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129화-험프티의 사정(2)
동생과함께 여론을 만들고 실권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은 어찌된 일인지 초기에 파악당해서 두 여왕을 찾아온 세 명이 움직인 덕분에 실패해버렸다.
그로 인해 자신과 동생은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권력의 흐름에서 완전히 제외된 채로 일만 해야 하는 ‘백의종군’ 상태로 전락했다.
그때 동생은 자신을 원망했다.
“형 말대로 했는데 이게 뭐야.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고. 항상 사람들이 먼저 내게 다가와서 부탁을 하고 내가 그걸 웃으면서 들어주면 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내가 먼저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해도 잘 들어주질 않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 아니야?”
권리는 함께 누리려고 했으면서 정작 의무는 함께 할 생각이 없었던 건가. 모든 일에는 실패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번 일 또한 그렇게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본인은 감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형제가 함께 왕국에서 벌판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설령 죽임을 당하더라도 동생은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본인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게 다 형 때문이야. 이제 내 인생은 망했어.”
오랜 시간 다시 참고 지내면 언젠가 여왕이 자신들을 복권시켜줄 것이기에 자리만은 유지시켜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어, 형이 내 인생을 망쳤어.젠장 젠장!”
고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괴로웠다. 분명 실패한 순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깨닫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본인이 느끼는 체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동생이 매일같이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괴로웠다.
가장 괴로운 것은 자신이 그렇게 노력했던 과거와 다르게 왕국민들의 삶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거기에서 부외자였다. 소외된 자가 이토록 괴로운 것이었나.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흘렀다. 무슨 거창한 실험을 하는지 두 여왕은 다시 예전처럼 왕국민 앞에 등장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나 국민들은 딱히 불만이 없어 보였다. 분명 생활은이전보다 윤택해지고 하루하루 즐길거리가 늘어났으니까.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또 시작이군, 그래. 형, 그만해. 이젠 인정해야 해. 우리의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아.”
추레해진 몰골로 자신에게 쏘아붙이는 동생의 얼굴에서 웃음을 본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도 편하지 않으니 길거리를 배회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길거리는 무슨 소설이니 만화니 드라마니 하는 것들과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카데미라는 것이 생겨서 정령마법이라는 것을 익히는 신세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과 동생을 선망하듯 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쳐다봤다.
“저 자리가 내 자리였는데...”
상점의창문에 비친 자신의 현실은 예전과 같이 정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같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마치 죽은 사람의 것처럼 눈빛이 죽어 있었다.
“이게 나인가?”
영상 속에서 보이는 아카데미의 사람들의 생기발랄한 모습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여왕들처럼 태양은 아니어도 여왕의 옆에 있는 달과 같은 존재였는데 언제 이렇게 빛을 잃게 된 걸까. 진행하려고 했던 일이 실패한 것이지 본인의 삶이 실패한 걸까. 이렇게 살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부터 아무도 모르게 아카데미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문서들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뒤져서 끌어 모았다.
낱장으로 따로 떨어진 것들을 그러모으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순서대로 학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떤 것은 낮은 단계의 내용이 담겨 있었고 어떤 것은 높은 단계의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것의 수준이 더 높고 어느 것의 수준이 더 낮은지를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노력은 보답받는 것일까. 매일 퇴근하고 사람들이 매체에 빠져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동안 노력한 결과, 마침내 정령과의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대가 나와 계약을 원하는 존재인가?>>
“넌 누구지? 실프라던가 샐러만더라든가 하는 존재와는 다른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정령은 자신이 배웠던 바람이나 불 혹은 대지와 같은 자연의 정령은 아닌 것 같았다.
<<난 모두에게 공평하게 안식을 베푸는 존재, 어둠의 정령. 시시해빠진 일반 정령들과 비교해주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거들먹거리는 어둠의 정령이 거슬렸다. 마치 과거의 자신같아 보였다.
‘이젠 나에게 빛은 허락되지 않는 존재인 건가. 정령조차 어둠의 정령이라니...’
마법서의 머리말에 적혀 있는 ‘정령은 그대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니, 정령과의 접촉을 바란다면 오직 순수한 자신과 마주할 준비를 마치고 해야 한다.’는 경고문은 사실이었다.
“이게 내게 주어진 길이라면 받아들이지. 너의 이름은 무엇이지? 어둠의 정령이 니 이름일 것 같진 않은데?”
<<나의 이름은 세트. 세트다. >>
세트의 이름을 듣고 계약을 마치자자신의 내부에서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힘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은 마력의 분포 정도가 턱없이 미약한 것 같군.>>
“그런가?”
하나를 잃자 하나가 생기다니. 인생이란 알 수 없었다. 세트와 함께하고 난 뒤로 이전처럼 외로움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는 만족스러웠다. 두 여왕도, 멜키오르도, 동생도 모두 멀어지고 나서 혼자가 되었던 자신의 옆에 이제 누군가 함께 해준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함을 줄지는 몰랐다.
불안하고 흔들리던 자신은 사라지고 자신의 마음에 기둥이 잡은 듯 안정감이 생겨난 것 같았다.
“달의 마력을 받아들여 증폭시키면 에너지를 키울 수 있다는 건가?”
