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3화 〉 173화­라일락 (173/239)

〈 173화 〉 173화­라일락

* * *

“간만에 창잡이를 만나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

눈을 감고 있는 아왕의 귓가에 상대편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난 저 사람의 창이 뱀처럼 아왕의 창을 감고 들어가서 아왕의 목을 베는 건 아닌가 깜짝 놀랐어.”

“저 남자 고기를 잘 굽길래 같이 다니는 요리사인줄 알았는데 꽤 뛰어난 창술가였군, 그래.”

“내가 말했잖아. 저 얼굴은 그냥 요리사할 얼굴이 아니라니까. 잘 웃긴 하지만 인상부터가 쎈 게 사람 잘 잡을 스타일이랄까?”

사람들의 말 중 드마코의 귀에 살짝 거슬리는 이의 말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자신의 뛰어난 솜씨를 격찬하는 말이었기에 드마코도 내심 흡족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창을 채찍처럼 쓸 줄은. 창의 기능과 채찍의 기능을 한번에 다루시다니 대단합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당신의 창술도 대단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위협적인 한수를 나눴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둘은 의기투합하여 서로의 창술의 장단점과 상대방의 창술을 흉내내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자자, 여러분들 이러지 말고 무대 아래로들 내려가서 계속하시게. 다음 차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사의 진행을 맡은 촌장의 아들이 원활한 진행을 위해 두 사람의 등을 밀며 아래로 내려가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음을 안 둘은 서둘러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이거이거, 우리 크로니클 단원들이 압도적으로 이기는구만 그래. 하하.”

자이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버크가 신이 나서 큰 목소리로 웃자 친선경기이긴 했지만 연달아 패한 말라야히마 마을의 경비대장인 자이온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것들 한동안 특훈이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이렇게 내리 지는 거야.’

“하하하하, 이거이거. 우리가 오늘 많이 배우는구만 그래. 그래도 앞으로 남은 단원들은 만만치 않을 거라고.”

“그런가? 기대되는구만!”

버크는 남은 세 번의 대결도 여지없이 크로니클 단원들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장 빅터도 있긴 했지만 자신과 코엘 정도면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창수들간의 대결동안 휴식을 취한 정후가 이번엔 경비부대장인 브라이스와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오르자 자이온은 부대장인 브라이스에게 너까지 지면 알아서 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야야, 지면 알지? 너까지 지면 나랑 라모가 이겨도 2승 3패야! 이겨도 이긴 게 아니라고.’

‘헤에, 왜 난 지고 넌 이길 거라고 가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그러니까 부디 좀 너부터 이겨줘라.’

‘내가 이기고 니가 지는 것도 생각 좀 해라.’

‘내기할래? 내가 지고 니가 이기면 니가 다음 마을 대결 전까진 경비대장이다.’

‘흐음, 좋아! 혹시 우리 둘다 이기면 일단은 니가 경비대장직을 한동안 계속 맡고 있게 해주지.’

‘니 맘대로 해라. 그건.’

마을 경비대 자존심이 있지 아무도 이기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들끼리 서로 잘났네 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자이온 입장에선 브라이스가 꼭 이겨줄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전음(?音)을 통해 작전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한 정후는 이번엔 어떻게 싸우면 좋을지 상대방의 체형과 이전의 마을 경비대원끼리 대결했을 때의 움직임을 떠올려 예측을 해보고 있었다.

“정후, 이길 수 있겠어요?”

“해봐야 알겠죠. 섀넌.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풀어졌고. 걱정하지 말아요.”

“다치지 말아요. 잠깐 이리로 와볼래요?”

“네? 뭐 줄 거 있어요?”

섀넌으로부터 응원의 키스를 받은 정후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살짝 풀어지자 옆에서 지후가 투덜거렸다.

“어허, 신성한 대결 직전에 도대체 뭐하는 짓들이야.”

