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52화안녕,아빠(2)
* * *
엘레네는 소리치는 정후에게 답을 주기 전에 잠시 엘리스를 쳐다봤다. 엘리스는 말하지 말라는 듯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엘레네는 떠나는 사람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아 엘리스의 동의를 포기하고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래로 가버리고 나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후가 혹시라도 쓸데없는 곳에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당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통해="" 얻은="" 시공주소는=""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장비에="" 담긴="" 엘리스의="" ‘능력’은="" 일회용이라="" 다시="" 돌아올="" 수가="" 없어요.=""/>
“엘레네? 내게 이 ‘타임머신’을 보여줬을 땐 갔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고 그곳에서 마력이 차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면서?”
<아니요, 그건="" 불가능했어요.="" 거기에="" 담긴="" 엘리스의="" ‘능력’으론="" 사람="" 한명만="" 간신히="" 단발성으로="" 보낼="" 수="" 있는="" 게="" 전부였거든요.="" 두="" 번은="" 사용할="" 없어요.=""/>
“하하, 아저씨 ...간단하게 원 웨이 티켓이란 거지.”
엘리스의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를 뒤늦게 이해한 정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떠나고 나면 엘리스도 엘레네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미리 말했어야지, 미리 말했어야지! 크윽”
“그렇게 하면 아저씨가 혹시라도 안 갈까봐. 고민 고민하다가 아저씨를 잃을까봐. 그럴 수 없었어. 엉엉. 이렇게라도 아저씨가 원래 있던 곳으로 떠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자신의 품에 안겨 우는 엘리스를 지켜보면서도 정후는 뭔가 해줄 수 없는 상황에 미칠 것만 같았다.
눈물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비통한 슬픔에 잠긴 아저씨가 혹시라도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엘리스는 화급히 눈물을 닦고 의연함을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눈은 슬픔을 전부 숨기지 못했지만 엘리스는 눈물이 맺힐 것만 같은 걸 꾹 참았다.
“아저씨, 지금까지 그렇다는 거지. 또 몰라. 언제고 내 능력이 더 성장해서 한번 더 이번처럼 장비를 만들 수 있으면 내가 아저씨를 만나러 갈 수도 있는 거잖아. 히히. 안 그래?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정후는 엘리스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한 말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올 때 차고 있던 목걸이가 바로 엘리스의 능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과 연결시키지 못하다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스는 알지 못해도 자신은 이미 ‘경험한’ 과거였다. 엘리스에겐 언젠가 찾아올 미래였고. 뿐만아니라 엘리스는 나이를 먹고 한동안 자신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어린 엘리스가 오해하는 해프닝을 겪었던 일도 뒤늦게 떠올랐다.
“내가 꼭 만나러 갈거야.”
“그래, 엘리스. 널 믿는다. 기다릴게”
“응. 응?”
엘리스는 절절한 부성애(???)로 가득한 모습을 보이며 슬픔에 잠겨 있던 정후가 자신을 향해 갑자기 믿는다면서 미소를 짓고는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가지고 있으라면서 주는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올 때 사용했던 아티팩트야. 과거의 누군가 시간능력을 지니고 있던 이의 힘이 담긴 물건이라고 엘프의 여왕들 사이에서 대대로 내려져 온 물건이래. 이 물건을 볼 때마다 과연 누구의 힘이 담긴 것이었을까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엘리스, 너였구나.”
설명을 듣고 나자 엘리스는 목걸이로부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엘리스,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도저히 아빠를 보러 올 때 참지 못하겠으면 그때 와. 그때 와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내가 떠난 이후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을 전해줄 수 있을까?”
자신을 안고 나지막히 이야기하는 정후의 목소리는 슬픔에 가득 차 있었지만 어른다웠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엘리스를 향한 한마디 한마디는 엘리스를 향한 정후의 마음이 담겨 있어 엘리스의 마음을 아리게 하면서도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보고 싶을 거야, 아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더="" 이상="" 시간이="" 지나가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어요.=""/>
엘레네는 웃으며 재촉했다. 인공지능인 자신은 두 여왕들과 함께 화성에서 인류의 번영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크윽, 그래도 말처럼 떠나는 게 쉽지는 않네.”
“아저, 아니. 아빠. 보고 싶을 거야.”
“그래, 나도. 다음에 언제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꼭 건강해야 돼.”
정후가 엘레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네는 정후의 끄덕임을 신호로 이해했고,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 순간 환한 빛이 연구소 안을 가득 채웠고, 정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흘린 한줄기 눈물방울을 남기고 사라졌다.
엘리스는 뒤늦게 한 번 더 정후를 안고 싶어 뛰어갔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진 목걸이에 정후가 남긴 눈물방울만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휑하니 텅 빈 곳에 방금 전까지 있던 정후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엘리스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아 오열하고 말았다.
“아, 아빠...”
<엘리스,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요.=""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테니까요.=""/>
한 사람이 왔다가 떠난 것이라고 하기엔 한 사람과 한 인공지능에게 남긴 족적은 너무도 크고 깊었다. 아니 두 존재를 떠나 이곳에 와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뒤 흔들고 떠났다.
[40년 후]
정후가 떠나고 벌써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자신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된 엘리스는 유독 요즘 정후가 더욱 그리웠다.
“요즘은 힘드네, 아빠.”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판단한 엘레네의 주도 아래 그동안 동결되어 있던 유전자 풀을 가동하여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있는 인종들 중 DNA의 다양성을 감안하여 다채로운 대표들을 선별하여 인류를 새롭게 키워내기 시작했다.
