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130화-험프티의 사정(3)
그때 이후로 험프티는 해가 지고 나면 거리를 배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씨앗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보며 돌아다녔는데 생각보다 드물긴 하지만 그림자가 진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얼추 적합자 찾기가 지루해질 때쯤 그림이 자신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그때 그 거 말이에요.”
“그거라면?”
“저번에 그 세트인가 뭔가 하는 정령말이에요.”
“그 이야기는 따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시녀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며 쳐다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림과 험프티는 잠깐 눈치를 살피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제 손목을 잡았을 때 제 안에서 들린 목소리 말이에요.”
“잠깐만.”
험프티는 혹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가 있을까 싶어 어둠의 마력을 돋우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자신들을 추적하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젠 이야기해도 좋다. 궁금한 게 뭐지?”
“저번에 당신이 내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림은 방금 전까지 당차 보이던 것과 다르게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이상한 기분이라면 어떤? 세트, 넌 가만히 있어.”
자신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혼잣말을 하는 험프티가 이상해보일 법도 하지만 처음이 아니라서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번에 자신에게도 들렸던 그 목소리가 저 남자에게도 들리는 것이라면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어후...왜 이리 덥지?”
“딱히 더운 것 같지는 않은데 해도 이미 져서 온도가 내려가고 있다.”
여자랑 대화해본 적이 없는 걸까 그림은 눈앞의 남자가 참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큼큼,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때 말씀하신 정령 마법 저도 익힐 수 있는 건가요?”
“익히고 싶은 건가?”
“네, 익히고 싶어요.”
“잠깐 손을 내게 주겠나?”
이 일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 정령 마법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으며 그림은 험프티에게 오른손을 보여줬다.
<<싫다니까. 다른 사람을 찾자고.>>
“아니,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그녀의 안에 있는 씨앗이 가장 밝아 보였다. 어둠의 씨앗을 보고선 밝다고 하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험프티와 손을 마주 잡자 이내 저번에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들리는 이 목소리가 어둠의 정령인가요?”
<<그래, 정확히 정령은 아니지만 너희들의 수준으로 이해하기엔 정령이 편하다면 그냥 그런 걸로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하고 위대하신 이 세트님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
“딱히 위엄이 느껴지진 않는 것 같은데요.”
<<그거야 니 수준이 워낙 낮아서 그런 거지. 반딧불이 태양을 본다고 해서 그 격을 느낄 수나 있겠어? 그런 거야.>>
“그런가요? 아무튼 저도 정령마법을 익히고 싶어요.”
“왜지?”
“카스파르, 고것이 이제는 정령마법을 익혔다면서 시녀들을 모아놓고 자랑을 하더군요.”
<<날 고작 그런 것에 대항하려고? 거창하게 세상을 파멸시키겠다거나 도시를 멸망시키겠다는 정도도 아니고? 에이, 안해, 그까짓 이유로는 자존심 상해서라도 안돼.>>
“세트, 오히려 동기 자체가 순수해서 괜찮지 않을까?”
<<하아, 니 맘대로 해라. 어차피 씨앗을 틔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 니가 쌓은 마력인데 니가 주고 싶음 주든가.>>
“험프티 님의 마력?”
<<그래, 너와 계약을 맺으려면 험프티의 마력이 니 안에 있는 씨앗을 싹 틔우는 마중물이 되는 거지. 위대하신 나의 힘이 담긴 험프티의 마력 없이 넌 그저 씨앗만 있는 존재니까.>>
“하지만 나도 딱히 너와 계약을 맺을 때는 어둠의 마력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는데?”
<<거만 떨까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미 계약한 마당에 못 할 것도 없지. 넌 특별한 적합자였다. 그리고 네 안에 깊고 강하게 뭉쳐진 어둠은 그 자체로 마력을 끌어당기고 있어서 너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순수한 어둠의 마력이 이미 씨앗과 함께 뭉쳐져 있었지.>>
“그랬나?”
<<둔탱이같은 자식. 니가 적합자만 아니었어도 진작 갈아탔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군.”