<<그래, 다른 것들과 다르게 달의 마력은 나와는 아주 상성이 좋지.>>
세트를 통해 마력을 모아 쌓아가면서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점차 늘어나고 신기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저기 지나가는 시녀에게서 검은 응집체같은 게 보이는데 저건 뭐지?’
<<호오, 씨앗을 볼 수 있게 된 건가?>>
“씨앗?”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에 지나가는 시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엘프는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숙이고서 자리를 떠나갔지만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만큼은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씨앗이란 나의 마력을 심을 수 있는 적합체의 표식이라고 할 수 있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줘.”
<<모두가 나의 마력을 전달받아서 나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어둠의 그림자가 비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 자질있는 자들만이 거기에 해당되지.>>
“그렇다는 말은 그녀에게 너의 마력을 전달하면 그녀도 너의 힘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건가?”
<<그래.>>
그 날 이후로 그녀의 곁을 몰래 배회했다. 어떤 점에서 마음에 그림자가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이 ‘그림grim’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게 되었을뿐. 다만 그녀에게서 어둠의 씨앗은 처음 본 그대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았다. 궁금한 마음을 풀고 싶어 기회를 틈타 혼자 있을 때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엘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궁에서 일하는 시녀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경계의 눈빛이 역력한 그녀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생각이 없음을 피력했다. ‘그림’은 머뭇거리더니 이내 수락했다.
“해야할 일이 있어 그렇게 길게 시간을 내드릴 수는 없어요.”
“고맙군. 내가 알고 싶은 건 별다른 게 아니다.”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
“그림, 그대의 마음에 비친 어둠이 왜 생겼는지 알고 싶다. 특별히 좌절할 만한 일이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었는가?”
그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의종군 신분으로 전락한 험프티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것도 이상했지만 적어도 이유없이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는 악인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 대화를 수락한 것이었는데 저딴 질문을 할 줄이야.
“이상한 분이시군요.”
“이상하게 들릴 것이란 건 알지만 내겐 중요한 질문이다.”
사실 그림에게는 꽤나 기분 나빠서 밤잠을 설칠 정도의 일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멜키오르와 발타사르의 뒤를 이어 차기 시녀장을 맡게 될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발타사르님께선 자신이 아니라 드워프 시녀 ‘샤이어’에게 ‘카스파르’라는 이름을 주면서 차기 시녀장의 자리를 주겠다고 선언하셨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드워프 카스파르를 볼 때면 지가 차기 시녀장이랍시고 으스대는 것만 같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이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이유를 알려주신다면 대답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좌절하거나 분노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거군.”
“이유를 말씀해주시면 답하겠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읽힌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째서 자신을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한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흠...”
눈앞에 선 수비대장 험프티는 눈을 감고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대답을 들려줬다.
“그대에겐 자질이 있다. 정령마법을 익히기엔 충분한 자질이.”
“무슨 말이신가요. 이미 궁중에 있는 시녀들은 전부 자질검사를 맡았고 전 특별한 자질이 없다고 하얀 여왕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말하는 정령마법은 여왕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괜찮겠나?”
“네?”
“아, 그쪽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괜히 대화를 나눈 것일까.
“괜찮다고 하는군. 자네의 손을 잠시 잡고 싶은데...”
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을지언정 여자 엘프들에게 추잡한 사람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소문이 거짓이었던 걸까. 수작을 부리려거든 이런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도 많았을텐데 그림은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싫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 잠시 실례하겠다.”
험프티는 두발짝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자신에게 가까이 와서 강제로 손목을 붙잡고 손으로 깎지를 꼈다.
“소리를 지르겠어요.”
너무나 불쾌한 마음과 다르게 험프티란 남자와 손을 잡자 남자의 손을 통해 알 수 없는 뭔가가 자신에게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불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
“세트의 말이 맞았군.”
<<아아, 들리나?>>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 봤지만 이곳엔 자신과 험프티란 남자 둘뿐이었다.
<<밖이 아니다.>>
“험프티 수비대장님, 이런 장난은 좀 지나치신 것 같군요.”
<<큭, 이 여자, 너보다 좀 멍청한 것 같다.>>
“네?”
<<난 니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를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옆도 뒤도 위도 아니라 너의 안에서.>>
흠칫 놀라 심장쪽으로 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이 여자에겐 그늘진 부분이 있군.>>
“그런가?”
기이한 이 장난에 언제까지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 건지 그림은 어이가 없었다.
“그만하시죠. 험프티 수비대장님이 이런 저질의 장난을 치는 분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소문이 잘못되어 있나 보군요.”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장난을 치고 있진 않다.”
“그럼 도대체 지금 자꾸 말을 하는 분은 누구시죠?”
<<이봐, 이 여자는 포기하자.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세트, 그녀에게 내 힘을 잠시 불어 넣어 보겠다.”
<<시간 낭비야.>>
아직도 붙잡고 있는 험프티를 동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들어오자 불안하고 흔들리던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게 뭐죠?”
<<뭐긴 뭐야. 어둠의 마력이지. 이런 귀한 마력과 시간을 뭐하러 이런 여자에게 낭비하는 거야.>>
“어떤가. 그대도 나처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은가?”
괴상망측한 대화를 더 이상 나누고 싶지 않아 그림은 험프티의 손을 뿌리치고 힘껏 도망쳤다.
“실패인가?”
<<니가 바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해. 저딴 멍청이에게 시간낭비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