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196화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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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은 점차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처럼 느껴졌던 꿈 속의 남자가 어느 날부터인지 그 높이가 짐작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칼에 찔려 죽는 순간 깬다고 해도 지독한 냄새가 나는 노폐물은 몸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후우...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반복되는 자극은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죽음조차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마치 암환자가 암 진단을 받고 죽을 날을 받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5가지 단계 DABDA처럼 부정(Denial)분노(Anger)협상(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의 단계를 거치듯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꿈꾸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공터에서 하는 검술 훈련은 계속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것을 스스로 체감할 정도가 되자 비록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검을 잘 쓰게 되는 것이 인생의 큰 도움이 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발전’.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 덕분이었다.
“오늘부터 대련인 거죠?”
자신의 옆에서 매일 수련을 따라하던 브렌다는 생각보다 곧잘 따라하더니 어느 순간부턴 굳이 검식을 가르쳐줄 필요 없이 부분 동작들을 모두 익혀버렸다. 먼저 시작한 루아나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가르치는 사람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건가, 흠...’
아무리 스스로를 과대평가해보려고 해도 브렌다의 선천적인 운동능력이 공이 크지 않았나 싶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브렌다는 자신처럼 누가 꿈 속에서 죽이려고 드는 것도 아닐텐데도 매일 공터에 나와 검술 훈련에 동참했고 운동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잠시 대화를 하다가 친해졌다. 그러나 브렌다는 밝고 친근한 성격과는 다르게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줬다.
오늘의 대련은 며칠 전 브렌다가 매일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는 것도 좋지만 실전처럼 대련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얼추 몸은 풀린 것 같으니까. 한번 해 보자.”
서로 자세를 잡은 뒤 각자 훈련에 쓰는 날이 서지 않은 가검을 들고 마주 서자 꿈 속의 남자와 혈투를 나눌 때(일방적으로 맞는 것을 겨우 벗어났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같은 검술을 사용해서인지 서로의 대응방법이 뻔히 보일 것 같은데도 막상 대련이 시작되자 자신에게 배웠음에도 브렌다의 검술은 달랐다. 자신이 몸으로 익혀서 본능적으로 검을 쓴다면 브렌다는 머리로 이해해서 검이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기하네.’
의도적으로 브렌다와의 대련 중에는 ‘라이트’는 작동시키지 않았다. 훈련을 하면서 알게 된 자신의 몸 속의 ‘에너지’는 검에도 실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에너지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검에 불어넣으면 어찌된 일인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선검처럼 검을 얇게 씌울 수가 있었다. 릭은 빛이 나니까 별 생각 없이 기술 이름을 ‘라이트’라고 지었다. 어차피 이것은 자신도 어느 순간 자각한 것이라 브렌다에게도 가르쳐 줄 방법같은 것이 없는 것이라 누군가에게 말할 일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느끼는 것지만 브렌다는 여자의 몸인데도 속은 근육으로 가득 찬 것인지 자신과 비교해도 힘으로 크게 밀리지 않는 것 같아 릭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꼭 쇳덩이로 후려치면 이런 느낌일까.’
브렌다는 인간의 몸인데도 기계식 뼈대를 가진 레플리칸트인 자신과 맞붙어도 기술이 아니라 힘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릭을 보면서 자신이 짐작한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의도적인 것인지 의도하지 않은 것인지 릭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나 검을 주고받을 때면 릭의 검에선 미세한 빛의 입자가 관측되곤 했다. 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릭의 검술 전반을 빠르게 배웠음에도 릭의 검술은 그저 배우는 것과는 뭔가 달랐다.
‘저런 활용 방법도 있구나.’
기초를 배우고 연결 동작을 익혔을 때 완벽하게 다 배웠다고 생각했던 ‘5252’의 판단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A에서 시작된 동작이 B로 갈 때도 있었지만 전혀 생각지 않았던 D와 연결되거나 방어를 할 거라고 생각한 순간에 눈속임을 집어넣고 유인을 한 뒤 릭은 우회적인 공격을 하기도 했다. 브렌다는 금방 릭의 검술을 다 배웠다면서 은근슬쩍 ‘빛’을 내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대련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배운 것은 말 그대로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여기까지!”
날을 새우지 않은 검이지만 자신의 머리 위에 강렬하게 내려친 검이 멈췄을 땐 이대로 부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브렌다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와...릭도 릭인데 브렌다는 왜 이렇게 잘해? 둘이 무슨 영화 찍는 줄 알았어.”
둘의 대련이 끝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루아나가 박수를 크게 치면서 대단하다고 했다.
“그치? 이거 이대로면 금방 따라잡히겠어. 좀 더 열심히 해야지 선생님 소리를 계속 듣지 안 그러면 지겠는데?”
“아닙니다. 릭 선생님과 대련을 하기 전만 해도 얼추 다 배운 것 같다고 자만했는데 아니었네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고생했어.”
