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142화-빅터의 조상님들(3)
“쟤가 그랬어요.”
아이가 가리킨 손가락의 방향에는 그림우드와 레베카가 있었다.
“그림우드가 그랬어? 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내가 본 그림우드는 배울 때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아서 열심히 하는 아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림우드는 누굴 먼저 때리거나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상냥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누굴 때렸다는 것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내가 없는 곳에서 보이는 그림우드의 모습이 실제로 다를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기에 확인차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맞았다는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림우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아니요, 옆에 있는 여자애가 그랬어요.”
“뭐, 레베카가?”
남자아이의말이 끝나자마자 레베카가 자그맣게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땐 일르지 않기로 해놓구선 남자 새끼가 치사하게 맞고서 엄마한테 일러? 그때 더 패줬어야 하는데 혼이 덜 났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 바로 옆에 있던 그림우드와 나를 제외하곤 다행히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살짝 움찔하는 그림우드를 무시하고 레베카를 불러 얼굴을 맞았다는 아이의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레베카, 진짜로 니가 얘를 때렸어?”
“우리 애가 맞다잖아요. 뭘 또 물어보세요!”
“조금만 기다려보시죠. 전후사정을 확실히 알아야 혼을 내도 제대로 혼을 낼 거 아닙니까? 그냥 이유 없이 때렸다면 혼나야 마땅하겠지만 싸워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면 싸워야겠죠.”
내가 혼을 낼 수도 있다는 말에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숙였다.
“레베카, 선생님이 왜 때렸는지를 물어봐도 될까?”
“함부로 주먹을 휘두른 게 잘못 아닌가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슬쩍 기세를 실어 아이의 엄마에게 날리자 그제서야 아이 엄마가 움찔하며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듣고 니가 주먹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내가 지켜주마. 레베카.”
“진짜요?”
나의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인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남자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쟤가 먼저 저희가 지나가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저희들 보고 ”저기 검은 쓰레기들이 지나간다“면서 먼저 욕을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무술을 배웠다고 해서 함부로 휘둘러선 안된다’고 하셨다고 그림우드가 그냥 지나가자고 했죠. 그래서굳이 엮이지 않고 지나가려고 하니까 쟤랑 저 뒤에 있는 애들 여럿이 우리 앞을 막아선 뒤 그림우드의 어깨를 세게 밀쳤어요. 그리고...”
“그리고?”
레베카가 그림우드를 살짝 보고서 말을 더 해야하는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어떻게 해서 주먹을 휘둘렀는지는 정확히 듣지 못해 더 이야기를 하기를 바라자 한발 뒤에 있던 그림우드가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아빠도 없는 놈이 뭐가 그리 당당하냐면서 고개 빳빳이 들지말고 범죄자의 자식이면 범죄자의 자식답게 고개 팍 숙이고 기어 다니라고 했어요.”
“우드...”
그림우드의 말이 끝나자 아이의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 뒤의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와 눈을 피하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림우드와 레베카는 잠시 기다려다오.”
정확히 구체적인 증거가 당장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우드의 말에 그림우드와 레베카를 괴롭혔다는 아이들이 들켰다는 느낌의 반응만으로도 누가 정직하게 답을 했는지는 이미 명확하게 구분이 됐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저 아이들의 말을 더 믿어주시는 건가요? 저 다크엘프 따위의 말을?”
“선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저 아이들이나 그쪽 아이들이나 모두 제겐 동등한 엘프니까요.”
“커맨더 님이 이렇게 편파적이고 편향된 분인줄 몰랐군요. 안 그래요, 어머님들?”
“맞아요!”
“어떻게 해서 저런 말을 믿을 수 있죠?”
“제 아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글쎄요. 제 학생도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진 않습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을 떠들고 있어요. 제 아이들에게 물어보시죠!”
“그래요? 이 아이들이 말한 게 거짓말이니? 만약 사실이라면 내가 사과하고 싶은데 말해보렴.”
일부러 기운을 빼고 물어봤음에도 레베카로부터 맞은 아이를 비롯해서 그 주변의 아이들 중에서 선뜻 나서는 아이들이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없군요?”