원래대로면 이렇게 정령과 대화를 자유롭게 나눌 일도 없었겠지만 정령마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는 둘은 모두 이게 당연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험프티가 공부를 조금 더 하긴 했지만 공부를 하느라 끌어 모은 자료들 중에서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길거리에서 계약을 맺을 수 없기에 험프티는 그림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이동하기로 했다. 궁 안에서 생활하는 그림에겐 딱히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으니까.
“남자의 집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에요.”
“나도 내 집에 여자를 들이는 것은 처음이다.”
<<지랄하고 있다. 정말.>>
한쪽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고 남자는 무표정하게 그런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세트는 빨리 계약이나 진행하자고 했다.
<<어차피 할 거라면 후딱 해치우고 내보내.>>
“뭐하러 이렇게 서두르지? 그림 양, 혹시 바쁜가?”
“아니요, 오늘을 위해 그동안 딱히 쓸 일이 없던 외출허가를 받아 왔어요. 밤 10시까지만 복귀해서 당직 시녀에게 복귀 보고만 하면 돼요.”
“그렇다는데? 나도 안 바쁘고, 너도 바쁠 일 없고, 그림 양도 딱히 바쁘지 않다는군.”
<<늦은 밤에 시녀가 니 집에서 나가는 모습을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고 생각해봐라.>>
세트는 멍청한 그림과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빨리 내쫓기 위해 내놓은 자신이 급조한 변명이 꽤나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흠, 그건 생각 못했군. 미안하게 되었다. 그림 양.”
“아니에요. 이제 전 뭘하면 되죠?”
“우선 옥상으로 따라 와라.”
기이했던 것은 옥상을 향해 등을 돌린 험프티의 손을 그림이 잡았고 험프티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옥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세트가 뭐라뭐라 투덜거리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귀에는 세트가 뭐라고 하는 것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오자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침 달의 마력이 가득 차는 날이 가까워지는 날이군 그래>>
“달의 마력은 항상 일정한 게 아닌가 봐요?”
<<일정?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항상 달이 이 별과 일정하게 가깝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것을. 니가 본 달은 항상 저렇게 보름달이냐?>>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툴툴거리나, 세트. 그림, 나도 세트가 말해줘서 알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다.”
“달의 마력이 충만하다고 하니 뭔가 포근한 것 같기도 해요.”
<<니 주제에 그런 걸 어떻게 느낀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느낌적이 느낌이라는 거. 세트 님은 모르는구나.”
계속 자신에게 구박하고 있는 세트의 말투를 그림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궁 안에서 생활하는 시녀들이라면 ‘눈치’는 필수적인 생존기술이었다.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시녀장을 대하듯 최대한 본능적인 발톱은 숨기고 대하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툭하고 견제타를 날려버렸다.
‘아이고, 실수했다.’
<<뭐? 내가 그런 걸 모를 것 같아? 당연히 알지. 내 말은 말이야. 아직 니 수준으로는...>>
“세트, 니 말대로 오래 끌다가 그림 양이 늦게 복귀하게 되면 서로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 수 있으니 빨리 진행하는 걸로 하지.”
<<아니, 넌 지금...>>
세트가 뭐라고 말을 계속하자 험프티가 말을 끊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미안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세트가 사납게 구는 것 같다.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니에요. 저도 가끔 이상해질 때가 있거든요.”
<<또또, 지들끼리 편 먹고 이상한 분위기 만드네. 아, 외롭다. 외로워. 그리고 내가 무슨 애완동물이야? 뭘 사납게 굴어. 사납게 굴긴.>>
“그만. 세트, 시작하자.”
<<그래그래, 내가 이거 다 기억해둘 거니까. 나중에 본인들의 잘못을 잘 기억해라.>>
“근데 세트 님은 좀 말이 많으신 것 같아요.>>
옥상에 올라온 내내 험프티와 손을 잡고 있었던 그림은 옥상 위에서 찬바람을맡고 있는데도 그다지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해.’
계약이라는 건 딱히 별게 없었다. 험프티가 양쪽 손을 마주잡고 눈을 감더니 이내 세트의 주문을 따라 외우기 시작했고 험프티에게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그림에겐 포근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림은 환하게 비치는 달빛에 비친 고요한 표정의 험프티를 자세히 살펴봤다.
