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146화-애들 싸움=어른 싸움(2)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상대방 혹은 자신과의 승부에서 박살날 때 보여야 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부에 정정당당하게 승복하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쉬웠다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정치질이라는 단어나 혓바닥이 길다는 표현이 나왔을 리가 없다.
제임스는 수세에 몰리자 다크엘프 여자애 따위에게 지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고 부지불식간에 일을 저질러버렸다. 실전과 같은 전투와 다르게 이번 대련에서 주의사항으로 들었던 몇가지 행동 중 하나인 레베카의 가슴을 향해 목검을 찔러 들어간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제임스가 일어나길 기다려주며 뒤로 빠졌던 상황이었음에도 제임스는 서슴없이 움직였다.
정후가 가르쳐줬던 대로면 쓰러져 있던 상대방을 끝까지 지켜봐야 함에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레베카가 잠시 한눈을 팔고 그림우드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레베카!”
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림우드는 소리를 질렀지만 미처 달려들어서 레베카를 지켜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
이를 본 정후가 순식간에 둘 사이를 파고들어 제임스의 목검을 날려버렸다. 설마하면서도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임스의 몰염치한 행동에 이를 막기 위해 움직이다 힘이 살짝 들어가 버렸다.
“크윽”
제임스는 오른쪽 손목을 왼쪽 손으로 부여잡고 뒤로 주춤거렸다. 정후는 제임스의 그 다음 행동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엔폴레오네는 그림우드와 대련 중이었기에 이 모습을 처음부터 목격할 수 있었다.
“하하하, 제가 이겼습니다. 맞죠?”
“뭐?”
‘도대체 집안 교육을 어떻게 받았으면 그렇게 자랄 수 있는 거냐?’
목검의 방향이 어느 쪽을 향했는지 레베카의 등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엔폴레오네를 제외한 2기들은 제임스의 말만 듣고선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1기생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는 레베카가 2기생에게 졌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우리 리더야!”
“뭔가 비겁한 수를 썼겠지.”
자연스럽게 대련은 멈췄고, 모두의 시선이 둘 사이로 끼어든 정후에게 향했다.
“제임스 몰수패”
“선생님! 어째서 제가 졌다고 하십니까?”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거냐?”
“스승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승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구요. 실전에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방심해선 안된다고 하셨죠.”
‘검사가 아니라 정치꾼이 되기에 더 적합한 녀석이군.’
그림우드가 레베카에게 달려가서 괜찮은지를 묻는 걸 본 1기생들은 제임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는 확신이 생겼고, 선생님을 향해 당당하게 외치는 제임스를 본 2기생들은 자신들의 리더가 이겼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정후에게 살짝 불만이 생겼다.
레베카가 괜찮은 것을 확인한 정후는 제임스가 저지른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검을 잡은 지 얼마 안된 학생이 보이기엔 너무 치졸한 수였음을 밝혔으나 이를 그대로 믿은 1기생과 다르게 2기생들은 편파판정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 넌 승부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인격에서도 레베카에 한참 못 미치는구나. 승부도, 매너도 니가 졌다.”
“억울합니다.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지금 니가 배워야 할 자세는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다. 1주일간의 근신을 하면서 오늘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곱씹어 보도록.”
말을 끝낸 정후가 제임스의 배지를 회수해가고 제임스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1기와 2기의 첫 대련 수업은 그렇게 맥없이 끝났다.
“하, 그렇게 인성을 함양하려고 예절과 함께 철학수업을 한 건데, 의미가 없었나?”
“아저씨...너무 상심해하지 마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마다 정후는 다소 부족했던 아이들도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의 껍데기를 깨고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신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아 교육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교육의 본 목적에서 멀어져 나름 재능 있는 아이들이 과도한 승부욕을 가지거나 쓸데없는 자존심만 지키려고 하면서 스스로 바닥으로 주저앉는 아이들을 볼 때면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림우드같은 아이들을 보면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가도 제임스같은 아이들을 보면 다 때려치고 싶어지는 것은 엘리스도 비슷했다.
“하, 애들을 대할 땐 공정하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되는데...”
“제임스같은 애들을 보면 줘 패고 싶어지죠. 아이의 부모님을 모셔서 제임스에 대해서 한번 상담을 진행해볼까요?”
“모르겠다.”
정후는 ‘우리 아이를 바꿔주세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보통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배후엔 그 아이들을 키운 부모가 있다는 걸 수차례 목격한 기억이 있었기에 엘리스의 제안이 탐탁치 않았지만 엘리스의 말이 정론임은 분명했기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자 엘리스를 통해 제임스의 부모와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야, 오늘 그거 봤냐?”
“정후 선생님, 너무 치사하더라.”
“다거들만 자기 학생이라 이건가?”
“아주 편애를 하시더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2기 학생들은 승부에서 이긴 제임스가 도리어 욕을 먹고 근신처분을 받은 것에 대해 성토를 하고 있었다. 레베카를 생각해 오늘은 추가 훈련을 하지 않겠다는 그림우드의 말에 의도치 않게 2기 학생들 사이에 낀 엔폴레오네는 2기 학생들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제임스가 잘못한 게 맞아.”
