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8화 〉138화-그림의 아들. (138/239)



〈 138화 〉138화-그림의 아들.

“얘가 ‘그’의 자식인가?”
“그래, 너희들이 죽인 덕분에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고 자랄 아이가 되었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본인이 저지른 죄업 때문에 죽은 걸 왜 우리가 선량한 사람을 죽인 것처럼 그래? 앞으로 키울 아이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해서 키울 건가?”
나의 말이 자신에게서 아이를 빼앗아갈 것이라고 여겼는지 품에 안고 있는 아기를 한껏 끌어 안으며 그림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데려가겠다는 건가!  이럴  알았어. 이럴까봐 너희들에게 내 아이의 존재를 숨겼던 거다!”
<그림, 우리는 여기 오기 전까지 너의 아이를 데려갈지 말지에 대해서 한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아직까지는>
붉은 여왕의 단호한 한마디에 여왕들의 성격을  알고 있는 그림은 그 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녀 생활할  여왕을 대하는 자세를 버리진 못했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함은 그것과 다른 것이었나보다.
“그래도 제 아이를 제 품에서 빼앗아가실 순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니 앞에 있는 남자가 선택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그림은 눈에 핏발이 선채로  노려보았다.
“아, 레드. 그렇게 이야기하면 오해하게 되잖아.”
상황이 생각했던 그림과 다르게 살짝 꼬이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에 두 손을 대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그림. 확실히 말할게. 니가 만약 아이에게 복수심을 주입해서 키울 거라면 우린 너에게 아이를 맡겨둘 순 없어. 그리고 니 아이만큼은 행복하고 밝게 키우고 싶지 않아? 평생 이렇게 땅굴 아래에서 숨어서 키울 셈이야? 보이는 것만이라곤 흙과 광석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일부러 모성을 자극하기 위해 꺼낸 말에 그림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했다.
“너의 아이니까 너에겐 너의 아이를 키울 자유가 있어. 그러나 어머니로서 네 아이가 이런 환경에서 크길 원하는 것은 너의 선택에 달려 있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까지는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내민 떡밥에 낚여들길 바랐을뿐.
“니가 원하는  뭐지?”
“너 말고도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다크엘프들이 있다고들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그래, 사실이다.”
“너희들의 죗값은 너희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지. 너희들의 자식에게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야. 아이를 가진 이들은 따로 쾌적한 환경에서 키울  있도록 해주겠다. 물론 자식을 만나길 원하면 아버지와  가족들이 일과를 끝내고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를 만나러 오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을 거야. 또, 같이 살게 해주지.”

나의 말을 들은 그림은 곰곰이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그냥 모른 채로 살다가 추방시켜 버려도 될텐데.”
“아이는 죄가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원한과 복수심에 가득찬 상태로 자라서 인생을 망치길 바라지 않아. 그리고 이 별에는 사람이 너무나 부족하지. 한명 한명이 귀중한 생명이다.”

나의 진심어린 설득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은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다른 다크엘프들에게도 내 의견을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아, 참 그 아이의 이름은 뭐지?”
“‘그 사람’의 이름은 남겨선 안된다고 했으니, 내 이름에서 따서 ‘그림우드’라고 지어줬어.”
“그림우드?”
나의 반문을 다르게 이해한 그림은 아이에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왜 붙여넣었는지 설명해줬다.
“내 아이가 뿌리가 없이 자라길 바라지 않으니까. 설령 내가 죽어도  아이는 나의 일부를 안고 자랄테지.”
“넌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어머니는 될 것 같구나.”
“훗, 그런가?”

그림우드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내게선 빅터가 떠올랐다.
‘저 아이가 앞으로 자라서 자손을 낳아 번창하면 그림우드의 일족이 되는 건가?’
빅터의 먼 조상님을 만나게 되자 느낌이 묘했다.
“흠, 이렇게 되면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지? 한참 어린 쟤가 빅터의 먼 조상이면...빅터 보고 나에게 뭐라고 부르라고 해야 되는 거지?”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하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엘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나와 그림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엘리스는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건 알겠는데. 굳이,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의 자식까지 챙겨줄 필요가 있어?”
“엘리스,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왜?”
“지도자란 건 크게 생각해야 돼. 모자란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너의 테두리 안에 속하게 될 거야. 니가 원하는 사람만으로 테두리 안을 채울 순 없어. 지도자는 균형감을 잃지 말아야 돼.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선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하면서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온화하게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해. 지도자와 개인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어. 지도자는  마음에 드는 사람만 데리고 살 순 없는 거야.”
“설령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려고 해도?”
“그게 모두가 알고 있는 니가 정한 원칙과 법칙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너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쫓아내선 안돼. 그렇게 해서도 안되고. 선을 넘지 않는다면 용인을 해줘. 생각이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야.”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라...”
나의 말을 들은 엘리스는 많은 생각을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지하도시 안에서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인류의 숫자를 생각해도 엘리스는 크고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육체적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때의 대화가 있고나서 아이를 가진 다크엘프들 대부분이 지하도시의 한쪽에 따로 공간을 마련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검댕이를 묻힌 다크엘프들이 퇴근 후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묘한 느낌이었다.
“인생 막장에도 꽃은 피는 건가?”

