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128화-험프티의 사정(1)
험프티는 최후공격을 준비한 뒤 잠에 들기 전 정후란 남자가 예전에 선물이라고 보내줬던 와인을 마시며 두 여왕과 보내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드워프와 엘프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탄생시킨 두 존재. 그 중에서도 고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하얀 여왕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창조주였다.
두 형제가 이 세상에 등장했을 땐 이미 멜키오르가 그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하얀 여왕의 바쁜 일정을 대신하여 자신들을 가르쳤고 도와줬다.
여왕이란 그런 것이라며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들에게 멜키오르는 자신들의 이해를 요구했다. 겉보기엔 성인이었으나 속은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난 자신들이었으니 이해를 받아야하는 쪽은 하얀 여왕이 아니라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해했다.
실제로 하얀 여왕은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엘프들을 끊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면서 왕국을 키우느라 바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속으로 이모라고 생각했던 붉은 여왕은 하얀 여왕과는 달랐다. 하얀 여왕이 엘프들을 많이 태어나게 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나눠줬다.
‘부러웠지. 때론 친구처럼 때론 누나처럼 격의 없이 드워프들의 옆에서 항상 함께 하는 모습들이.’
점차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왕국이 안정이 되어가고 자신과 동생은 수비대장과 시종장이라는 높은 직책을 부여받았다.
‘인정받은 줄 알았어.’
자신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낸 그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이 드디어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두 여왕의 편의를 위해 애쓰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눈치껏 알아서 가져다 줄 때면 웃어주는 그녀의 웃음이 자신에겐 그 무엇보다 큰 보상이었다.
“언젠가부터 변했어...”
왕국이 안정되어 갈수록 두 여왕은 서서히 손을 떼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뗀 엘프와 드워프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주겠다면서. 그것이 자신들이 엘프와 드워프에게 바라는 진정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처음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하얀 여왕을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어머니가 멀어지는 것만 같아 아쉽다고 했지만 형으로서 그렇게 생각해선 안된다고 다독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하얀 여왕은 자립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해지는 것 같아 동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오르며 자신을 괴롭혔다.
이래선 안된다고. 어머니께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자신만큼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자신에게 맡긴 수비대장의 책무인 사람들 사이에서의 질서유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모습임에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엘프들 그리고 그런 엘프들과도 판이하게 다른 성향을 지닌 드워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들을 조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을 처리하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믿는다며 수비대장의 견장을 어깨에 달아줄 때를 기억하는 한 감히 수비대장의 자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수비대장으로 시간이 쌓여가자 엘프와 드워프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꺼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등장하면 알게 모르게 위축이 되는 것이 느껴졌고 가까운 부하들조차 고개를 조아렸다.
이야기를 나눌 존재라곤 동생뿐이었다. 여리고 말이 많았던 동생은 시종장의 자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과정이 의외로 만족스럽다고 했다.
“어째서?”
“모두들 내 말을 듣잖아. 내가 말하면 마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따른다고. 간혹 아닌 것도 있었는데. 키킥.”
“함부로 그러면 안돼. 다시는 그러지 마. 너의 행동이 곧 어머니의 말씀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형도 별반 차이 없지 않아? 사람들이 그러더라. 형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무서워한다고.”
“사람들이 그래?”
“어, 형은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원칙을 어긴 자에게 가차없이 여왕님이 내리신 벌이라면서 체벌을 가하거나 노동형에 처했잖아.”
“그건 지켜져야만 하는 원칙이었어.”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좋은 사람을 좋아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자신을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일을 다하면 그것이 여왕의 뜻을 지키는 것이었고 원칙을 지키는 것은 여왕의 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설령 누군가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해도 여왕의 법과 여왕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험프티는 언젠가 사람들이 분명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상하게도 동생의 말은 며칠이 지나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실제로 자신이 길에 나가서 단지 순찰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향해 보여준 사람들의 눈빛이 어떤 의미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자 그동안 외면해 왔던 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깨달은 날부터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매일 보고를 위해 여왕에게 찾아 가봤자 살가운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저 단순히 업무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 나면 예정된 일정에 따라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와 헤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진정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여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맞나?”
여왕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일은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걸음마를 걸어야 한다는 것과 틀에 박힌 자신의 삶. 정해진 직책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자신의 인생이 과연 여왕의 뜻에 부합하는 삶인가?
