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131화-험프티의 사정(4)
혼자일 때와 다르게 둘이 함께하게 된 이후로 험프티의 수련 속도는 나날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2서클에 오른 이후로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상태였을 때도 꾸준히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둔해진 성장세에 살짝 실망하고 있었는데 그림의 계약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로 드디어 3서클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2서클보다 배는 커진 서클의 둘레에 만족감을 느끼던 세트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흠, 그림과의 상성이 좋은 건가?”
험프티가 혼잣말을 하자 세트가 대답했다.
<<웃기는 소리하네.>>
“왜지?”
<<왜긴 왜야. 니가 그림의 계약을 주선해준 대가로 그림이 수련하는 부분의 일정부분을 넘겨받고 있으니까 그렇지.>>
“뭐?”
험프티는 그림이 과연 이를 알게 되면 자신을 속인 것이라 생각해서 기분 나빠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당연하지 너와 다르게 그림의 계약 당시 계약 당사자에게 해당 사실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고지하게 되어 있다고.>>
종종 따로 만나 수련을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림이 따로 내색하지 않고 빨라진 성장 속도를 축하해주는 것을 떠올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림과 만나 같이 수련하게 되었을 때 세트로부터 전해 듣게된 사실에 대해 언급하자 그림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너의 일정 부분 노력치가 나에게 계속 넘어오는데도?”
“그 부분에 대해서 세트가 보완책이 있다고 했거든요.”
“세트, 설명해봐.”
<<내 입장에서는 말이지. 계약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나의 힘의 상승으로 연결된다. 이 말이지.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은 질이 떨어져서 효과가 들인 수고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고.>>
“그래서?”
<<너를 시작으로 계약자를 늘리기 위해선 질좋은 초기 계약자들이 계약에 대해 열심히 홍보를 했을 때 얻게될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었어. 이기적인 인간들이 자기한테 뭐라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계약자들을 물색해서 질 좋은 계약자들을 물어올 것 아니야?>>
“그렇군.”
“세트 말로는 우리는 초기 가입자라서 앞으로 새롭게 가입하게 되는 사람들이 지금 내 수련의 결과가 당신에게 넘어가듯일정 비율을 내게 주게 되어 있대요.”
“그 비율이 어느 정도지?”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10%지. 힘을 얻은 대가로 그 정도 지분권 행사는 쌍방의 계약자에게 이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이니까.>>
“고작 10% 때문에 내 수련속도가 그렇게 빨라진 건가?”
세트는 이에 대해 수학적인 과정을 통해 하위계약자의 10% 지분으로 인한 성장가속이 얼마나 큰 메리트를 가지는지 설명해줬지만 둘은 어느 순간부터 길어지는 숫자 놀음에 지쳐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하위계약자가 늘어날수록 상위계약자들은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게 되어 더 큰 힘을 빠르게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건가?”
<<맞아. 거기다가 서로 모이게 되면 어둠의 영향력이 중첩되면서 마력축적을 하는 과정에서 더 수월해지는 이점이 있지.>>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주는 거지? 그리고 그렇다면 처음에 그림과의 계약에 대해서 왜 그리 부정적이었나?”
<<첫째,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려줘 봐야 니 입장에선 정보가 과다하게 주입되는 셈이라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고, 둘째, 그림과의 계약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그림이 너무 가벼워서 괜히 아무나 끌어들이다가 혹시 모를 적들을 만들어낼까 싶었던 우려때문이었달까?>>
“내가 가볍다구요?”
<<뭐, 지금은 아니란 걸 아니까하는 이야기다.>>
“전 좋은 인재란 말이죠.”
<<나의 선입견이 잘못된 걸로 인정하지. 그리고 말이 많긴 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둘 간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대화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자 둘은 이 부분에 대해선 서로 살짝 눈을 마주치곤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저도 얼마 전에 1서클 마스터가 되었잖아요. 1서클을 마스터하고 2서클 초입에 들어서니까 험프티 님이 말했던 마음에 어둠의 씨앗을 품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더라구요. 근데 미묘하게 씨앗이 다르다고 해야 되나? 그래서 말인데, 정확히 세트 님이 말하는 좋은 인재란 어떤 인재를 말하는 거죠?”
