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143화-빅터의 조상님들(4) (143/239)



〈 143화 〉143화-빅터의 조상님들(4)

“지금부터 내가 호루라기를 불면 여러분들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그만!“이라고 외칠 것이고 그만이라고 외쳤을 때까지 가장 많이 달린 지원자가 뛴 만큼만 뛴다면 결승점을 지나친 순위가 몇등이든 상관없이 모두 합격시켜줄 것이다. 이해했나?”
“예!”

“마지막까지 1등으로 통과하면 그걸로 끝이라 이거지.”
“통과하면 하면 되는 거래!”
“난 끝까지 이 악물고 뛸 거야.”
“1등으로 달릴 필요는 없는 거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정후의 말을 들은 아이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엘프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내가 약속했던 것처럼 오늘은 엘프 아이들을 대상으로 검술을 배울 지원자들을 받기 위한 시험을 보기로  날이다.
엘리스는 뭐하러  지켜도 되는 그런 약속까지 지키느라 그러느냐고 투덜거렸지만 나의 대답에 더 궁시렁거리진 않았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흔한 약속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 지도자가 자신이 내뱉은 아무리 별거 아닐 수 있는 약속도 사소하게 여기고 무시하면 정작 중요하고 중대한 약속을 이야기했을 때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기대하지 않게 되니까.”
“그건 맞지만... 너무 많이 합격하면 어떻게 해요?”
“글쎄다. 그게 그렇게 쉬울  같지 않은데.”
“고작 5km가 그렇게 어려울 리가 있나요.”
“그때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결과는 어땠지?”
“12명 빼곤 다 떨어졌죠.”
“네 말대로 엘프 아이들에게 5km는 최선을 다한다면 그렇게 뛰기 어려운 거리는 아닐 수도 있어. 그런데 저 아이들은 자신들이 달려야 하는 거리가 5km인지 10km인지 몰라.”
“결과를 모른다는  그렇게 힘든 걸까요?”
“그때 내가 네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목표점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는 상태로 경쟁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서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건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심리적으로 많은 부하를 발생시키지.  그동안 혼자서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걸 잘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수백의 아이들이 전력으로 달려야  때, 저만치 앞서가는 아이가 계속 달리고 나는 점점 체력적으로 지쳐가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참고 달리는 게 쉬울 것 같아? 많은 의심이 내 안에서 떠올르게 되지. ‘도대체 멈춰도 좋다는 신호는 언제 떨어지는 걸까’, ‘나는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까’ 등등 말이지.”
“객관적인 실력과는 별개로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건가요?”
“그래, 그걸 위해서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를 일부러 숨기는 거야.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을 어떻게 버텨 나가는지 보고 싶어서.”

내가 왜 그때 다크엘프 아이들을 뛰게 했는지 엘리스는 그제야 이해를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건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 부모들이 혹시라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을 위해 대비했던 일종의 반격기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호루라기를 불자 마치 마라토너와 같이 많은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꼭 마라톤 같네.”
“마라톤? 오래달리기같은 건가요?”
“42.195km라는 거리를 누가 먼저 완주하나를 가리는 경기이지.”
“42.195km요? 이 악물고 달리면 그 정도는 충분히 달릴  같은데.”
“니가 익힌 오러라거나 마법을 익히지 않고 그저 육체적 단련만 한 선수들이 모여 달리는 거야. 약 2시간 내외의 시간 내에 그 거리를.”
“그 말은 순수한 몸으로만 시속 약 20km 정도로 뛰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래, 그 정도면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사람 기준으론 전력질주에 해당하는 수준이지. 그렇게 2시간을 넘게 달리는 거야. 다른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엘리스는 정후의 말에 아무것도 익히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 수준으로 2시간을 전력질주할 있을까를 상상해 봤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겠네요.”