동생은 어느새부턴가 다시 안하무인처럼 사람들을 부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왕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동생 또한 형벌에 처해야 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한, 두 번 모른척하니 동생의 일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감히 사람들은 내게 동생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이도 없었고, 동생의 삶은 그걸로 만족하는 것 같아 대리만족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삶을 동생이라도 만족하고 산다면 괜찮은 게 아닐까 하고 합리화해버렸다.
여왕은 동생이 막무가내같은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면서도 딱히 동생에게 벌을 내릴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
“저 정도는 괜찮은 건가? 아니면 동생의 삶이 자유롭게 살아보라는 어머니의 뜻에 부합하는 건가?”
고민해봤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답을 아는 것은 여왕이었다. 보고를 마치고 어렵사리 질문을 해도 괜찮냐고 물어봤다.
“물어봐도 좋다.”
“설령 여왕님의 원칙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이가 있더라도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실 겁니까?”
“그로 인해 누군가 죽었나?”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네에게 처벌을 할 것을 요구했는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용인하는 한도라면 딱히 처벌해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습니까?”
“자유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용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 그 침해받지 않는 선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주관적인 것이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데 어떻게 일괄적으로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답이 되었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고민해보라.”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자 마음 한구석에 있던 죄책감이 쓸려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동생을 봐준 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여왕이 자신에게 면죄부를 내려주는 것만 같아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혼란스러워졌다.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그동안 여왕의 뜻과 원칙을 따라 내린 나의 처벌은 잘못된 것이었나?”
부하들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원칙을 지키는 수비대장님의 뜻이 옳다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왕들은 어느날 어차피 매일 똑같은 보고라면 굳이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냐면서 알아서 하라는 말을 끝으로 자신이 여왕을 보기 위해 따로 만나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관성적으로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겨워질 때쯤 다른 즐거움이 찾아왔다.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부하들과 국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여왕이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하는 착각이 피어올랐다.
‘어차피 국민들에게 관심 없는 여왕을 대신해 내가 그들을 이미 통치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아예 그 자리를 공식적으로 만들어볼까?’
동생에게 이야기를 꺼내자 괜찮은 생각이라며 좋아했다. 시종장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라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고.
“형, 정말 좋은 생각이야.”
“너는 궁의 안에서, 난 궁의 밖에서 권력을 잡아보자.”
솔직한 마음은 이렇게라도 하면 여왕의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표정이 바뀌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무관심 속에 지루함을 바꿔줄 수 있는 첫 번째 존재. 자신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가도 그렇게 무관심한 표정일까.
동생에겐 지금부터 착한 척을 하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친절함을 가장하여 형인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구분해서 확인해보라면서.
“그거 재밌겠는데?”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걸러내면 한번에 쳐내는 거야. 어차피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필요 없으니까.”
“신나겠다! 크크크큭”
동생은 이게 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쳇바퀴 같은 삶 속의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유희거리라고.
동생은 자신의 말에 충실히 따르는지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온다고 이야기했다. 때론 형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면서 요즘은 그런 사람들의 명단을 적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나중에 다 혼내줄 생각만 하면 재밌다니까. 내가 여왕처럼 얼굴을 굳히고 처벌하라고 하는 순간 보여줄 그 사람들의 얼굴이 기대 돼.”
‘이젠 어머니가 아니라 여왕이구나.’
어딘가 착잡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날은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날 여왕에게서 오랜만에 찾아오라는 전갈을 전달받았다.
“부르셨습니까?”
“얼마 뒤에 세명의 손님이 날 찾아올 것이다. 귀한 손님들이니 한치의 무례함도 없이 대하도록.”
“손님 말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의아했다. 이 별엔 자신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손님이라니. 그것도 여왕의 손님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것은 지루하고 권태로움에 지쳐 무표정했던 두 여왕에게서 기대감에 의한 즐거움의 표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첫 번째가 아니게 되었군.’
어떤 이들인지 모르지만 괜히 만나기도 전부터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일을 벌이는 건데.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그들이 나타났다. 인간이라는 존재 두 명과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을 매우 닮은 듯한 존재였다.
여왕들은 그들이 오자마자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동생의 말을 전해 듣자니 궁 안에선 가관도 그런 가관이 아니었다고 했다. 밖에 서 있는 자신에게도 들릴 정도로 여왕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순간 여왕들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바꿔치기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라고 했다.
동생의 말이 사실인지 궁금해 궁 안에 있는 실내정원에서 티파티를 할 때 먼 발치에서 쳐다 봤지만 사실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결심했다.
"웃음을 준 건 그들이 첫번째일지 몰라도 분노와 좌절을 주는 것은 내가 첫번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