<<그건 왜 묻지?>>
“좋은 계약자를 늘리고 싶다면서요. 제 입장에서도 좋은 계약자를 늘릴수록 좋다고 했고.”
<<그랬지.>>
“그러니까 좋은 인재란 게 정확히 어떤 인재를 말하는 건지 설명해주면 내가 한번 분간해서 잘 모아볼게요. 제가 1차적으로 걸러서 데려오면 험프티 님과 세트 님이 2차적으로 심사를 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되면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세트와 험프티는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험프티에게 가진 시선이 존재하기 떄문에 돌아다니면서 어둠의 정령과의 계약을 가입할 것을 추천하기엔 적당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성격적으로 맞지 않았다. 세트의 입장에서도 자질은 뛰어나지만 홍보라는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 험프티를 채워 줄 수 있다면 그림과의 계약이 자신이 현재 판단한 것보다 괜찮은 선택이라고 이전의 자신의 판단을 정정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탁해도 되겠나?”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맡겨만 둬요. 어차피 궁중 시녀장의 자리가 이미 떠나갔다면 어둠의 마법사들 중에서라도 험프티 님 다음가는 2인자가 되어 봐야겠어요.”
의지를 보이며 두 팔을 하늘 위로 내뻗으며 으쌰으쌰를 외치는 그림이 자신이 봐뒀던 사람들을 곧 데려오겠다며 떠났다.
그 날 이후로 꽤나 발이 넓었던 그림은 종종 사람들을 데려왔고 세트의 정밀심사가 끝나고 계약을 한 이들은 또 새로운 계약희망자들을 데려왔다.
계약희망자들이 계약자가 되어 어둠의 마법을 수련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세트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갔고 험프티의 성장 속도도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늘어나는 계약자들을 통해 늘어난 마력을 축적시키는 것만으로도 일과 시간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휴우, 이것도 바쁘군.”
<<이게 바로 피라미드와 할증의 힘이다! 크하하하하하>>
“피라미드?”
<<먼 과거의 유산이지.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슨 단점을 말하는 건가?”
갑자기 진지해진 톤으로 말하는 험프티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원천계약자로서 세상을 매개하는 수단이 되어주는 험프티가 아직은 필요했기에 세트는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다.
<<이론적으론 무한히 하위계약자를 들이면 그 위의 상위계약자들은 꾸준히 이득을 볼 수 있지. 그러나 계약자가 무한히 존재하지 않기에 너나 그림처럼 초기 계약자들은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지만 언젠가 가입하게 될 최종단계의 가입자들은 너 같은 상위계약자들에게 상납만 하게 된다는 거지. 뭐, 너나 그림은 피해볼 일 없으니까 별로 신경 쓰지 마.>>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험프티의 심상이 아니라 집회 공간에 마련된 신상(神像)에 자신의 거주지를 옮긴 세트는 오늘 집회에서 늘어난 영향력을 음미해야겠다며 떠났다.
험프티는 세트가 떠나면서 별거 아니란 식으로 남긴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자기의 집 지하 공간에 마련된 수련공간은 집회의 장이 되어 점차 정기적으로 모여드는 수련자들을 위해 넓어지고 있었다.
넓어져 가는 집회의 공간에 모여든 사람들은 각자 마음에 어둠을 품었던 이들로 자신이 왜 마음의 어둠을 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의 암묵적 룰이 되었다.
이런 룰을 통해 자신의 어둠을 말하고 공유하면서 단순히 개인적으로 어둠의 마법이란 이득만을 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동체로 거듭나는 과정에 들어섰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집회가 끝나고 흩어질 시간이 되면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과 악수를 나누면서 공허했던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채워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한다며 떠나곤 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충족감을 채워줬다. 그리고 이는 험프티로 하여금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세트가 별거 아니란 듯이 말한 숨겨진 진실이 어쩌면 참석자들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에 험프티는 내심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험프티는 매일 대화를 나누고 서로 간의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과정에서 그림과 연인이 되었는데 연인인 그림과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림은 험프티의 표정에 어딘가 찜찜해보이는 구석이 보여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자기?”
“아니야.”
