서 단기적인 대책과 장기적인 대책을 모두 만들어낸 뒤 단기적으로는 식량 생산과 생명 배양기술을 발전시켜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이주를 성공시키고 화성에선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테라포밍을 거치는 준비까지 마쳐야 해. 여기까지가 이주를 위한 프리플랜preplan. 메인은 화성으로 이주선을 만들어서 이주하는 거지. 단기간엔 불가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주선이 이동하는 도중에 운석들이 잔뜩 몰려다니는 위험들을 이리저리 회피하여 화성에 도착한 뒤 과거 엘레네가 했던 것처럼 화성에 인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이 미친 초거대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한가지 선행과제가 이행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인공지능 개발은 필수겠네. 인간이 만든 컴퓨터로는 기술축적 기간이 너무 늘어질테니까.”
“맞아. 인공지능을 만들어서 인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술개발을 할 수 있게 특이점을 발현시켜서 그 뒤로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기술축적 속도를 가속화해야해. 안 그러면 인류는 지구 밖에서 지구를 지켜보며 알아서 자멸할 거야.”
“이 세상에서 릭이 사라지면 인공지능 개발은 한참 뒤로 밀리니 니가 말한 모든 부가조건들의 실현가능성도 대폭 감소한다는 거구나.”
“정확히 이해했네.”
엘리스의 이야기엔 귀신도 없고, 괴물도 없고 좀비같은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지금 니가 말한 게 더스트가 아니라 내가 있는 지구에서도 준비해야 되는 미래이기도 하다는 것이 너무 무섭다.”
정후가 충격을 받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자 엘리스가 옆에서 부축을 하며 도왔다. 하지만 엘리스는 이것이 언젠가 정후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였기에 언제까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충격을 줄 때 한번에 몰아치면 당장은 힘들어도 아저씨라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엘리스,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니 말대로 이 세상이 게임같은 거라면 단축키라든가 나갈 수 있는 메뉴창같은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그런 거 아무리 마음 속으로 상태창같은 거 외쳐봐도 안나오는데...”
엘리스가 정신을 차리고 더스트로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냐는 정후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무슨 버튼 같은 게 있어야 누르고 나가지.”
박장대소하며 웃던 엘리스는 눈물을 훔치며 간만에 배꼽빠지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계속 웃어댔다.
‘이게 아예 미친 건가?’
정후가 슬슬 정색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엘리스는 더 이상 끌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알려줬다. 엘리스의 대답을 들은 정후는 엘리스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해서 벙찔수밖에 없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죽는 거야. 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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