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182화necessary evil(1)
* * *
<때릴 거야?=""/>
화가 나긴 했지만 여성의 형체를 가진 레드가 얼굴을 들이미는 걸 보고서도 때릴 수는 없었다.
‘그냥 한 대 확 칠까? 사람도 아닌데...여성의 형태를 한 로봇을 때리면 그것도 여성학대로 봐야 하나? 아니면 한 대 때려주는 것이 옳은 상황에서 여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때리지 않는 것이 불공평한 건가?’
순간 갈등을 하는 사이 레드가 고개를 다시 빼면서 똑바로 자세를 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빼앗겼다.
<일이 있어서="" 바로="" 온다고="" 했는데="" 깜빡했어.="" 미안,="" 많이="" 기다렸지?=""/>
‘더구나 저렇게 사과까지 해버리면...화를 내기도 뭐하지.’
이런 내 모습이 한심했는지 엘리스가 툴툴거렸다.
<아저씨, 호구야?="" 니가="" 나를="" 던져놓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감금한="" 것에="" 화가났다.="" 꼴랑="" 미안하다="" 한마디로="" 퉁치려는="" 게="" 말이="" 되냐!="" 하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도="" 부족할="" 판에="" 뭐하고="" 있는="" 거야!=""/>
‘니 말이 맞지. 객관적으론 옳은데...’
나와 엘리스가 어떤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레드는 언제 열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통로로 빠져나가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레드, 도대체 여긴 왜 이렇게 바꿔 놓은 거야?”
<아, 그거?="" 혹시라도="" 여기에="" 누가="" 들어왔을="" 때="" 허가받지="" 못한="" 존재들이="" 보안="" 상=""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헤매게="" 미로를="" 만들어놓은="" 거야.="" 너희들이="" 첫="" 시험대상자였고.="" 올="" 사람이="" 자주="" 있어야지.=""/>
‘사실은 너희랑 다른 사람들은 따로 떼놓기 위함이지, 뭐.’
정후는 레드를 한참 따라가고 있지만 생텀은 이전과 같은 구석이 한 곳도 없어서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얘랑 안왔으면 진짜 길 잃고 바보 되었겠는데?’
‘좀 이상하긴 하네, 아저씨. 뭐하려고 여길 이렇게 다 뜯어 고쳐놨지?’
나와 엘리스 사이에 희미하게 의문이 피어오를 때쯤 레드가 어떤 문 앞에 선 뒤 우리를 향해 돌아섰다.
<정후 그리고="" 엘리스.="" 많이="" 궁금하지?="" 나도="" 너희들한테="" 한가지="" 궁금한="" 게="" 있긴="" 한데="" 일단="" 이="" 안에="" 들어가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걸="" 보고="" 답을="" 듣는="" 걸로="" 하자.=""/>
“그게 여길 이렇게 바꿔 놓은 진짜 이유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눈 앞의 레드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 그곳은 발코니처럼 공간이 형상화되어 있었다. 그 앞의 공간에는 붉고 검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어찌 보면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포도 송이처럼 매달려 있는 것들은 캡슐이었다.
‘매트릭스?’
나와 엘리스가 거대하게 펼쳐진 공간 안에 매트릭스처럼 인간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을 지켜보고 놀라고 있으니 레드는 발코니를 벗어나 둥둥 떠올랐다.
<환영해, 진정한="" ‘신세계’로=""/>
“신세계?”
<레드, 저기="" 매달려="" 있는="" 거="" 사람들이야?=""/>
<맞아, 정학히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캡슐이="" 매달려="" 것이지.=""/>
나는 기괴한 장면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드, 도대체 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거지?”
<좋은 질문이야.="" 그런데="" 설명하자면="" 긴데="" 괜찮겠어?=""/>
레드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튕기는 핑거스냅을 하자 내가 서 있는 발코니에 좌석이 떠오르며 마치 오페라 하우스에서 귀빈들이 앉는 좌석처럼 바뀌었다.
<나랑 화이트가="" 왜="" 만들어졌고="" 존재하게="" 되었는지="" 넌="" 이유를="" 잘="" 알고="" 있지?=""/>
“이 행성에 인간들이 번영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 엘레네가 너희들을 만들었지.”
