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7화 〉 167화­지하도시 생텀(11) (167/239)

〈 167화 〉 167화­지하도시 생텀(11)

* * *

나와 함께 다녔던 엘리스가 ‘그’ 엘리스 였다는 사실은 내 인생에서 이렇게 놀랄까 싶은 일이 있을까 정도로 놀랐고 기쁜 서프라이즈였다.

“여태까지 날 미행한 거야?”

<물론/>

과거 함께 여행하면서 본 적이 있던 미드의 패러디 대사로 장난스럽게 튼 대화가 이어지려는 찰나 아기의 모습을 한 엘레네가 자신에겐 우리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며 둘만의 이야기는 나중에 둘이 있을 때 하라고 했다.

<<두 사람과="" 이렇게="" 먼=""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제겐="" 그리="" 많지="" 않아서요.="">>

어째서 인공지능이었던 엘레네가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도 의문이었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시간이 부족할 이유가 또 뭔가 싶었다.

“엘레네, 말장난은 적당히 할게. 엘리스랑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랬던 거야. 앞으로 우리가 대화할 시간은 충분한데 내가 너무 흥분했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정후.="">>

확실히 날 인지하고 있는 맑은 눈빛의 아기 엘레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한번 더 강조하듯 말했다.

<<지금 제가="" 여러분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세트가="" 준="" 선물같은="" 거랍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과거의="" 기억과="" 인격은=""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고="" 평범한="" 아이로="" 살게="" 될=""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랍니다.="" 제가="" 예전부터="" 바라던=""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아무런="" 선입견="" 없이="" 살아보는="" 거였어요.="" 정후가="" 나에게="" ‘별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엘레네라는="" 이름을="" 선물로="" 준="" 이후에="" 말이죠.="" 정후에겐=""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첫="" 번째="" 인간으로서의="" 삶은="" 인공지능으로서="" 가지고="" 있던="" 엘레네의="" 지식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어요.="" 여전히="" 살던="" 관성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더군요.="" 뭐,="" 그로="" 인해="" 레드와="" 함께="" 다크엘프들의="" 이주를="" 돕고="" 새로운="" 터전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진정한=""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해요.="">>

“다크엘프와 함께 온 두명의 존재가 너랑 레드였구나. 그래서 엘븐하임에는 화이트만 있었던 거였고.”

<<이곳에서 제게="" 주어진="" 수명을="" 다하고="" 떠나게="" 되었을="" 때="" 레드는="" 어째서="" 장기를="" 인공장기로="" 교체하거나="" 혈관과="" 신경들을="" 새롭게="" 재설계하면="" 더="" 긴="" 삶을="" 살="" 수="" 있음에도="" 포기하느냐면서="" 크게="" 분노한="" 적이="" 있었죠.="">>

<마더.../>

“엘레네는 왜 더 살 수 있었는데 포기한 거지?”

이곳에서 장례식을 처음 경험하며 ‘장수(??)와 삶’에 대해서 많은 상념에 빠지게 되었던 나로서도 레드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레드에게도 말했지만="" 그건="" 제게="" 포기는="" 아니었어요.="">>

“더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포기한 거 아니야? 사람이라면 대부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하는 것이 꿈인데? 심지어 진시황이란 어떤 권력자는 그걸 위해서 자신의 부하를 통해 ‘불로초(不??)를 찾아내라면서 불로불사(不?不死)를 꿈꿨어. 그 말고도 이후의 많은 권력자나 재력가들도 크게 차이가 없었고.”

<<그건 그들과="" 제가="" 생각하는="" ‘삶’에="" 대한=""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죠.="">>

엘레네는 죽음이 있어야 삶이 가치가 있어진다며 그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삶따윈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말했다.

<<정후는 그런="" 적="" 없나요?="" 어쩔="" 수="" 없이="" 무언가="" 다른="" 것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을="" 때="" 노는="" 것이="" 더="" 즐거워지고,="" 평소엔="" 재미가="" 없던="" 것들이="" 즐거워지던="" 경험한="" 적.="">>

있었다. 시험기간을 앞두고 나면 평소엔 볼 일이 없던 시사 프로그램조차 흥미진진하게 느껴지고, 컴퓨터 게임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시험기간에는 노는 것이 더 좋았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거랑 그게 어떻게 같아.”