여왕이기 전에 한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던 엘리스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엘레네의 노력 덕분에 인류는 1세대가 지나가면서 폭발적으로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키웠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그 어른들이 짝을 만나 아이를 낳아서인지 길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는 여왕의 책임을 지고 있는 엘리스가 그만큼 신경쓸 요소도 하나하나 늘어난다는 이야기였다.
“여왕님, 늘어나는 인구수에 맞춰서 도시 주변의 숲을 좀 더 넓게 개발해야 합니다.”
“무분별하게 전부 개발을 해버리고 나면 너희의 자식들과 그 후손들 대에 가선 도대체 어떻게 지금 너희들이 누리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전달하려고 하나? 추세를 감안해도 지금 개발하고 있는 속도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고 지금 인류가 있는 영역만으론 필연적으로 한계를 맞이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종족들이 번성해서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미리 인간들이 살 공간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정 개발을 막으실 것이라면 엘프들의 숲쪽으로라도 개발을 허락해주시죠.”
“그건 안된다! 인류의 번성을 위해 다크엘프, 드워프, 엘프, 인간이 맺은 협약으로 인해 서로의 영역은 불가침으로 결정되었다. 교역을 위해 서로 오갈 수는 있어도 그들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돼. 만약 그들과 분쟁이 생기게 되면 우리보다 더욱 많은 그들의 숫자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도의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우리를 위해선 ‘피의 맹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쪽으로 하도록.”
엘리스의 단호한 대답에 각 부족을 대표하는 8부족장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엘리스에게 고개를 숙인 뒤 회의를 마치고 자신들의 부족으로 떠나갔다.
“하아, 아이들의 욕심이 날로 커지고 있네.”
<그게 인간이니까요.="" 인간을="" 발전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엘레네는 이전과 한점 변한 모습 없이 처음 자신을 키우던 그때 그대로 엘리스의 곁에 남아 있었다.
“마더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몰라. 마더도 없었으면 진작 여왕이고 나발이고 때려쳤을 걸?”
자신이 정한 운명이 아니라 정해준 운명을 40년 넘게 살고 나자 엘리스는 가슴 한구석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 젊었을 적 그 순간들이 요즘 자주 떠올랐다.
“한 번 더 갔다 와야겠어.”
<또?/>
엘레네는 2년 2개월의 ‘충’때마다 빠지지 않고 자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엘리스가 걱정되었다.
“아저씨가 떠나기 이전의 순간들로 가면 아저씨를 만나거나 지켜볼 수 있잖아.”
정후가 있을 법한 먼 미래로 넘어가 정후를 만날 수는 없어도 정후가 있던 과거의 시간대로 자신이 점프를 하게 되면 정후와 자신 그리고 엘레네가 함께 이것 저것 모험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는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 있고 있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고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소중한 추억들을 곱씹을 수도 있어서.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때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 다르게 딱히 고민할 필요 없이 아저씨의 품 안에서 한없이 자유로웠다는 것이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이유였다.
<엘리스, 알고="" 있죠?=""/>
“알아, 시간을 뒤흔들만한 사건들은 함부로 만들면 안된다는 거. 과거에 아무리 후회가 되고 아쉬운 일이 있을지라도. 시간선을 꼬았다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도 알아.”
자신의 결정을 때론 반대하는 족장들과 의견대립을 하고 힘이 들 땐 자신보다도 젊은 모습의 아버지를 보고 오는 날이면 한동안 엘리스는 고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그러다 한번은 자신도 모르게 나서는 바람에 정후의 눈에 띄고 말았고, 정후는 한눈에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엘리스인 것을 알아봐 줬다.
정후가 떠난 뒤에도 열심히 단련을 꾸준히 한 덕분에 성취가 있어 노화를 늦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얀 새치는 비록 여기저기 생겼지만 정후와 헤어질 때와 비교해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진 않았으니까.
"아저씨, 나 왔어요."
"어, 왔냐?"
축 쳐져서 시무룩해 보이던 아저씨가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시적이지만 현재 자신의 나이를 잊고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아저씨의 손을 꼭 잡고서 한참을 조잘거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엘리스는 오늘도 시계처럼 생긴 장치에서 나는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능력을 꾸준히 키우고 있었지만 무려 40년도 이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많은 힘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2년 2개월마다 찾아오는 달과 화성 그리고 태양의 직선으로 생기는 ‘충’ 덕분에 마력증폭을 활용하여 이렇게 아저씨를 보러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휴우, 좀 더 자주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빠를 보고 와서 울적하고 갑갑했던 마음이 풀어진 엘리스는 혼잣말을 하곤 만족하면서 이동실을 빠져 나오려고 하다가 뜻밖의 존재들을 마주했다.
<그러니, 엘리스?=""/>
“레드? 화이트? 여긴 무슨 일이야?”
자신이 만든 드워프와 엘프들을 통치하느라 어지간해선 정해진 날짜 이외엔 만날 일이 없는 두 여왕이 자신을 보러 찾아온 사실에 반갑기도 했지만 의아해졌다.
<엘레네 님에게="" 듣자하니="" 또="" 과거로="" 넘어가서="" 정후를="" 만나고="" 왔다면서?=""/>
“별걸 다 이야기하네. 마더는 참 걱정이 많다니까.”
가볍게 생각하는 엘리스와 다르게 두 여왕은 심각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