“인마, 형님이랑 형수님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뭐하는 짓이라니! 형님이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기운을 받고 있는데. 넌, 이따가 대결 끝나고 내려와서 봐.”

“다치지 말고나 돌아오라고.”

형제간의 우애를 잠시 확인한 나는 촌장 아들이 무대 가운데로 올 것을 요청하는 말을 듣고 등을 돌려 움직였다.

“지후도 형이 걱정되죠?”

정후로부터 행운의 여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섀넌이 홍조섞인 두 볼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면서 지후에게 물어보자 지후는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형이니까요.”

두 사람이 짧은 대화를 나눈 사이 촌장 아들의 진행에 따라 양측이 인사를 나누고 서로 대결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이야, 왜="" 이렇게="" 동네가="" 시끄럽나="" 해서="" 내려왔는데="" 나만="" 빼놓고들="" 재밌는="" 걸="" 하고="" 있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지만 하늘에서 나타난 존재는 태양에 가려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누구지?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누구냐!”

마을의 경비대와 크로니클 단원들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봤다.

<다들 모여="" 있네~=""/>

“붉은 마녀!”

경비대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이 촌장의 놀란 목소리에 기겁을 했다.

“붉은 마녀라고?”

“아니! 저....저....저 마녀가 어째서 여기에!”

<왜? 내가="" 감히="" 못올="" 곳을="" 온="" 건가?="" 이="" 땅이="" 너희들="" 것은="" 아니잖아?=""/>

“무슨 소리냐! 이 곳은 대대로 우리 일족이 자리를 잡고 살아온 우리들의 터전! 이 땅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겠느냐!”

경비대장 자이온이 크게 분노하며 소리 질렀다.

<아아, 너무="" 소리지르지마.=""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난="" 잘="" 듣는다구.="" 그리고="" 너희들이="" 여기에="" 오래="" 자리를="" 잡은="" 것은="" 맞지만="" 그건="" 나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지.="" 니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는="" 아니야.=""/>

하늘에 떠 있는 존재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응답하자 경비대장이 더욱 열이 올라 오러를 날렸다.

“니가 우리가 이곳에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 조상님이 이곳에 머무른 시간이 도대체 얼마인데 감히 그런 소리를!”

<소리 그만="" 지르라니까.="" 다="" 들린다고.="" 그리고="" 그쪽의="" 촌장은="" 생각이="" 다른="" 것="" 같은데?=""/>

여성의 말을 들고 사람들이 촌장을 바라봤을 때 촌장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그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이전부터 내려져 온 전설이 아니었나? 분명 엘프와 드워프를 만든 두 신 중 하나가 이곳에 우리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긴 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네, 전설이="" 아니었답니다~.="" 신은="" 아니지만.=""/>

촌장의 혼잣말에 대답한 존재가 하늘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자 역광이라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의 모습이 정후의 눈에 들어왔다.

“레....레드?”

<반가워. 정후야.=""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내게 있어선 레드와의 헤어진 시간이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었기에 눈 앞의 레드의 모습을 나는 못알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헤어질 때로부터 이 세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때와 별반 차이없는 레드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오랜만이네. 근데 변한 게 없구나. 레드.”

<나야 뭐.="" 알잖아.="" 엘레네께서="" 만들어주신="" 존재인데="" 나나="" 화이트나="" 우리들이="" 더="" 이상="" 존재로서="" 활동을="" 유지하지="" 않길="" 원하지="" 않으면="" 모를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버크와 섀넌은 눈을 크게 키우며 정후에게 물어봤다.

“정후군. 저....저 여자 분을 레드 님이라고 한 것 같은데 맞나?”

“그 사라졌다는 드워프의 신님?”

다른 크로니클의 단원들도 두 사람의 놀라운 표정을 보고서야 눈 앞에 나타난 존재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랜 친구의 등장에 반가울 법도 하건만 난 이상하게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오랜만에 온 친구의 연락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던 경험이 많아서였을까.

