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0화 〉150화-번아웃 (150/239)



〈 150화 〉150화-번아웃

정후는 이제 아무리 자신이 애를 써봐도 자기들만의 다툼이 되어버려 계속되는 엘프와 다크엘프 그리고 드워프의 분쟁을 종결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저렇게까지 패를 갈라서 싸울 일인가? 더구나 시작부터 누가 봐도 제임스의 잘못으니 하퍼 측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근거가 미약한데도?”
<시작이 뭐 때문이었는지는 저들에겐 중요하지 않게 된 것 같네요.>

엘레네의 말 그대로였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게  지금의 상황은 감정싸움의 극단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아이들도, 엘프 아이들도 이제는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교육관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게 되었고, 대표들을 모아놓고 중재를 해보려고 해도 결론은 서로를 향한 인신공격만이 점차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질린다. 질려. 아니, 지겨워.”
이제는 먹고 살만 해져서 풍요로운 미래를 기대하면서 번영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도 다툼은 사그라들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정후는 점차 질려가고 있었다.
<정후씨,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솔직히 좀 지치네.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고 금방 해결될 일인줄 알았어. 그런데 이거다 싶은 인간들이 나타나서 애들 싸움을 구실로 자기들이 싸우고 있잖아.”
<왜 저들이 저렇게 계속 싸운다고 생각하시나요?>
“양쪽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면 모두 자기들만이 옳다고 이야기를 하더군. 서로가 정의라고 외치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싶어.”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먹고 살만 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먹고 살만 해졌으면 서로 다툴 필요가 없는  아닌가?”
<정후 씨가 살던 세상은 먹고 살만 해지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나요?>

엘레네의 한마디에 번뜩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건들과 역사들이 있었다.
“이게 전부 단순한 이권다툼일 뿐이란 거지? 먹고 살기 힘들  생존의 위협에 서로 뭉쳐서 이겨내기 위해 싸웠는데 이제는 그런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생존을 위한 단결은 끝이 났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익을 늘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란 거야?”
<맞습니다. 자연계도 그러하고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는 자연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거였구나...”

대기업을 세운 재벌 1세에서 2세 혹은 3세로 내려가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지분전쟁이었고, 개국 이후에 나라가 안정이 되면 토사구팽을 하거나 개국에 참여한 공신 간의 영향력 다툼의 사례 등 인간의 역사상에서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다못해 현대사에서도 먹고 살만해지는 나라에서나 민주주의가 나타나 독재정권을 타도 하려고 하지 먹고 살기 어렵거나 내전이 빈번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싹 트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결국 내가  수 있는 건 없는 거였군.”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인공지능들은 개입하지 않는 건가?”
<인류의 번영에 크게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방침입니다.>
이상했다. 지하도시에서 나온 이후로 세 인공지능들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제도와 간접시설을 만들고 난 뒤 한발 뒤로 물러나 3자적 관점을 보이는 모습들이.

“하아...”
인간인 입장에서 그동안 내가 해온 일들이 무가치한 것 같아 허무했다. 내가 그동안 이곳에서 해온 수많은 노력들은 이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론 다시 돌아가서 크로니클 단원들과 만나고 가족들과 다시 재회를 하고, 섀넌과의 재회를 위함이긴 했지만 이곳에서 자신으로 인해많은 이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엘레네는 약간 멍해보이는 정후에게 종의 보호는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계획을 설명해줬다.
<직접적으로 상대 파벌을 향해 살해 혹은 말살 의지를 담은 적극적인 폭력 행위를 보이면 저희들이 그동안 준비해놓은 것들을 통해 개입할 예정입니다.>
엘레네는 나를 향해 안타깝지만 이것이  인공지능이 예상한 순간들  하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이들은 흩어지는 건가?”
<아마 멀지 않은 시간 내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엘프는 엘프대로, 드워프는 드워프대로, 다크엘프는 다크엘프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따로 살아가게 되겠죠.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또 모여 살기도 할 겁니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반복하면서 말이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엘레네와의 대화 이후  가르침을 계속 배우길 원하는 레베카와 그림우드 그리고 엔폴레오네만 가르치는 생활을 하면서 저택에 칩거에 들어갔다.
엘리스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외에는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는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들었다.
“마더, 아저씨가 요즘 너무 활력이 없어 보여.”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인 것 같습니다.>
“그게 뭐야?”
<몸도 과도하게 움직이고 나면 탈진이 오는 것처럼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인간의 정신도 일정 수준 움직이고 나서 이를 채워주지 못하면 정신에 맞춰 몸이 활동을 멈추려고 하게 되는 거죠. 보통은 무기력증부터 시작해서 외부에 대한 무관심이라든가 의욕이 사라지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지금의 정후 씨가 딱 그러합니다.>
“그럼 아저씨가 지쳤다는 거야?”
<정확히 분석하자면 단순한 정신적 피로 수준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허무함때문인 것 같지만요.>

