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161화지하도시 생텀(5)
* * *
“우우, 살려줘.”
“어우, 죽을 것 같다.”
“다들 괜찮아요?”
양꼬치와 보드카 그리고 갖가지 양고기 요리들을 먹으며 불태운 전날 밤의 열풍은 크로니클의 단원들에게 진한 흔적을 남겼다. 아니, 정후와 지후 그리고 드마코에게만.
“물, 물 좀....”
“여기요.”
사막을 헤매던 이들이 오아시스를 찾았을 때 보일 반응처럼 진한 갈증 끝에 마시는 물은 정후에게 있어 오장육부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휴우, 이제 좀 낫네.”
“다들 어제 너무 마시더라구요.”
“여기 없는 사람들은 어디갔어요?”
섀넌이 건넨 차가운 상태의 1.5L 페트병을 원샷한 정후는 주위를 돌아본 결과 동생과 드마코 형은 있는데 버크 아저씨와 빅터 교관 그리고 코엘 누나가 자리를 비운 것을 발견했다.
“빅터 씨는 아까 새벽 운동한다고 나갔고, 버크 부단장님이랑 코엘 언니는 그때까지 이곳 사람들하고 계속 마시고 있었어요. 아마 지금도 마시고 있을 걸요.”
“괴...괴물들.”
분명 자신과 함께 비슷한 속도로 마셨는데 한 명은 평소와 같이 새벽운동을 나갈 것처럼 쌩쌩하고, 두 명은 지금까지도 마시고 있을 거란 소리에 질리는 기분이었다.
“형...형...”
어디선가 쩍쩍 갈라진 논두렁마냥 마르디 마른 듯한 성대에서 나와선 안될 것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후였다.
“어제 누가 술하면 이지후, 이지후하면 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신보다도 처참한 꼴의 동생을 보며 이게 정상이지라고 되뇐 정후는 자신의 동생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애. 목도 말라서 죽을 것 같고.”
“잠만 기다려 봐.”
방금 전의 한마디도 겨우 내뱉은 것이었는지 죽은 것처럼 미동도 않는 동생을 잠깐 보곤 정후는 인벤토리에서 꿀을 꺼내 시원한 물에 담은 뒤에 바텐더가 쉐이크를 흔들 듯 흔들고 나서 동생의 입에 페트병을 물려줬다.
지후는 형이 물려준 페트병을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 것처럼 갓난 아이가 젖병을 쥐고 먹는 것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옳지, 옳지.”
그 모습을 지켜본 섀넌은 정후가 아빠가 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을 하며 망상에 잠겼다.
“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는데. 이제 좀 살겠어...”
“넌 정말 나 같은 형님이 옆에 있다는 것에 감사해해야 돼.”
“그렇게 생색만 안 내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지.”
“이 짜식이. 형님이 동생한테 꿀물까지 타다가 입에 물려줬으면 ‘감사합니다.’를 먼저 해야 될 거 아니야.”
툴툴거리는 동생을 향해 레슬링 기술을 걸자 지후는 바닥을 향해 탭을 치며 항복의사를 표시했다.
“컥컥.”
“어, 좀 기술이 세게 들어갔나?”
“죽였다 살렸다 맘대로 해라. 뭐라고 할 기운도 없다.”
꿀물을 들이켜고 나서 다시 널부러진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살짝 정신을 차린 지후는 전날의 화려한 밤을 떠올렸다.
“내가 다시 어제처럼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
“우쭈쭈쭈. 어머니에게 동생이 개로 바뀌었다고 말씀드려야겠네. 이름은 뭘로 하지?”
“저리 가라.”
모기를 내쫓듯 손으로 휘이 저어 보지만 정후는 간만에 동생에게 장난치는 것이 즐거웠는지 살짝 피하곤 다시 강아지를 대하듯 동생의 턱 밑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아직 아니거든? 다음에 마시면이라고. 다음에!”
“아니야, 넌 분명 또 어제처럼 처마실 거야. 그러니 오늘부터 미리 개처럼 대해줄게. 자, 이걸 던지면 물어오는 거야. 그럼 맛있는 간식을 주마.”
“하지 말라고.”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섀넌의 옆으로 코엘이 다가왔다.