<그냥 하던="" 일도="" 이젠="" 다="" 끝나던="" 찰나에=""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인사도="" 할="" 겸="" 찾아왔지.=""/>

“그래?”

<정후는 내가="" 반갑지="" 않은가봐?="" 난="" 진짜="" 찐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리스도 레드에게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이야. 레드=""/>

<아! 엘리스도="" 있었구나?="" 흠,="" 엘레네가="" 드디어="" 깨어나셨나보군.=""/>

정후는 얼마 전 만났던 엘레네와의 만남을 굳이 레드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엘레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서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말하려니까="" 좀="" 그렇다.=""/>

천천히 정후 쪽으로 다가온 레드는 엄지와 검지를 튕겨 테이블과 의자를 만들어냈다.

<오랜만인데 가볍게="" 티타임=""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게="" 바쁜="" 것="" 같지도="" 않은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던 나는 갑자기 나타나 친근하게 말을 거는 레드의 말에 응하기도,응하지 않기도 애매했다.

“이 마녀! 니가 어떻게 감히 이 마을에 나타날 수가 있느냐!”

정후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자이온과 경비대원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일제히 무기를 빼든 채로 의자에 먼저 앉아 있던 레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왜 이래?="" 오랜만에="" 본="" 친구들끼리="" 오붓하게=""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는데="" 예의="" 없이.=""/>

어느새 주전자를 꺼낸 건지 레드가 찻잔에 물을 따르며 달려드는 5명을 스윽 쳐다보자 다섯명은 원래 있던 자리로 냅다 던져졌다.

“으윽.”

“뭐지?”

<도저히 편하게="" 차도="" 못="" 마시겠네.="" 그치,="" 정후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레드가 테이블 쪽으로 오라며 두어번 테이블을 두드리자 순식간에 공간이 왜곡되어 매트릭스 속의 하얀 공간처럼 환한 백색의 방에 나와 엘리스 그리고 레드만이 남아 있었다.

<편히 앉아도="" 돼.="" 오랜만에="" 친구랑="" 만나서="" 이야기하겠다고="" 하는데="" 방해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치?=""/>

<공간왜곡 마법인가요?=""/>

<엘리스는 여전히="" 탐구심이="" 많네.="" 예전에="" 정후가="" 가진="" 인벤토리="" 능력을="" 보고="" 만든="" 마법이지.="" 꽤="" 괜찮은="" 마법이야.="" 조용하게="" 있고="" 싶을="" 땐="" 특히.=""/>

엘리스와 대화를 주고받는 레드를 바라보며 내가 멍하게 서 있자 레드는 테이블 앞에 놓여진 두 개의 의자 앞으로 찻잔에 김이 나는 물을 따른 뒤 찻잔과 받침을 둥둥 띄워 천천히 보내왔다.

<개회나무 꽃차야.="" 대충="" 라일락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면="" 돼.="" 향이="" 좋아.="" 몸에도="" 좋고.=""/>

내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 의자에 앉자 레드는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면서 나와 엘리스에게 권했다.

<따뜻할 때="" 마셔.="" 보랏빛이="" 참="" 예쁘지?="" 향기도="" 좋고="" 말이야.="" 언젠가=""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나누고="" 싶어서="" 준비해뒀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

투명한 찻잔 속에서 보랏빛의 라일락 꽃이 점차 펴지며 찻잔 속에서 피어오른 향기가 하얀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찻잔을 내려다보던 나는 레드가 준 라일락 꽃차가 딱히 날 죽이거나 위험하게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 한모금 마시고 마음을 정리했다.

‘향이 좋긴 좋네.’

“레드, 넌 여기 와서 뭐하고 있었어?”

나의 질문에 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야.="" 역시="" 커맨더="" 자리는=""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었나봐.="" 요점을="" 딱="" 집네.=""/>

눈을 감고 차향을 들이켜며 음미하던 레드는 눈을 떠서 예전과 달라진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오드아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