“아니긴, 표정에 다 써 있거든? 궁중 생활 짬밥이 몇 년인데~”
“딱히 표정으로 드러낸 것 같지는 않은데.”
“척하면 척이지. 시녀들이 딱히 표정 변화 없는 우리 여왕님들 비유를 그럼 어떻게 딱딱 맞추겠어? 시녀 생활 10년이면 무표정의 화신인 여왕님들이 움직이는 걸음걸이만 봐도 심기까지 읽어낸다고.”
“그런가?”
수비대장으로서 궁을 오가는 자신이 봤을 때도 딱히 여왕들이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착하고 움직이는 시녀들의 모습이 신기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다면 납득이 되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털어놔 봐, 자기야.”
험프티는 세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림에게 털어놨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림은 이 남자가 그렇게 무심하고 일전에 사고를 친 험프티 수비대장이 맞나 싶었다.
“자기야,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피해준 거 있어?”
“아직은 없지.”
“앞으로도 없을 거야.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있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본질적인 고독함에서 떠날 수 있게 되었는데 쓸데없이 왜 그런 고민을 해?”
“너도 그랬어?”
“그래, 궁중 시녀장의 지위에 오르고자 한없이 아등바등했던 때는 몰랐던 세상이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고 나니까 딱히 내가 추락해서 다치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어. 이쪽 문이 닫히니까 저쪽 문이 열린 셈이지. 덕분에 자기도 만났잖아. 물론, 이렇게 5서클에 오르게 된 것은 더더욱 감사할 일이고,”
자신과 만나 치유를 경험했다는 그림의 말에 자신이 한 고민이 참 별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트 말대로 최후단계에 속할 계약자를 받아들이기엔 아직 어둠의 마법을 익히지 않은 엘프들이 너무나 많은걸?”
그러나 둘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서로 모이고 모여 힘을 쌓은 이들은 자신의 힘을 분출하고 싶어하는 과정에 도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둠의 시조시여, 언제까지 저희는 이렇게 웅크리고만 살아야 합니까?”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분출된 반응을 전달받은 험프티는 두 여왕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싶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잊고 있었군.’
“두 여왕은 여왕의 백성이자 자식들인 저희들에겐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뭔 실험을 하는지 공식석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새롭게 나타난 인간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죠.”
여왕들의 잘못인가 한다면 그게 딱히 잘못은 아니었다. 여왕이 있건 없건 엘프들의 삶이 위태로워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악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억눌려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억눌려 있지는 않았다. 누구도 이들이 이렇게 지하에서 모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음에 상처 입은 자들이 알아서 사람들로부터 눈을 피해 모였을뿐.
“이제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냅시다. 어둠의 마법사들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군중이 모이고 나면 개인들의 선의와 다르게 집단의 의지에 반대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개개인들은 착하더라도 모인 군중은 때때로 다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곤 한다. 그렇게 누군가 지른 불에 군중의 마음속에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인 자들은 전체 엘프들의 숫자에서 다수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소수는 아니었다. 그게 그들의 자신감이 되었다.
꼬리에 불이 붙은 소마냥 갈 곳 없는 분노를 지닌 어둠의 마법사들은 이내 희생양을 찾아냈다. 처음엔 엘프들보다 적은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드워프들이었다. 기이한 것은 이들의 외침에 어둠의 마법사가 아닌 엘프들도 일부 동조했다는 사실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의 험프티에게 폭동을 일으킨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순간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날을 시작으로 분노한 군중에 스며들었던 동생은 군중을 움직이는 자가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동생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험프티의 동생이라고 떠들며 자리잡았다. 험프티는 그런 동생을 지켜만 봤을 뿐 거부하진 않았다. 동생은 그런 자신의 반응을 지난 과거 자신이 형을 향해 내뱉었던 폭언들을 그저 형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다툼으로 치부하며 덮으려는 의미로 이해한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며 방관하는 사이 기고만장해진 동생은 험프티 덤프티 형제가 엘프들의 왕국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어둠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또, 모여든 군중을 지배하는 자는 자신이었다. 왕의 자리에 둘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동생과 그 자리를 나눌 생각은 동생이 자신에게 폭언을 하고 멀어진 이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자 혼자 신이 나서 들뜬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어딘가 유쾌한 기분이었다.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란다. 동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