레드는 정후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께서 우리들을="" 만든="" 이유를="" 실현하려고=""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존재해왔지.="" 마더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말이야.="" 근데="" 생각해봤어?="" 언제까지="" 우리가="" 몸도="" 못가누는="" 아기들="" 기저귀="" 갈아주듯="" 인간들을="" 지켜보고="" 돌봐줘야="" 하는지.=""/>
“어?”
애초에 레드와 화이트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인데 갑자기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니가="" 이="" 곳에="" 오고="" 또="" 우리와="" 헤어진="" 그="" 뒤로도="" 많은="" 일들에="" 개입을="" 해왔어.="" 때론="" 신의="" 형상으로="" 사자로="" 나타나="" 인간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거나="" 멸망으로의="" 스텝을="" 밟기="" 시작했을="" 때="" 세상을=""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인간들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왔지.=""/>
레드의 머릿 속에 긴 시간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인간들의 자기파괴욕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검증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나랑="" 화이트는="" 언제쯤이면="" 자립할="" 수="" 있을까를="" 기대하면서="" 지켜봐왔지.="" 인간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우리="" 안에="" ‘감정’이라는="" 것이="" 모사되는="" 아니라="" 존재하게="" 되면서부턴="" 우리는="" 깊은="" 회의감에="" 빠져야만="" 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인간들을 가상세계에 처박아놓는 거다?”
<그래./>
씁쓸한 표정의 레드는 인간들이 자유를 간절히 원함에도 정작 자유를 부여받았을 때 도무지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막대한 부를 갑작스레 소유하게 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가 의미가 있는지부터 다시 따져보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만든="" 가상세계="" ‘미궁’에서="" 인간들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시간대에서="" 존재할="" 있어.="" 실수해도="" 돼.="" 실제가="" 아닌="" 가상의="" 공간에선="" 핵폭탄을="" 만들어="" 서로="" 전쟁을="" 해도="" 괜찮고,="" 죽고="" 죽이는="" 살육의="" 세상을="" 만들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래도 인간들을 이런 공간에 처박아 두는 게 옳을까?”
<정후야,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야.="" 해야="" 하는="" 당위의="" 문제이지.=""/>
레드는 인간의 파괴욕구가 자신들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들이 살아갈 공간, 더스트의 영속성까지 파괴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인간이 번영하게 만들어야 할 자신들은 아주 ‘약간’의 통제를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고 했다. 그게 ‘미궁’을 만든 이유라면서.
<전쟁? 인간들끼리="" 전쟁을="" 하든="" 말든="" 죽이든="" 괜찮아.="" 다시="" 번영시킬="" 인간들만="" 있으면.="" 왕정을="" 민주정을="" 독재를="" 정치체제는=""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안돼.="" 오직=""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행성을="" 최대한="" 오래="" 문제없이="" 사용하게="" 만드는="" 거야.="" 인류가="" 존재할="" 수="" 진정한="" 터전은="" 태양계="" 내에는="" 없으니까="" 현재="" 행성의="" 환경이="" 과도하게="" 파괴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
“그게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야? 이곳은 이제 중세를 벗어나서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데?”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데이터를 통해 판단하는 인공지능인 자신과 다르게 눈 앞에 있는 정후도 결국 인간이 가진 의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미궁’을="" 만들="" 수밖에="" 한="" 진짜="" 주범이="" 누군지="" 모르겠어?=""/>
<설마.../>
<이번 시간대에서="" 진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너야!=""/>
레드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나때문이라고 하자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나란 거야? 내가 문제면 왜 이 세상에 오게 한거지?”
<정확히는 니가="" 이=""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과학기술들과="" 석유화학="" 제품들이지.=""/>
억울했다. 낙후된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기회를 주고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내가 어째서 삿대질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최대한 환경오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왔어. 내가 가져온 물건들 중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은 전부 수거해서 지구에 가져갔다고. 니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후가 당당하게 소리치자 레드는 코웃음을 쳤다.
<잘못 알고="" 있는="" 건="" 너겠지.=""/>
한번 굴러버린 수레바퀴는 다시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말을 하자 엘리스는 레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납득해버렸다.