“형제의 사이가 참 보기 좋아. 술 취하고 다음 날인데도 우애가 넘쳐 보이네.”
“그렇죠?”
“드마코는 깨우지 말라고 전해 줘. 좀 전에 잠들었거든.”
“알았어요.”
“나도 지금부터 좀 잘 테니까 나도 깨우지 말라고 해주고. 하암.”
“부단장님은 아직까지 마시고 있나요?”
“간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옛날 이야기를 밤새 하면서 지금까지도 술을 마시고 있어. 난 이제 그 인간 과거에 여기서 뭐하고 지냈는지 하나도 안 궁금해. 다 들은 것 같아. 지겹다 지겨워. 아무튼 난 이제 잘 거야.”
손을 흔들면서 여자들을 위해 따로 준비된 방으로 코엘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네요.”
12시가 넘자 정후와 지후는 쓰린 속을 달랠 겸 코펠과 버너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섀넌도 같이 먹을 거죠?”
“그럼요.”
옆에서 꺼내놓은 파와 마늘을 라면에 넣기 좋게 섀넌이 다듬었다.
“음, 몇 개나 끓여야 되는 거지. 어디 보자.”
5개짜리 팩을 하나를 꺼내놓고 또 하나를 꺼내는 형을 보면서 의아해진 지후가 형에게 물어봤다.
“누가 또 와? 드마코 형이랑 코엘 사부는 잘 거니까 깨우지 말랬잖아. 형. 셋이 먹을 건데 5개면 되지 않나? 부족하면 즉석밥 몇 개 더 넣고 말아 먹으면 되지.”
“아니, 그럼 안되지. 아! 넌 모르나?”
“응? 내가 뭘?”
“섀넌 씨가 좀 잘 먹어.”
“에이, 또 농담하네. 섀넌 씨가 잘 먹긴 해도 그건 고기만 그런 거 아니야? 아, 빅터 사부랑 버크 사부가 오실 거라서 그런 건가?”
“말을 말자. 말을.”
코펠과 버너를 하나씩 더 꺼내서 따로 끓이는 형을 본 지후는 의아해했다. 도대체 저걸 다 끓여서 어떻게 하려나 싶어서.
이윽고 라면 5개씩 넣은 두 개의 코펠이 모두 어느 정도 끓어 먹을 때가 다가왔다.
“술 먹고 난 다음 날은 역시 라면이지.”
“자 먹자.”
“맛있게들 먹어요.”
정후의 절묘한 물 조절 덕분인지 라면은 적당히 꼬들하면서 적당히 퍼져 있어 세 사람의 입맛에 딱 맞아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앞에 그림자가 생겼다.
“응?”
“어, 빅터 교관. 한 젓가락 할래요? 많이 끓였는데.”
빅터는 옆에 앉아서 고요하게 끊임없이 입으로 라면을 밀어 넣는 섀넌과 눈이 살짝 마주치고 난 뒤 빈속에 먹기에는 너무 자극적이라면서 사양했다.
“전 씻고 나서 가볍게 수프나 끓여서 먹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후네 코펠이 모두 비워지기 전에 혼자 5개의 코펠을 먹고 있던 섀넌 쪽의 코펠에서 면발이 먼저 없어지자 지후는 그제서야 형이 말한 것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잘 드시는구나...우리 형수.”
“에이 뭘요. 과찬의 말씀이에요.”
형수라는 단어에 귀가 빨개진 섀넌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데워놓은 즉석밥을 옮겨서 넣으면서 국자로 휘휘 젓더니 국물이 다시 끓어오르자 계란 다섯 개를 까서 풀어서 집어넣었다.
“드실 줄 아시네...”
“야, 먹는 사람 신경 쓰이게. 우리 코펠에 있는 라면이나 어서 건져 가.”
“어어, 근데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엔 조금 많지 않아? 라면 다섯 개나 먹기엔.”
“일단 니 먹을만치 빨리 건져가.”
“왜케 재촉해. 알았어 건져가면 될 거 아니야.”
지후가 자기가 먹을 양을 대접에 적당히 덜어가자 정후도 자신이 먹을만큼 건져 갔지만 그래도 코펠에는 면발이 어느 정도 남았다.
“에이 이럴 거면 하나 덜 끓일 걸 그랬네. 밥도 말아먹고 싶은데.”