‘얼굴은 잘 생겼네.’
<<자자.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라. 집중. 여자, 이제 본인의 의사표시만 하면 끝이 난다. ‘그림’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달을 증표삼아 어둠을 지배하는 자, 세트와의 계약에 동의하는가?>>
“제가 뭐라고 해야 되죠?”
<<그냥, 예라고 하면 된다. 예라고 하면. 이런 거까지 설명해줘야 돼.>>
툴툴거리는 세트를 험프티가 다독였다.
“그녀는 처음이라고지 않나? 이해해줘라.”
“그쵸? 세트 님은 성질 좀 죽여야 할 듯. 예, 저 엘프 그림은 세트와의 계약에 동의합니다.”
<<본인의 의사가 확실한지 재확인하겠다.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동의한다니까요.”
<<짜증내기는. 확 무를까보다. 아무튼 이것으로 계약의 과정을 마치겠다.>>
그림이 눈을 감고 험프티를 통해 흘러 들어온 어둠의 마력을 느끼느라 가만히 있는 동안 험프티도 달빛에 비쳐 어둠의 마력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한동안 지켜봤다.
<<야, 야. 계약 끝났다고. 정신차려, 인마. 집에 가야지!>>
“아, 그런가?”
<<‘ 아, 그런가?’ 이러고 있다. 나, 피곤해. 험프티, 쟤 빨리 가라 그래>>
“니가 뭘 한게 있다고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겠군. 어차피 마력은 내가 흘려보냈는데. 그림 양 기분은 어떤가?”
<<하, 오늘따라 험프티 씨가 뭘 잘못 드셨나. 왜 이리 꼬치꼬치 캐묻지?>>
세트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세트가 떠들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둘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신기한 기분이에요. 텅 빈 것만 같은 제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힘이 제 안에서 딱 절 밀어주는 느낌?”
“흠, 내가 느꼈던 거랑 어느 부분에선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이것들이? 나는 누구랑 이야기하니? 그리고 이제 손 놔도 되는데?>>
세트의 마지막 말은 둘에게 들렸는지 둘은 화들짝 놀라 손을 놨다.
“딱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도 워낙 계약에 집중하고 마력을 느끼느라 깜빡하고 있었네요.”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한 호칭이 변했지만 험프티는 의식하지 못했고 그림은 개의치 않았다.
<<하아, 2호 계약자가 저리도 못 미더워서야.>>
“그럼 저도 계약 의무에 따라 씨앗을 가진 사람에게 제가 가진 마력을 가지고 세트 님과의 계약을 주선해주면 되나요?”
<<아니, 니가 가진 마력 수준이나 농도로는 상대방에게 흘려 넣기 어려워. 그 정도가 되려면 수련을 좀 쌓아야지. 이미 마력을 쌓는 방법이나 기본적인 발현 방법은 계약하는 과정에서 너의 의식 속에 심어 놨으니 수준이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다. 그 전까진 험프티에게 데려와라. 알았나? 알려줄 거 다 알려줬으니까 이젠 좀 가라.>>
“알겠습니다. 저도 이젠 가봐야겠네요. 시간이 매우 늦었어요.”
“그런가. 직접 궁 안까지 배웅해주고 싶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같이 가주진 못할 것 같다. 다만 세트를 통해 마력이 연결되어 잇으니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게 메세지 마법을 날려라."
"메세지 마법이요? 아! (이렇게 보내면 되나요?)"
"습득이 빠르군. 그렇다."
잘가라고 인사를 나눈 뒤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는 그림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험프티의 얼굴에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약하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떠나가는 그림의 얼굴은 로브로 머리를 감싸서인지 몰라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세트는 그 이후로 둘의 메세지 대화를 연결하느라 한동안 성질이 나서 열이 올라 있었다.
<<아, 나도 좀 쉬자. 잘 들어갔으면 잘 들어갔지. 그건 또 뭐하러 메세지를 보내고. 험프티, 넌 또 뭘 잘 자라고 인사를 해주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