브렌다는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오늘 한 대련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릭의 움직임에 알게 모르게 페인트가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뭘 보고 있는지 릭은 자신의 동작을 보고서 순식간에 대응해냈는데 똑같은 검술을 수련했음에도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해서 오늘도 평소처럼 커뮤니티에 브렌다는 R17들이 버려졌지만 아직은 작동가능한 인공위성을 발견하여 사용하고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찍은 영상 소스를 가지고 녹화된 영상과 자신의 시각을 통해서 확인된 영상을 자신의 분석자료와 함께 업로드했다. 자신과 다른 R17들은 어떤 방식으로 볼 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난 5252가 릭과 대련할 때 릭이 어떻게 해서 5252의 움직임에 대처하는지 그게 신기했거든. 그런데 5252가 다리를 움직이면 그에 맞춰 릭은 5252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이 되나봐. 4분 30초쯤 보면 이게 확실히 나타나거든?]
[인체는 상체와 하체가 극단적으로 다르게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런 것 같아. 예를 들자면 5252가 오른발을 내밀면 자연스럽게 검은 오른쪽에서 움직이니까 릭은 그에 맞춰서 경험적으로 움직이는 거지. 공간 상에서 그 검이 지나가야 하는 선은 정해져 있으니까.]
[다른 검술과 비교해보면 꽤나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인류의 역사에서 다듬어진 다른 검술들과 비교해봐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아.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발전되어 있어. 인체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한 존재가 만들어 놓은 것 같다고 할까.]
[너희들과 다르게 난 릭의 행동에서 고수가 하수를 대상으로 움직일 때 보이는 패턴을 확인했어.]
[예를 들면 어떤?]
[릭이 5252를 상대로 검을 쓸 때 릭은 5252의 움직임에서 빈틈들을 확인하고 있어. 5분 8초쯤 보이는 릭의 시선처리를 보면 분명 브렌다의 검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검이 어디로 갈지를 짚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인체학부터 시작된 댓글은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는 논물들을 통해 분석되고 검증되었다. 이는 브렌다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다수의 R17들의 협업의 결과였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릭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움직인 것이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야, 그래도 뼈대 있는 집안의 R17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인간한테 전력을 못 끌어낸 거지? 5252도 영상으로 보면 인간들 수준으론 ‘고수’라고 봐도 괜찮을 수준인 것 같은데]
[니들이 잊은 것 같은데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검에서 어떻게 ‘빛’을 뿜어냈는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어. 분명 5252와 대련에 쓰였던 그 가검으로도 ‘빛’을 뽑아 올렸잖아.]
[맞네. 그 상태의 릭의 검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한데...]
[도저히 안되겠다. 나도 배우러 갈래.]
[나도.]
브렌다와 몸을 풀고 있는데 처음 보는 여자 두 명이 공터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저기 보니까 며칠동안 여기서 운동같은 걸 하시는 것 같은데 저희도 배울 수 있을까요?”
“네?”
이상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브렌다를 쳐다보자 브렌다는 두 명의 여자와 묘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더니 자신을 쳐다봤다.
“왜 그러시죠, 선생님?”
“아니...꼭 처음에 너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아...”
브렌다는 댓글에 달아놓은 대로 진짜로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자신처럼 인간으로 위장하고 찾아온 두 R17들에게 욕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진짜로 오면 어떻게 하는 거야! 릭이 의심하잖아.]
[너는 되고 우리는 안돼?]
[그러게. 릭이 니 거야? 릭은 R17들 모두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인간이잖아.]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흠, 두 분 이름이...?”
“아, 저희가 예의도 없이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제 이름은 에밀리Emily고, 이쪽은.”
“전 비앙카Bianca라고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릭입니다.”
자신을 에밀리라고 소개한 여자는 꽤나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여전사 느낌의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자였고, 비앙카라고 한 여자는 에밀리랑은 키가 비슷했지만 호리호리한 슬렌더 체형의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흠...”
릭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자 브렌다는 빠르게 에밀리와 비앙카와 의사교환을 한 뒤 릭에게 말을 걸었다.
“릭 선생님? 제가 기본적인 걸 두 사람에게 가르치면 릭 선생님도 크게 부담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줄래?”
에밀리랑 비앙카는 자기들도 직접 릭에게 배우고 싶다고 하고 싶었지만 뜬금없이 찾아온 것도 릭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판에 그렇게 했다간 릭이 다른 곳에서 혼자 검술 훈련을 하겠다고 할까봐 걱정이 들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며칠동안 본가에 가야할 일이 있었던 루아나는 릭에게서 오늘 오면서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공터에 도착해서 늘어난 여자들을 보자 릭을 잘 간수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꽃에 나비가 꼬이듯이 아주 여자들이 알아서들 찾아와.’
브렌다처럼 칼같이 예의있게 선생으로만 대하는 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때려치고 둘이서만 하자고 이야기해야 할 판이었다.
‘세 사람에서 또 늘어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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