“신경 쓰지마.”
“면부터 다 먹어야 될 거 아니야.”
“섀넌이 먹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쪽 코펠을 지켜보면서도 정후 쪽 코펠을 체크하던 섀넌은 정후와 눈빛으로 무슨 교감을 나누더니 이내 남은 라면 면발을 모두 자신의 대접에 덜어서 옮겨 갔다.
지후는 그 이후로도 혼자서 즉석밥 5개와 계란 5개를 넣은 코펠을 모두 비워내는 섀넌의 모습을 보면서 진격하는 거대한 존재를 다룬 애니메이션의 OST가 귀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저걸 다 먹네...먹방 너튜버로 나가도 대성하겠어. 푸드파이터라고 하던가?’
눈 앞에서 폭풍먹방을 지켜본 지후는 형이 섀넌도 마실 믹스 커피를 끓여 주기 위해 물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엘프를 부인으로 삼는 것에 대해 다시금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매 끼니마다 저렇게 먹어 치우면 한달 식비를 내 월급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얼마나 벌어야 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코엘 사부도 엄청 많이 먹던데. 엘프들은 다 저런가?’
동생이 옆에서 등산용 알루미늄 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정후는 잘 먹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지켜 보면서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봤다.
해장식사를 마친 정후는 잠깐 더 누워 있어야겠다는 동생의 뒤에 양치질은 하고 자라면서 소리를 외친 뒤 섀넌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나무로 된 별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풍경 장난 아니다.”
“엘프들이 사는 곳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보기 좋네요.”
어제의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맑게 갠 하늘 아래로 하얗게 내린 눈이 소복하니 쌓인 높은 산의 풍광은 가히 절경이었다.
서로의 손을 깍지 낀 두 사람이 말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나무로 된 목조 주택 사이의 길로 걸어가자 두 사람도 아름다운 풍광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한참을 말없이 눈빛으로만 서로 교감을 나누던 둘이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땐 다른 단원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정후야, 이리 좀 와 봐라.”
“드마코 형, 무슨 일인데?”
손짓을 한 드마코가 옆에 자리를 챙겨줘서 둘이 자리를 잡고 앉자 버크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설명해줘 봐.”
“별건 아니고 겨울맞이를 대비해서 이곳에선 마을 제일의 용사를 뽑는 이벤트를 하거든. 다크엘프를 이끌던 커맨더 그림우드를 기리기 위한 뜻으로 시작했는데 꽤나 오랜 전통이기도 해. 내일부터 그게 시작인데 여기 친구들이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하더군.”
“제안이란 게 설마.”
“맞아, 내가 우리 크로니클 단원들도 다들 한가닥하는 재주가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잘 믿질 않더라고.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거냐고 하니까 그러지 말고 자신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
“그래도 돼요? 우리 전부요?”
“에이, 나나 저 영감탱이가 끼면 너무 애들 노는 곳에 끼는 게 되고 그래서. 너랑 빅터 그리고 드마코, 섀넌 이렇게 4명이 나가는 게 어떻겠나 싶어서. 빅터랑 드마코는 찬성했어. 정후랑 섀넌 의견은 어때?”
“좋아요.”
“거봐, 정후는 안된다고 할 거라고...뭐, 좋아?”
“누가 다치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부분이 있나 한번 붙어보고 싶기도 했는데 잘 됐죠.”
“섀넌도?”
“다크엘프들의 실력이 어떤지 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그래? 정후 군이랑 섀넌 양이 참가의사를 표시했으니 재밌는 이벤트가 되겠군.”
평소라면 굳이 외부의 사람들과 대련을 한다는 것에 대해 딱히 긍정적인 대답을 할 리가 없었지만 정후도 내심 궁금했다. 자신에게서 배운 그림우드가 남긴 흔적들이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 이어졌을지를.
특히나 커맨더 그림우드를 기리기 위한 전통행사라는 말을 듣자 그 궁금증은 더욱 커져 있었다.
지하도시로 떠나기 전에 정비를 하면서 몸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될테니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 참가의사를 밝혔던 것이었다.
“꼬맹이 그림우드가 제대로 가르쳤는지 선생님이 한번 숙제검사를 해봐야 할 시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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