실제로 그랬다. 이종격투기를 위해 기본적인 체력훈련을 하는 선수들조차 따로 달리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막상 시속 20km로 전력질주를 시키면 5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내려오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 엘프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님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달렸고 점차 그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치고 나오는 애들이 있네요.”
“어딜 가든 1등이 있고 꼴찌가 있기 마련이지. 그나저나  운동회하는 느낌이긴 하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하던 파란 하늘 아래에서 펼쳐지던 가을 운동회의 풍경이 떠올랐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이를 악물고 열심히 달리던 그때, 부모님은 운동장에서  모습을 지켜보면서 날 응원해주고 계셨다. 지금 저 엘프 아이들의 부모님들처럼.
‘부모님 얼굴을 뵌 지도 정말 오래되었구나...’

세트를 가지고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는 엘레네의 말로는 내가 다시 돌아갈 가닥을 잡았다곤 했지만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할 때면 암담해지곤 했다.
“아저씨. 아저씨.”
“응?”
“슬슬 포기자가 늘어나네요.”

초등학교 운동회와 다르게 지금 이곳은 기회를 잡느냐  잡느냐 절박한 치열한 시험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만화나 소설로 접했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누군가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달리는 엘프 아이들은 참으로 열심히 달렸지만 점차 벌어지는 페이스에 뒤에서 따라가는 아이들은 한바퀴, 두바퀴 따라잡힐 때마다  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를 이겨내지 못하고 코스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한명이 포기한 순간부터 포기자가 급격히 늘었다는 거에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면서 안도하는 거야. 일종의 기준점이 생긴 거지. 그래도 저 아이보단 더 달렸으니까 괜찮아하는 마음도 생기고.”

이 달리기로 저 아이들의 인생이 실패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살면서 찾아올 여러번의 기회 중의  번째였을뿐.
“그런데 포기자가 너무 많이 나오오는군.”
절박함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중도포기자가 나오면서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탈락했고, 어느새 5km를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엔 저번처럼 20명 정도의 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다.
“저기 꼴찌로 달리는 아이는 계속 꼴찌인데도 포기하질 않네.”
“917번이요?”
“어, 키는 작은데 악바리 근성이 있는  마음에 들어.”

소년은 익히고 싶었던 마법을 익힐 수가 없는 체질이었고, 자신이 선망하던 영웅이 되지 못한다는 현실에 크게 절망했었다. 그러나, 인류를 다시 번영의 길로 이끈 커맨더 정후가 제자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에 기뻐했다. 그리고 마법사가 아니라도 영웅이 될 수 있는 길이 남아있다는 현실에 하늘에 감사하며 이번 대회에 참여했다.
“917번 이름이 뭐지?”
“잠깐만요.”
엘리스가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917번의 이름을 찾아냈다.
“엔폴레오네라네요.”
“흥미로운 이름이군.”
“엔폴레오네가요?”
“작았지만 누구보다 거대한 족적을 남겼던 이의 이름하고 비슷해서 말이야.”

이윽고 첫 번째 주자가 5km를 완주했을 때 난 “그만”을 외쳤다.  뒤에는 7명의 아이들이 남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엔폴레오네는 몇바퀴를 더 돌아야 하지?”
“3바퀴만 더 돌면 돼요.”
“750m인가...”

7명의 아이가 모두 합격의 배지를 받고 감격하고 있을  엔폴레오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운동장에 가득 있는 엘프들이 지켜보았고 아이는 통과점을 지나치는 순간 마치 퓨즈가 나간 전구마냥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쓰러짐과 동시에 통과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가 아이를 낚아챘고, 생체징후를 통해 단순히 탈진에 의한 일시적 혼절임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이걸로 8명이 합격한 건가?”
“그건 그런데 말이죠...”

다크엘프들보다 저조합 합격률이 문제였을까. 떨어진 엘프들의 학부모들 중엔 그때  찾아왔던 지미라는 아이의 엄마도 있었다.
“커맨더님, 너무 하시네요!”
“뭐가 너무하죠?”
“‘그쪽’ 아이들은 12명이나 붙여주시면서 ‘우리쪽’ 아이들은 8명밖에 합격을 시켜주지 않으시다뇨. 불공평하지 않아요?”