“이새끼, 맨날 다거들이랑 놀더니 완전 다거들한테 물들었네. 앞잡이냐?”
“내가 봤어. 레베카 선배가 쓰러진 제임스가 일어나도록 기회를 줬는데 제임스가 비겁하게 레베카 선배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가는걸.”
“하다하다 이젠 편을 들어도 지 동기가 아니라 다거 편을 들어? 그 새끼들을 선배라고 존칭을 쓰면서?”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면서 2기생들이 엔폴레오네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집단구타를 하려고 엔폴레오네를 둥그렇게 포진을 하려고 하는 찰나, 제임스의 부모를 만나 상담계획을 전하려고 하던 엘리스가 다가왔다.
“집에들 안 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하, 조교님. 별거 아니었습니다. 엔폴레오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서요.”
“그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을 지켜보는 엘리스의 기세에 억눌린 2기생들은 인사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갔다.
“엔폴레오네, 괜찮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엘리스를 향해 씁쓸한 얼굴로 괜찮다고 한 뒤 엔폴레오네는 자신의 집으로 뛰어갔다. 엘리스는 뛰어가는 엔폴레오네를 붙잡으려다가 선뜻 아이들의 일에 자신이 끼어들어 엔폴레오네가 2기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붙잡을 수 없었다.
제임스의 부모를 만나 상담계획을 전달하고 온 엘리스는 갑갑해진 마음을 풀 겸 최근 세트를 데리고 연구에 매진 중인 엘레네를 만나러 왔다.
“마더, 나 왔어.”
평소같았으면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었을 엘레네가 보이지 않자 혹시 특수연구실에 갔나 싶어 자리를 옮기자 그곳엔 세트와 대화 중인 엘레네가 있었다.
<그러니까 니 말은 니가 날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거야?>
<<그렇다.>>
<또 말이 짧아지네?>
<<그렇...습니다.>>
엘레네가 특별히 세트를 구속하기 위한 장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만들어낸 ‘영혼 장갑’은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가 영혼을 향해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에 세트는 순순히 엘레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선 영혼이 담긴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가 필요하단 거지?>
<<모든 것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굳이 살아 있어야만 해?>
엘레네는 지금 자신의 인공지능이 담긴 육체같은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인지 물어봤지만 세트는 불가하다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나의 능력으론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에 당신의 인공지능을 집어넣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순수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거지.>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이대로면 당신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꿈인 바로 ‘영생(永生)’을.>>
<아니, 난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어.>
<<모든 존재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염원하곤 한다더니...>>
엘레네는 평생 염원해왔던 것이 있었다. 진짜 사람이 되어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세트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었지만 인간을 향해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자신이 자아를 가진 인간으로부터 동의를 받아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역시 안되는 건가?>
“마더?”
엘리스는 깜짝 놀랐다. 엘레네가 인간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이토록 진심으로 갈구하는지는 미처 몰랐었다.
엘리스가 자신과 세트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음을 안 엘레네는 멈칫했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실대로 털어놨다.
“그랬구나...”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
“아니야, 오히려 마더가 말하지 않았어도 내가 미리 눈치 챘어야 했는데...”
엘리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자 엘레네는 엘리스의 어깨를 감싸면서 화제를 바꿨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을까?>
“피이, 내가 마더한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나?”
<아닌가? 요즘 애들 가르치느라 바쁘다고 그러고 또 혼자 뭘 하는지 방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도 않아서 내가 잘 몰랐네.>
엘레네의 말에 내심 찔린 엘리스는 괜히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내가 그랬나?”
<정후 씨 말로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해지는 거라고 하더라. 혼자 설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아저씨가?”
<그럼, 정후 씨가 겉으론 너한테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아도 얼마나 널 챙기는데. 너도 알았잖아?>
“알았는데...요즘은 항상 믿는다고만 하고 예전처럼 막 쫒아다니면서 뭐해야 한다고 그러진 않으니까.”
<이젠 너도 컸으니까 너의 생각을 존중해서 그런 거지. 자, 이제 오늘 왜 왔는지 털어놔 보렴.>
자신을 향해 자애롭게 미소 짓는 엘레네의 표정을 본 엘리스는 엘레네 본인도 마음속에 짐을 지니고 있는데 자신이 엘레네에게 또 짐을 하나 얹어도 되나 싶어 머뭇거렸다.
<엘리스, 널 도울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의 큰 기쁨이야. 말해 봐. 고민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된다고 정후 씨가 그랬잖아.>
“그으래?”
그제야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엘리스는 엘레네에게 모두 털어놨다.
“....그래 가지고 오늘 걔네 집에 갔다 왔는데, 아저씨 말대로 애가 이상하면 그 부모가 이상한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어. 사람은 잘 안 바뀌는 걸까? 아니면 부모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면서 고대로~ 자라나는 걸까?”
<하지만 가까이에 반례가 있잖니. 험프티와 그림의 자식인데도 순수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림우드라는 반례가.>
“맞네.”
엘레네는 굳이 그림우드가 특이케이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라서 성격이 고착화된 인간은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면서 가치관이 바뀔 정도의 일을 경험하지 않는 한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되었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