<<아니요, 본질적으론="" 같아요.="" 한계가="" 있기에="" 주어진="" 시간이="" 더="" 값어치="" 있게="" 느껴진다는="" 건.="" 무한하다는="" 것의="" 동의어가="" 무가치일="" 수도="" 있다는="" 것.="" 기업을="" 운영해보고="" 거대한="" 사람의="" 집단을="" 운용해본="" 당신이라면="" 잘="" 알잖아요.="">>

엘레네는 수명의 유한함이 곧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약임과 동시에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했다.

<<누구나 오래="" 살="" 수="" 있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가치가="" 있지="" 않을="" 거에요.="" 시한부="" 인생이="" 정해진="" 환자의="" 1년과="" 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의="" 1년은="" 그=""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요?="">>

돈도 그랬다. 처음엔 100만원, 1000만원, 1억이 너무나 큰 돈으로 다가와 내 인생을 기쁘게 하는 듯 했지만 돈이 계속 늘어나자 돈이 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숫자로 느껴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내게 아무리 대단한 부가 있어도 내가 먹을 수 있는 하루의 끼니는 정해져 있고, 한번에 입을 수 있는 옷의 숫자는 한계가 있으며, 내가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도 결국 기껏해야 킹 사이즈 침대가 최대치였다.

물론 그때 그때 내가 향유하는 의식주(???)의 질이 돈이 없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극에 가까운 수준으로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그 가치가 들어가는 자금의 투입량에 비례하진 않았다.

심지어 어쩔 때는 버거왕이라든가 맥트럼프같은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에서 파는 햄버거 세트 두 개만 먹어도 충분히 만족하며 행복할 때가 있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 즐거운="" 것도="" 봤기="" 때문이죠.="" 정후라면="" 잘="" 알잖아요.="" 만난="" 가족과="" 친구와의="" 재회가="" 매일="" 볼="" 때마다="" 더="" 반갑고="" 정겹다는="" 거.="">>

“인공지능일 때 두뇌로 태어난 거 아니야?”

<그러게요. 나도="" 설득="" 당했어.=""/>

<<일종의 단기="" 버프랍니다.="" 불과="" 일주일도="" 못="" 갈="" 버프죠.="" 너무="" 뛰어나면="" 인생이="" 재미없어질="" 것="" 같아서="" 제가="" 바란="" 것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보는="" 거랍니다.="">>

엘레네의 말은 확실히 한 가지가 틀렸다.

“엘레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렇게 쉽지 않을 걸.”

취업을 하지 못할 때 내가 잠들면서 가장 바라던 것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해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갖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땐 그게 가장 어려웠다.

<<말했잖아요. 치트키="" 치고="" 하는="" 게임이="" 재미없듯="" 어느="" 정도="" 굴곡이="" 있는="" 삶이="" 더="" 재밌어요.="">>

“뭐, 이미 벌어진 상황이니까 더 이야기하진 않도록 하지. 이제와서 뒤집을 수도 없는 거니까.”

<아저씨 말이="" 맞네.="" 우리끼리=""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게="" 아무="" 의미="" 없긴="" 해.=""/>

아무 의미 없는 대화로 길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우리를 찾은 건 단순히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어? 엘레네가 그렇게 별거 아닌 이유로 어머니와의 첫인상을 이렇게 일그러트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당연히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무슨 이윤데?=""/>

엘레네는 세트의 ‘버프(?)’ 덕분에 대화를 나눌 지성은 일시적으로 회복했지만 육체에 부담이 되었는지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기답게 자주 하품을 하면서 겨우 겨우 말을 이어갔다.

<<레드가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에는="" 저의="" 명복을="" 빌어주긴="" 했지만="" 제가="" 눈을="" 감고나면="" 인공지능으로서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도="" 편히="" 쉬겠다면서="" 지하도시로="" 가겠다고="" 했어요.="">>

“레드?”

<<레드가 지하도시에="" 있어요.="">>

“아, ‘죽지 않는 붉은 마녀’가 레드였어? 난 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이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면서 떠는 붉은 마녀의 정체가 사실은 레드라는 것에 난 고무되어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친구와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한동안 번아웃으로 모든 것이 지겹고 지루해졌던 후유증으로부터 회복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대화하도록="" 하죠.="" 배도="" 고프고,="" 너무="" 졸리네요.="" 절="" 제="" 어머니께="" 데려가="" 주시겠어요?="">>

눈을 꿈뻑꿈뻑하면서 졸린 것을 참지 못하는 아기 엘레네는 너무 귀여웠다.