지미 엄마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인지 다른 엘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저 아이들을 특별히 봐준 것은 아닌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시험을 치를 것인지 알려주지 않은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고 다크엘프 아이들과는 시험의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그들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있자 그것이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한 것인지 점점 날 둘러싸더니 반응이 격해졌다.
“아...아저씨...”
“걱정하지마, 엘리스.”

엘리스는 속으로 너무 분했다. 굳이 주지 않아도 될 기회를 부여한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저씨가 보인 호의를 권리인 것처럼 요구하며 아저씨를 향해 소리치는 그들의 모습이 지난 날 반란을 일으켰던 다크엘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
더 들어주다간 진짜 자기들의 주장이 맞다고 착각할 것 같아 기운을 담아 외치자 기운에 눌린 대중은 잠잠해졌다.
“여러분들은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자식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혔던 아이들의 부모들은 습관적으로 잊고 있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긴 시간 지하도시를 이끌어  지도자 정후라는 권력자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아이를 향해 부모님이 가지는 애정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선 이해를 하는데 그 방향이 다른  아니라 틀린 것이 확실한 애정까지 내가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군.”

하지만 이대로 밀릴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지미 엄마’가 앞장섰다. 자신의 아들은 안타깝게도 다크엘프들처럼 12명이 뽑혔다면 뽑혔을 최후의 12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커맨더님, 부디 노여워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그대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있나?”
“다크엘프의 아이들은 12명이나 뽑아놓고 저희 아이들은 8명밖에 뽑지 않는 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저희 아이들도  4명, 4명만 더 공평하게 뽑아주실 순 없나요?”
“그대는 호의와 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군. 공정한 심사의 결과에 따라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를 훼손하면서 똑같이 숫자를 채우기 위해 4명을 더 뽑아달라니.”
“과연 다크엘프 아이들하고 저희 아이들하고 똑같은 시험을  것은 맞습니까?”
군중 속에 있는 한 남자가 외쳤다.
“그렇다. 둘 다 똑같이 5km를 완주하는 것이 테스트였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쪽에서 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어째서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5km를 달리면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엘리스는 도대체  이런 청문회같은 분위기가 열리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 분노했다.
“엘리스, 잠시만.”
“처음부터 얼마나 달리는지 알려주게 되면 내가 뽑고 싶은 제자의 자질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자질이 도대체 뭔가요...”
“빛 한점 들지 않고 도대체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을 혼자 걷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인재를 찾고 싶었다. 그게 이 시험의 목적이며 저기 합격한 8명의 아이들이 보여준 자질이다.”
“하지만 제 아이는 안타깝게도 떨어졌습니다! 충분히 더 뛸 체력이 남아 있는데도 시험이 뭘 요구하는지 몰라서요.”
“아니, 지금 내 품에 안긴 아이의 앞에서도 그 말을 할 수 있나? 내가 내 제자가 될 아이들에게 바란  체력을 얼마만큼 남겨놓고 포기하지 않는지가 아니라 설령 체력이 모두 다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의와 절박함이었다. 당신의 자식에겐 내가 바라는 자질이 없었을 뿐이었다. 모두에게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졌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대의 자식들의 몫이다. 너희 자식들에게만 시험이 어떤 것인지 구구절절하게 알려주는 순간 다크엘프 아이들보다 그대들의 자식이 못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하는 말의 의미부터 깨닫고 입을 열도록. ”

내 말이 끝나고 엘프들의 시선이 내가 품에 안은 아이에게로 쏠렸다. 얼추 원하는 대답을 모두 들려준  같아 기세로 사람들 사이를 열어젖히고 엘리스와 함께 빠져나왔다.
“합격자들은 모두 날 따라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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