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135화-등짝을 보자!
다수 대 다수의 싸움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수적 우위, 지형의 우위, 전략의 우위, 보급의 우위, 정보량의 차이 등등.
이 중 여러가지를 갖추고서도 전쟁의 향방은 아주 극히 드물게 뒤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승기가 기운 상태에선 승기를 잡은 쪽이 흥분해서 실수를 연달아하지 않는다면 승기를 잡은 전쟁의 향배가 갑자기 패배로 뒤바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은 후방으로 빠지고, 방패수들은 앞에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을 지켜라. 나와 엘리스는 별동대로 혹시라도 전열이 망가지면서 생기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가서 지원을 하겠다.”
“학장님, 어차피 저희가 숫자도 많은 데다 적들을 둘러싸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희 쪽의 군사들이 장비하고 있는 방어구나 무기가 더 우위에 있는데도 말이죠.”
“아니, 우린 저런 존재와 싸워본 적이 없다. 보이는 것과 달라. 어떤 수를 쓸지 모르기도 하고 당장 험프티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세트라는 존재는 자신의 마력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무기와 방어구를 형성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저 ‘다크엘프’들과 직접적으로 붙어본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있을 가능성을 최소화하여 사상자가 발생할 확률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저씨, 상황을 봐서 승기가 확 기운다는 것이 확인되면 어떻게 할 거야? 그때도 천천히 고사(枯死)시키는 쪽으로 가?”
“만약 내가 상정하는 것보다 적의 저항이 거세지 않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젊은 혈기에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단 만반의 준비를 다지고 싸우는 것이 옳다. 내가 크로니클의 단원들과 함께 하면서 듣고 보고 배운 것들이 그런 것이었고, 현대전에 대해 인공지능 엘리스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을 때도 그게 정석이었다.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기본적인 전략을 세운 뒤 우리는 마력이 담긴 탄환을 통해 상대방을 기절하는 원거리 공격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트는 지금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의 힘을 가졌던 자신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밀려난다는 현실이.
그것도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말에 한마디를 밀리지 않고 입을 나불대는 저 인간만큼은 쳐 죽이고 싶었다.
문제는 원형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군대가 이길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진 않는다는 거였다.
<<어떻게 이렇게 세상에 다시 나와 육체를 차지했는데!>>
세트의 능력인지 다크엘프들의 발 밑에서 오라(aura)가 피어올랐다. 밀리던세트 측의 군사들이 이를 계기로 기세를 올려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이 여러번 연출되기도 했지만 별동대로 활동하는 나와 엘리스가 소방수로서 기세를 키우는 장소에 여지없이 도착해 진화를 했기에 쉽사리 우리도 밀리지 않았다.
“아저씨, 헉헉, 언제까지 이래야 돼?”
“조금만 더 버텨, 다 온 것 같다.”
버크 아저씨가 말한 것이 이런 것인 것 같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낌으로 이제 끝에 거의 다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트는 슬슬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밀릴 것만 같아 그동안 따로 감춰둔 힘을 일으켜 승기를 잡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측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단기결전이 아니라 버티는 쪽으로 전략을 세워놓고 밀리는 곳은 시시때때로 보강을 하면서 기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탓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해가 지고 나선 달의 마력을 활용해 버틸 수 있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시간이 흘러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세트는 도주를 하기로 결심했다.
<<전략적으로 후퇴를 한 뒤에 힘을 비축해서 다시 돌아와야겠군.>>
밤샘전투로 지치긴 했지만 조금씩 상대하기가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던 나는 눈치를 챘다.
“야, 저 새끼 튀려고 하는 것 같다.”
“진짜? 왜?”
밤새 칼질을 하느라 입고 있던 방어구는 여기저기 망가지고 생채기가 난 엘리스는 방금 전까지 기진맥진하다가 화색이 돌았다.
“이상하게 좀 편해지지 않았어?”