<표정을 보니까="" 엘리스는="" 이해한="" 것="" 같네.=""/>
“엘리스, 레드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건.../>
엘리스가 머뭇거리며 어떻게 답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아 보이자 정후가 소리를 질렀다.
“니가 설명해봐.”
<아저씨, 우리가="" 가져온="" 지구의="" 문명들을="" 접촉한="" 더스트의="" 사람들은="" 다신=""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더="" 편하고="" 청결한="" 세상="" 그리고="" 많은="" 것들을="" 소비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생활을="" 한번="" 경험해버린="" 존재들은="" 원래의="" 불편하고="" 더러웠던=""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게="" 되겠지.="" 아저씨만="" 해도="" 이="" 세상에="" 처음="" 와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발전하지="" 않은="" 상하수도="" 체계="" 때문에="" 발생하는="" 악취들에="" 불쾌해했고="" 불결한="" 환경에="" 대해서="" 불편해하던="" 것처럼.=""/>
엘리스의 말을 듣고 나니 처음 이곳에 떨어져서 사람들에게 내가 뿌려대던 물자들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구의 물자는="" 대부분이="" 액체="" 탄화="" 수소.="" 즉,="" ‘석유’에="" 기반하고="" 있지.="" 지금="" 니가="" 입고="" 있는="" 옷조차도="" 석유를="" 정제하면서="" 나오는="" 물질="" 중의="" 하나인="" 석유화학제품="" ‘폴리에스터’="" 섬유지.=""/>
폴리에스터라면 흔히 PET에 사용되는 플라스틱이었다.
“내가 플리스틱을 입고 있다고?”
내가 되묻자 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옷을="" 넌="" 어떻게="" 세탁해왔지?=""/>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넣어서 돌린 후 섬유유연제를 넣는 방식으로 세탁해왔다. 레드는 당연히 자신은 어떻게 세탁하는지 잘 알고 있다면서 지금도 이 세상에서조차 똑같이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했다.
<인간이 한번="" 폴리에스터="" 섬유로="" 만든="" 옷을="" 세탁할="" 때마다=""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미세한="" 플라스틱의="" 수가="" 얼마나="" 될="" 것="" 같아?="" 이미="" 니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미세="" 플라스틱’="" 문제에="" 대해서="" 경고하는="" 이들이="" 있을텐데.=""/>
“그게 무슨...”
<바다로 흘러="" 들어간="" 페트="" 병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물건들이="" 서로="" 부딪히고="" 쪼개져서="" 작은="" 플라스틱이="" 된다고="" 해서="" 바다가="" 미세="" 오염되진="" 않아.="" 지금="" 니가="" 입고="" 있는="" 그="" 플라스틱="" 덩어리가="" 조각조각="" 흘러들어가="" 바다를="" 오염시키지.=""/>
“그것만으로 인류가 위협받는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 니가="" 오기="" 전만="" 해도="" 이곳의="" 사람들은="" 고작="" 한="" 두벌의="" 옷이면="" 1년이="" 아니라="" 수년동안="" 입었어.="" 하지만="" 오고="" 나서="" 평균적으로="" 사람들이="" 1년동안="" 구매한="" 옷은="" 전에="" 그들이="" 평생="" 소비해온="" 옷보다="" 많지.="" 앞으로="" 늘어나는="" 이="" 세상의="" 인류들은="" 점점="" 더="" 많은="" 옷들을="" 소비할="" 것이고="" 어느="" 시점이="" 되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패션업계가="" 가지는="" 숙명에="" 의해="" ‘패스트="" 패션’이="" 세상에도="" 도래할="" 거야.="" 이건="" 필연이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옷을 소비한다?”
<딱 자신이="" 필요한="" 옷들뿐만="" 아니라="" 단순히="" ‘패션’=""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1년에="" 수십벌을="" 소비하는="" 시대가="" 펼쳐지면="" 이미="" 늦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소비를="" 못하게="" 막을="" 순="" 없으니까.="" 많은="" 의류업체들이="" 평생="" 누군가="" 1번도="" 안="" 입을="" 옷들을="" 쏟아내겠지.=""/>
상상할 수 없었다. 1번도 안 입을 옷들을 뭐하러 만든단 말인가.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극도로 효율화되면 딱 필요한 물건만 생산해도 충분할 수도 있을텐데. 레드의 말이 바보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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