따로  것 없어 먹고 살기 위해 탄광촌으로 향했던 광산 노동자이 일하던 갱도 끝에 채굴하는 곳을 ‘막장’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누군가 막장 인생이라고 했고.
죄를 지어서이긴 하지만 광산의 고된 노동으로 땀방울을 흘리고 얼굴이 거뭇거뭇해져 올라온 다크엘프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도 마음에 상처가 있었고, 그걸 ‘세트’라는 개자식이 이용해 먹었을 뿐이었긴 한데 말야.”
“아저씨, 그래도  사람들이 말했잖아. 결국 본인이 거기에 동의했다고.”
내가 느끼는 감상과 다르게 엘리스는 죗값을 치르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라고 했다. 나보곤 굳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면서.
“그러고 보니 엘레네가 가져간 세트는 어떻게 됐지?”
“엘레네 말로는 걔 덕분에 마법의 고도화가 더 빨리 가능해질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내가 알고 있던 플라스크 안의 ‘호문클루스’와 같은 신세로 전락한 세트를 떠올리니 우스워졌다.
“엘레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뭐. 하루 종일도 채굴당하겠군.”
“요즘 그래서인지 신이 난 것 같아. 엘레네의 마법도 어찌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지 이젠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고대의 발달된 마법문명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군가는 갈려 나가야 발전하는 법이지. 더욱 빨리 갈려 나가서 내가 다시 돌아갈 기술의 원천이 되어라.”

먼 과거에 존재했거나 혹은  미래에 존재할 공돌이의 인생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세밀레. 세밀레.”
“그게 뭐야, 아저씨?”
“세트가 영원히 엘레네에게 갈려 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란다.”
“좋은데? 세밀레, 세밀레.”

<<히익, 이상하다. 불길해. 불길해.>>
<뭐가 불길하죠?>
<<누군가 나를 향해 저주의 염원을 날린 것만 같아. 등골이 순간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신기하군요. 당신에겐 육체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소름 돋는다는 감각을 느낀다니 이상하군요. 실험을 해봐야 할까요?>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게 따지면 너도 그 육체가 너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전 이 육체로 직접 만지고 느낄 수가 있는 걸요.>
<<히이익, 하지마. 하지마라!>>
<왜 그러시죠?>
<<또 그 버튼 누르려고 하는  아닌가?>>

세트는 한때는 신이었던 존재가 어째서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존재에 의해 통제되는 삶으로 전락했는지 깊은 회한에 잠기려고 했지만, 그도 쉽지는 않았다.
<신기하네요.인간의 육체는 ‘역치’라는 것이 존재해서 일정한 자극을 반복적으로 주면 고통이든 쾌락이든 더 많은 자극을 주입해야 하는데, 당신은 마력으로 자극을 줄 때마다 매번 동일한 자극을 받는  같네요.>
<<으으으윽, 잘못했다. 아니, 잘못했습니다.>>
점차 바뀌는 세트의 말투를 지켜보고 있는 엘레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투명한 구체 안에 갇힌 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고분고분해지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답은 한번만>
<<알겠습니다.>>
<묻겠어요. 시공간을 넘어갈  필요한 에너지의 양과 방식에 대해서...>

엘리스는 아저씨와 헤어진 뒤 엘레네를 만나러 왔다가 자신이 알아선 안되는 무언가를 지켜본 느낌에 살짝 열었던 문을 다시 살며시 닫았다.
“아저씨가굳이 모든  다  필요는 없댔지. 흐음... 저건 몰라도 되는 것 같다.”
문을 닫은 엘리스는 엘레네의 방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떠나갔다.

지하도시에서의 삶은 갇혀 있다는 점만 빼면 그렇게 불만이 생기지는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오전에는 전날 올라와서 정리된 안건을 가지고 왕국회의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안건이나 건의사항의 해결법을 논의하고, 오후가 되면 수련을 반복했다.
“고지대라 좋은 건가 아니면 내 수준이 올라서 그런 건가? 마력의 흐름이 이전보다 명확하고 깊게 느껴지는데.”
월광검을 수련하는 동안느껴지는 외부의 마력은 하루하루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나의 마력이 점차 깊어지고 순수해지는 동안 세상도 정화되고 있었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비로 내리고 별 여기저기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대기의 순환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공기도 슬슬 사람이 살 수 있을만큼 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대홍수의 범람도 이제는 가라앉아서 바다와 사람이 사는 대륙이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보군.”
<맞아요. 이제 나가고 나면 다들 바빠질 겁니다. 멈춰 있던 우리들의 숙원(宿願)인 ‘가이아 프로젝트’가 다시 시동을   있게 될테니까요.>
“그래서인지 요즘에 생명복원작업이 한창이라면서? 묘목들도 만들어내고 각종 동물 종자들도 재생 중이라도 들었어.”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이 열심히죠. 마력을 동원한 덕분에 유전자 풀에 등록된 동식물들을 복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더군요.>
“아, 다 복원하는  좋은데. ‘그거’는 빼줘.”
<그거라면 뭘...아! 그거요?>
“그래, 그거. 빌어먹을 모기 말이야. 듣자 하니 모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들었거든.”
<유전자 풀에 등록된 동,식물은 되도록 모두 복원할 생각이었는데. 인류의 생존에 크게 방해될 법한 것들은 빼야겠군요. 특히, 모기는 꼭 빼드릴게요.>

‘고마워해라, 미래의 자신이여. 모기는 내가 미리 없애놨으니 해변에서 마음껏 여행을 즐기라고.’

시간이 흘러 그날이 찾아왔다. 지하도시에서의 삶을 끝내고 밖으로 나갈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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