“아저씨, 난 잘 모르겠는데?”
“잘 봐봐.”
아저씨의 말대로 엘리스가 흐트러진 집중력을 끌어모아 이리저리 살펴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전형이 슬슬 뒤로 물러나고 있고, 크게 기세가 밀리는 이들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맞네, 저 새끼 내빼려고 하는 거.”
“그치?”
해가 환하게 대지를 적시자 마침내 세트는 자신의 다크엘프들을 버리고 뒤로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난 요술방망이를 꺼냈다.
“아저씨, 그게 뭐야?”
“요술방망이란다. 이 요술방망이를 부르는 다른 명칭은 RPG-7 대전차 로켓포.”
조준을 한 뒤 빠르게 이동하는 세트를 향해 갈겨 버렸다. 연기를 내뿜으며 날아가는 로켓포는 이윽고 기존의 엘프보다 더욱 큰 형태로 형체를 형상화하고 있던 세트의 등판에 부딪히며 터져 버렸다. 그 순간 옆에서 엘리스의 탄성이 들려왔다.
“와우”
화려한 불꽃이 세트를 감싸고 등짝에서 로켓포가 터진 세트가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을 본 순간 들고 있던 요술방망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혹시나 도망갈까 싶어 전력으로 쫓아갔다.
“등짝, 등짝을 보자!”
지난 고생이 주마등같이 지나가며 도착한 그곳엔 허무하게 재배맨의 자폭에 당했던 야무치처럼 자빠진 세트가 있었다.
“하, 새끼. 개대가리였던 주제에 도망치는 건 쥐새끼같네.”
<<으윽, 뭐였지?>>
오라가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세트의 모습은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해줬다.
“허억, 허억. 아저씨. 천천히 좀 가라니까. 이렇게 세게 얻어 터졌는데 어떻게 도망가겠어.”
“엘리스, 세상엔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나 행동이 있어. 특히나 플래그를 세울 수 있는 것들은 자제하는 게 좋아.”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건 그렇고, 왜 진작 안 쐈어?”
“보면 알겠지만 이게 살상반경이 좀 큰 편이라 아군이 휘말려서 쓸데없이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얘니까 이렇게 버텼지. 저기 있는 일반 엘프들이었으면 진작 육체가 터져서 죽었을걸?”
“아아...”
처박힌 세트의 주위로 작게나마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기에 엘리스는 아저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키키키, 너희들이 이 육체를 잡을 수는 있어도 이 세트님을 감히 죽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고생을 하게 만든 자식이 트롤러마냥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지켜볼 인내심은 이제 도저히 남아 있지 않았다.
“엘리스, 그동안 훈련받느라 힘들었지?”
자상한 눈빛으로 엘리스를 바라보자 엘리스는 살짝 놀랐는지 흠칫하다가 왜 그러냐고 슬금슬금 뒤로 가며 물어봤다.
“아저씨, 왜 그래. 내가 훈련받을 때 살짝살짝 꾀 부려서 그래? 봐봐, 나 이제 숨 안 헐떡거려.”
엘리스의 그런 모습에 순간 내가 너무 훈련할 때 쥐잡듯이 잡았나를 반성했지만 그런 고민은 잠시미뤄두기로 했다.
“그게 아니야. 그동안 쌓였던 모든 울분과 분노를 퍼붓게 해줄게.”
“무슨 소리야?”
“저 새끼 밟아.”
말과 함께 난 클클거리고 있는 세트를 향해 몸무게를 늘리는 수법인 자체개발 ‘만근추(萬斤錘)’를 활용하여 밟기 시작했다. 엘리스도 내가 무슨 의미로 말을 했는지 이해하고 내 옆에서 뭐라뭐라 방언처럼 들리는 욕을 하며밟기 시작했다.
“죽여, 이 개새끼. 죽여!”
“엘리스?”