아이들을 가르칠  이외에는 딱히 추가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고 잠만 자는 정후의 모습은 엘리스에겐 낯선 모습이었다.
“아저씨가 요즘은 아침마다 하는 기본훈련도 안하고 밥도 잘 안 먹어. 예전같았으면 고기만 봐도 기뻐서 너만 먹냐고 할텐데.”
엘리스는 아저씨를 위해 자신이 해줄  있는 바가 없을지를 고민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향해 말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정후로 인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정후의 옆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정후를 도와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아저씨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인지 딱히 드는 생각이 없었다. 각성한 능력으로 과거로 몇 번이나 돌아가 봐도 결국 사람들은 어떻게든 싸웠고 아저씨는 결과적으로 지금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곤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래로 넘어가면 혹시나 상황이 달라졌을까 싶어 넘어가 봤지만 딱히 상황은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운신(運身)을 하지 않은 정후가 쇠약해져가면서 건강만 나빠지는 모습을 봤을뿐.
“마더....어떻게 해?”
아무리 혼자서 고민을 해봐도 해답을 구할  없는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던 엘리스는 무력함만 느끼며 마더를 끌어 안고 엉엉 울었다.
“아저씨 불쌍해서 어떻게 해...가족도 친구도 모두 없이 나랑 마더를 때론 보살펴 주고 도와주고 그랬는데, 정작  큰 난 아저씨를 도와줄 수조차 없어...흑흑.”
어릴 때 악몽을 꾸고 온 엘리스는 지금처럼 엘레네를 끌어안고 울곤 했다. 엘레네는 엘리스의 등을 토닥토닥 해주며 어릴 적의 엘리스와 단둘이 지내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무슨 방법 없을까?”
<엘리스...>
엘레네는 엘리스가 원하는 정답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엘리스를 위한 것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마더는 모든지 알고 있잖아. 그치? 아저씨 이대로 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을 지도 몰라. 어떻게 하면 좋아? 응?”
엘레네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리스의 모습이 너무 슬프고 가여워보였다.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엘레네가 입을 열었다.
<엘리스,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뭐? 진짜?”
그야말로 진주알같은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엘리스는 환한 표정이 되어 엘레네에게 그게 뭔지 알려달라고 했다.
<그를 살리게 되면 그를 잃게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저씨를 살리면 아저씨를 잃게 된다는 게?”
<그는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선 그가 뭘  할 일들이 없어요 하지만 그가 해야할 일이 있는 다른 세상에 간다면 그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입니다.>
“마더...아니지?”
<그를 그가 있던 세상으로 돌려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마더?”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아저씨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어진다는 것에 엘리스가 충격받은 것 같자 엘레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모든 만남에는 끝이 있고, 끝 이후에는 새로운 만남이 이어진답니다.>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할래.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엘리스는 얼굴에 남은 눈물자국을 닦으며 일어서서 문을 열고 떠나갔다.

하지만 엘레네를 찾아간 이후로 발을 끊고 며칠간 한숨도 자지 않고서 알고리즘을 돌리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결과는 한가지로 귀결하고 있었다.
“아저씨를 보내면 사는데, 아저씨가 옆에 있으면 죽는다니.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자신이 인간들의 왕국을 세우고 거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아저씨는 항상 자신의 옆에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하던 상상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지 오래였다.
마스터가 되어 얻은 긴 수명 덕분에 노화로 일찍 죽을 걱정은 없던 정후의 미래가 허무함을 떨치지 못해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고 만다는 것은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엘리스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사랑하기에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마더.”
엘레네는 피폐해졌지만 결심을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엘리스의 모습을 보고 알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엘리스는 제대로 잘 못 먹어서인지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체중은 줄어보였지만 눈만큼은 결언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결심했군요.>
“고민해봤는데 도무지 마더가 말한 방법 말고는 다 실패하고 말더라구.”
<그래요?>
“근데 아저씨를 미래로 보내줘야겠다고 내가 마음을 먹긴 했는데 마더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아저씨를 보내주겠다는 거야?”
<엘리스, 나한테 한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죠?>
엘리스는 자신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는 엘레네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뭐지? 뭐지? 예전에 마더가 실험하던 중요장비 깨먹은 게 나라는   안했던 건가?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 굳이 그런걸 물어볼까? 아니면 성인이 되기 전에 아저씨가 숨겨놓은 직박구리 파일을 몰래 복사해서 따로 봤던 거? 그것도 아니면 아저씨한테 시중에 도는 야설 출력해놓은 거 걸렸을 때 마더가 보는 것 같다고 했던 거? 하아. 뭐지?’
엘리스는 짧은 시간 내에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는 사람처럼 과거 자신이 마더에게 잘못했던 모든 잘못들이 순식간에 필름처럼 촤르륵 흘러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리고, 아저씨를 미래로 보내주려고 하던 자신의 결심이 도대체  이 상황으로 흐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풋, 엘리스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건 아닐 거에요.>
마치 모든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엘레네의 말을 듣고 나자 엘리스는 머릿속이 더 하얗게 변하는 것만같았다.
“잘못했어요.”
뜬금없이 엘리스가 사과를 하자 엘레네는 어릴 적 잘못을 저지르고 자신이 하지 않은  딴청을 피우다가 혼나고나서야 잘못했다고 빌던 엘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리스, 내게 말하지 않은  있잖아요.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거.>
“어?”
엘리스는 엘레네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하.하. 맞.아. 어.떻.게.알.았.지?  걸렸네?”
<엘리스는 속이려고 하면 티가 나거든요. 엘리스가 가진 능력이면 정후 씨를 미래로 보내줄 수 있어요.>
“응? 그게 돼?”
<이전에 정후 씨의 힘을 이용해 지구와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죠? 그땐 시간이라는 종적 개념 대신 공간이라는 횡적 개념을 이용했다면 이번엔 시간이라는 종적 개념을 이용하는 거에요. 엘리스의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서.>
엘리스는 방금 전까지 긴장하던 것도 잊고, 엘레네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모습을 본 엘레네는 한마디를 했다.
<엘리스, 울다가 웃다가  표정이 많이도 바뀌네요. 그러면 엉덩이에 뭐가 난다고 정후 씨가 그러지 않았나요?>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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