“너, 엄마한테 말했던 대로 이야기하면 돼. 어서.”
“쟤들이 거짓말한거지?”
뒤에 있던 엘프 엄마를 비롯해서 여럿이 자신의 자식을 재촉해 봤지만 입을 열고 말하는 아이가 없었다.
“이상하군요.”
“그...그거야. 이렇게 바로 앞에서 물어보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저희 아이들이 좀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진짜 그럴까요?”
“저 아이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요?”
이게 이런 식을 쓰일줄은 몰랐다.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증표로 배지를 수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에겐 이 증표를 수여한다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믿겠다는 증표이며 나의 학생으로 받아들인 증거이니 항상 가슴에 그 의미를 잊지 말고 당당하게 움직이라는 의미로 이름표마냥 달고 다니라고 했었다.
“그림우드, 레베카? 가슴에 있는 배지를 내게 건네주겠니?”
“선생님...저희는 이제 파문당하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이리 줘 보렴.”
아이들은 자신이 더 이상 나의 학생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을숨기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배지를 풀러 내게 주기 전 멈칫했다.
“너희들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거야.”
두 아이의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 준 뒤 나를 둘러싸고 모여든 아이들의 어머니들 앞으로 등을 돌렸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배지같네요.”
“저런 아이들에게 그런 증표까지 주시다니, 저희 엘프 아이들에겐 검사가 될 수 있게 따로 시험을 보신 적도 없으면서 명백한 차별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나중에 따로 한번 모두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죠. ”
나의 대답을 들은 아줌마들의 표정이싹 바뀌면서 변하는 것을 보자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들이 많으시군.’
“여기 제 학생들에게 준 배지에는 몇가지 기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상시 위치추적 기능이라든가, 위기감지 기능이라든가하는 것들이죠.”
“그래서요?”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들이 생각한 그림과 달라졌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던 엘프 엄마들은 그게 뭔 대수냐며 물어봤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의 아이도 학생이 되면 그 배지를 증표로 받을 수 있는 것이냐고 질문하는 아줌마들도 있었다.
“녹음기능도 있습니다. 다만 이 녹음기능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여지가 있어 본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되는 것이죠.”
“와아, 아티팩트군요.”
“조용히 있어봐요. 지미 엄마.”
누군가는 나의 말을 듣고서도 눈치채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했지만 누군가는 이미 눈치를 챘는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엘프 엄마를 말리기도 했다.
“그림우드, 레베카? 너희들이 동의만 해준다면 이 녹음기능은 재생할 수 있단다.”
“동의할게요!”
그림우드가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옆의 레베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레베카도 빙긋 웃으며 그림우드의 손을 꼭 다잡으며 동의하겠다고 대답했다.
“두 아이가 동의 의사 표시를 했군요.”
엘레네에게 지금의 상황을 메시지로 전달한 뒤 음성녹음 기능을 재생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의 동의 의사표시가 확인되었습니다.>
엘레네의 대답이 들리고 배지에서 당시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베카의 표현은 당시의 상황을 많이 축약하고 심한 말은 많이 거른 것이라는 것이 음성을 통해 확인되자 아이의 엄마들은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니깟것들이 우리 말을 무시해? 뭐해? 얘들아 밟아! 잡것들아. 우리 발 밑에서 기라고!..]
음성은 레베카가 나중에 서로 이르지 않기로 서로 감정섞인 대화를 나눈 뒤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고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날조입니다!”
“맞아요! 맞아!”
‘억지도 정도껏들 하지 좀.’
“지금 저 목소리들만으로 믿으라는 건가요?”
“그럼 지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두 여왕을 만나서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청해드릴까요?”
“네?”
아이들의 싸움에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는지 아이의 엄마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과 마탑의 엘프들이 참여해서 만들고 두 여왕이 믿을 수 있다고 한 제품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시니 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제작과정을 비롯하여 사후관리 과정 어딘가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는 의미이고, 이는 왕국에 비리가 있었다는 의미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감히 내버려둬선 안될 중차대한 일이죠.”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아, 아니요. 저희들은 그런 의미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두여왕은 어지간해선 엘프나 드워프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한번 법을 집행하는 것에 있어선 가차 없다는 것이 다크엘프들을 대상으로 한 형벌에서 입증되어 두 여왕이 집행하는 법의 칼날의 방향에 서 있지 말라는 말이 왕국민들 사이에서 돌 정도였다.