어느새 뒤에서 전장이 정리가 되었는지 엘리스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눈이 살짝 뒤집힌 채 세트를 밟고 있는 엘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껏 땀이 날 정도로 밟자 상쾌해진 난 엘리스의 친구들이 살짝 질리는 표정을 보이는 것 같아 엘리스의 팔을 붙잡고 살살 말리기 시작했다.
“놔 봐, 놔 봐!”
“정신 좀 차려, 인마. 니 친구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
“어? 어?”
말리는 가운데서도 한참을 더 밟다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엘리스는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의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머쓱해졌는지 뒤통수를 긁으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늦었다. 엘리스. 니가 눈 뒤집혀서 밟는 거 얘들이 다 봤어.”
“쳇.”
친구가 그동안 숨겨왔던 실체를 봤다고 생각했는지 노타, 누손, 지난, 레우스는 충격에 빠진 듯했다. 그런 친구들을 향해 엘리스는 가식은 그만 떨기로 했는지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주먹을 들어 세우며 말했다.
“어디 가서 지금 본 장면 떠들고 다니면 이 자식하고 너희들도 똑같이 되는 거야.”
“어, 어.”
“쯧쯧.”
단체로 최면에 빠진 것처럼 순박한 표정으로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스는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야근을 한 직장인처럼 기지개를 폈다.
“하아, 피곤하다~ 아저씨, 난 이만 좀 자러 가야겠어.”
떠나가는 엘리스의 등 뒤로 환하게 해가 떠올라 있었다.
“얘들아, 정신 차리고. 다친 사람들 잘 수습하고. 그 다크 엘프들은 수갑 채워서 따로 격리시켜 놔.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없나 이 걸레하고 이야기 좀 나눠 볼게.”
“알겠습니다. 학장님.”
법보다 가까운 무력을 눈앞에서 확인한 엘리스의 친구들이 수습을 위해 떠나고 난 쪼그려 앉아 걸레짝이 되어 오라가 방전된 세트를 향해 말했다.
“넌 나랑 진실의 방으로”
버크 아저씨가 예전에 따로 만들어 줬던 특제 수갑을 걸레짝이 된 세트의 양 손과 양 다리에 채워 어깨에 짊어졌다. 어깨에 멘 세트로부터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겐 아무런 타격이 없다.>>
“그래, 넌 타격이 없지. 근데 니가 들어간 그 육체는 아닐걸?”
추측했던 대로 모진 고문에 장사 없다고 두드려 맞아 기력이 탈진한 험프티의 육체에서 세트가 빠져나왔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엘레네가 장치를 발생시키자 세트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놔, 놔라! 감히 이 위대한 존재를 이런 누추한 곳에!>>
“위대한 곳에 누추한 놈이 왔지.”
발악을 하는지 흔들거리는 구체의 장치를 보다가 무시하고 엘레네에게 말했다.
“그거 꼭 몬스터X 같아.”
<맞습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거든요. 영체로 이루어진 존재를 사로잡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하다가 정령을 포획해서 저장해보려고 만들어 봤던 장치를 응용해서 강화해봤는데 괜찮군요.>
작은 구체로 만들어진 형태의 포획기에 세트가 잡혀 들어가서 봉인된 상태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연구를 해 봐야겠다면서 이를 들고 가는 엘레네의뒷모습을 본 뒤 치료가 가능한 이를 불러 이제는 험프티가 된 걸레짝을 치료해주기로 했다.
“무....물.”
“물도 함부로 마시면 체해요. 그러니 참아라.”
얼굴이 불어 터진 험프티가 외상을 치료받은 뒤에 옮겨 와서 침대에 올려놓고 양손과 양발을 버크 아저씨 특제 수갑으로 묶어 놓고 수액을 놔준 뒤 한참을 지켜보다 한마디를 하고 나왔다.
“정신 차렸지? 몸은 함부로 못 가눠도 들리긴 할 거야. 너에 대한 처벌은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 그때까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하고 잘 생각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