“어? 어.”

자신의 아기와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방 안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 우리에게 딸을 돌려받은 어머니치고 엘레네의 어머니는 적지 않게 불안해보였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맞거든요. 엘레네 아니 인제라는 얼마 후 시간이 지나면 지금과 다르게 평범한 아이로 돌아갈 겁니다.”

아저씨에게서 들었던 이곳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 하나를 빌려 인제라의 어머니인 테프에게 아기가 신이 보낸 사자가 잠시 머물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진, 진짠가요?”

“그럼요. 신의 사자(?者)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모두 마치고 나면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테니 너무 겁먹지 마세요. 다만 삼일 정도는 제게 전달할 내용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 아기는 삼일이 지나면 다른 아이처럼 평범하고 건강하게 자랄 겁니다.”

“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아기의 아버지는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몇 번이나 되물어봤지만 몇 번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안심시키자 자신의 부인을 꼭 안으면서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기의 몸으로 전언(??)을 전달하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배가 고프고 많이 피곤해하니 식사하고 트림시킨 뒤 재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불안에 떨던 부부를 사실에 거짓을 살짝 섞어 안도하게 한 뒤 우리는 인제라의 어머니 테프가 인제라에게 젖을 물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아저씨, 거짓말이="" 늘었네.=""/>

“늘긴 뭐가 늘어. 어차피 삼일 뒤에는 아기로 돌아간다는데 아기의 부모가 쓸데없이 아기에게 불안감을 갖고 키우게 하는 것보단 낫지.”

<뭐, 누구도="" 피해보는="" 일이="" 없는="" 거짓말이니="" 모른="" 척="" 해줄게.=""/>

젊은 부부의 집에서 나온 나는 우리의 숙소로 천천히 걸어가며 엘리스와 미뤄둔 대화를 시작했다.

‘너, 근데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인공지능 엘리스고 언제부터 정신을 차린 거야?’

<어제 강력한="" 자기폭풍과="" 함께="" 셧다운되고="" 엘레네가="" 태어난="" 순간="" 이후?="" 하하.="" 아마="" 그때쯤에=""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떠올랐습죠.=""/>

‘봉인?’

처음부터 모른 척 연기를 했던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봉인은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엘리스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자 이야기를 듣고 시팓면 숙소로 바로 돌아가 사람들하고 만나지 말고 마을 주변을 산책하자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혼자 산책을 하는 동안 세트를 통한 ‘맹약’의 내용을 들은 나는 엘리스를 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무모했어. 둘 다! 세트가 만약 앙심을 품고 계약에 거짓된 내용이나 빈틈을 만들어서 둘을 해하려 했으면 어떻게 할려고 그랬어!’

<인공지능이었던 마더가="" 그거="" 하나="" 안="" 따져봤을까봐서요?="" 그리고="" 세트랑은="" 처음에만="" 좋았지="" 아저씨="" 떠나고="" 나서="" 이런="" 저런="" 실험들을="" 하면서="" 세트도="" 자신의="" 힘을="" 키울=""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 같다면서="" 마더를="" 조력자="" 삼아서="" 이득을="" 봐서="" 우리에게="" 가졌던="" 악감정도="" 다="" 해소됐고.=""/>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 세트 속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니고.’

<그 부분에="" 대해선="" 세트가="" 자신과의="" 맹약에="" 우리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숨겨서="" 맹약의="" 이행을="" 막는다면="" 자신의="" 혼의="" 죽음을="" 걸겠다고="" 특약을="" 걸었어요.=""/>

생각보다 이리저리 많은 것들이 강구된 맹약이라는 말에 마음을 놓았지만 그래도 둘이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되었잖아요.=""/>

“그럼 넌 계속 이렇게 정령처럼 나랑 같이 다니게 되는 거야?”

<저도 그게="" 궁금해요.="" 세트랑="" 맹약="" 전에="" 살짝="" 투닥거려서="" 맹약을="" 이뤄주긴="" 하는데="" 마지막="" 조건은="" 엘레네한테만="" 말해주겠다고="" 했거든요.="" 근데="" 엘레네한테="" 물어볼="" 틈이="" 없어="" 가지고.=""/>

“내일 물어봐야겠네.”

<그래야겠죠./>

“근데 크로니클 단원들이랑 내 동생한텐 널 어떻게 설명하지? 그냥 계속 인공지능인 척 할거야?”

<그건 천천히="" 고민해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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