“아, 한가지가 더 있군요.”
“네? 한가지가 더요?”
엘프의 엄마들은 그제서야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엔 존댓말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기에 만만하게 느껴져서 이번 일을 계기로 마탑에서 능력을 배울 자질이 없다고 판정된 자신의 자식들을 위대한 검의 후예로 키울 기회로 보고 살짝 판을 벌였는데 일이 어그러져도 심하게 어그러진 것이었다.
“그..그게 뭐죠?”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식들이 다크엘프를 대상으로 인종차별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죠. 저 아이들이 스스로 인종차별 의식을 깨우쳐서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런 험악한 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어디선가 누군가 그런 비슷한 말을 입으로 꺼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걸 보고 듣고 배웠겠지요. 아이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그런 말을 배울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누굴까요?”
“네?”
“그게 무슨?”
두 여왕이 다크엘프의 자식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적 의식을 보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상황에서 그걸 선뜻 어길 사람은 없었겠지만 나랏님이 듣지 않는 곳에선 나랏님도 욕하는데 다크엘프들을 대상으로 인종차별 의식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진다고 그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뒤에서 몰래 그런 이야기를 자식들 앞에서 하는 것과 그걸 들킨 것은 다른 문제였다.
“죄...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어떤 처벌이 내려질까 싶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들바들 떨면서 아이의 엄마들이 납작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내 학생들과 맞은 아이와 그 친구들도 함께 보고 있었다.
“일어나시죠. 진정 엄격한 법의 심판을 원하신다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상상을 해본 겁니다.”
“그...그런가요?”
내가 몇 번이나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지 못했던 아이의 엄마들은 그제서야 일어나서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의 의사표시를 계속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과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나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다크엘프의 아이들과 함께 그림우드와 레베카가 서 있었다.
“당신의 자식들의 과한 언행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저 아이들입니다.”
아이의 엄마들은 쭈뼛쭈볏하면서레베카와 그림우드 근처로 멈칫멈칫하며 잘 가지 못했다.
“내키지 않으시면 안하셔도 좋습니다. 두 여왕에게 제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올려드릴테니 혹시라도 오해나 잘못된 점이 있는지 여러분들이 보는 곳에서 확실하게 다잡아드릴 수 있으니까요.”
“아...아닙니다. 얘들아. 미안하다.”
“우리들이 뭔가 오해를 했구나.”
그렇게 한바탕 사과소동이 끝이 나고 엘프 엄마들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여기저기 상처가 있던 엘프 아이들은 자신의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돌아가야 했다. 모두 떠난 뒤 레베카와 그림우드를 다시 불렀다.
“자, 너희들의 배지 여기 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배지를 받으며 감정이 북받혔는지 평소와 다르게 울먹거렸다. 의외인 것은 그림우드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꾹 참으면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표시하면서도 레베카의 손을 꼭 잡아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감정을 추스른 레베카가 물어봤다.
“왜 저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으신거죠? 선생님껜 처벌할 수 있는 힘이 있으시잖아요.”
“이미 저 사람들은 자식의 앞에서 수모를 겪어야 했단다. 그것만으로도 큰 벌이라고 할 수 있지. 만약저 어른들이 너희들 부모님이라고 생각했어봐. 너희라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부모님의 저런 모습을 보는 기분이 어떻겠니?”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저 사람의 자식들은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되는지를 몸소 지켜봤단다. 오늘 일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앞으로는 자신의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될 거야.”
“솔직히 말해선 선생님이 여왕님들께 이야기해줘서 벌을 내려주셨으면 했는데 선생님 말을 들으니까 그걸로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니?”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등을 다독거려 주며 말했다.
“혹시라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다. 내 학생들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것도 별로지만 어린 나이인 너희들이 부당한 일에 참는 법부터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한 누구도 너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해줄게.”
“고마워요, 선생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며 우리의 그림자를 나란히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