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6화 〉126화-복수는 나의 것 (126/239)



〈 126화 〉126화-복수는 나의 것

밀가루와 달걀 그리고 설탕과 생수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반죽을 한 뒤, 밀가루 반죽을 얇고 넓게 쭈욱 펼친 뒤 마력으로 오븐에 굽듯 노릇노릇 구웠다. 그런 다음 구운 밀가루 시트를 잘라 그 위에 시럽과 함께 쵸코 크림을 얹고 그 위에 다시 잘 구워진 밀가루 시트를 얹고 나서 녹여놓은 초콜릿에 담갔다 뺀 뒤 마력으로 차갑게 식혔다.
차갑게 식어 굳어진 초콜릿 위로 실처럼 얇게 녹인 초콜릿을 뿌려주면 우리가 아는 ‘다섯가지 예스’의 케이크 버전이 완성된다.

“와와, 아저씨. 엄청 커. 아저씨 얼굴보다도 더 커.”
“그래 그래.”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침을 꼴딱 꼴딱 삼키며 신이 난 엘리스와 옆에서 기대에 찬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엘레네에게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내기 위해 검기를 뽑아서 원형의
케이크를 8등분으로 나눴다.
“아저씨, 사람은 셋인데  8등분이야?”
<크게 3등분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 생각 없이 4번을 잘랐을 뿐인데 치고 들어오는 반응에 깜짝 놀랐다.
“어, 왜 그랬지? 근데 이거 달아서 3등분해서 먹으면  못 먹을 수도 있지 않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엘리스가 아쉬워했다.
“그걸 왜 아저씨가 정해. 한번에 큰 조각을 먹고 싶다고 내가  번이나 말했는데.”
<맞습니다. 엘리스가 자르는 순간까지도 옆에서 이야기했죠.>
“그랬나?”
“아저씨 여기 오고 나서 되게 멍한 거 알아?”

어느새 잘라진 초콜릿 조각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포크로 썰어먹는 엘리스는 입으론 달콤함을 만끽하며 행복해하면서도 눈으론 날 쳐다보며 걱정의 말을 꺼냈다.
‘언제 썰었어.’
<다섯가지 예스라는 거대 초코 케이크를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만들어 주시는 동안 계속 멍했습니다. 분노가 아직 풀리신 것 같습니다.>

그랬다. 이제 곧 일을 성공하고 나서 어떻게 돌아갈지를 방법을 강구했던 것들을 실험해볼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어이없게도 갑작스럽게 터진 사태에 도망쳐야 했으니 꼭 천재지변을 당한 이재민이  기분이었다.
다소 험난한 시기가 있기도 했지만 취준생 시절 이후 큰 굴곡 없이 성공의 길만 걸어왔던 나에겐 오랜만에 맞이하는 좌절이었다.
합격 연락받고 좋아했는데 면접  회사가 코로나 때문에 도산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어이없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근데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때의 감각을 다시 느끼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아...섀넌...얼굴 좀 보나 했는데. 험프티-덤프티  개자식들.’

오랜 시간 준비한 프로젝트가 급작스럽게 중지되면서 생긴 분노, 좌절, 허무 등의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만들어보기 시작했는데  중 하나가 요리였다. 특히나 요리에서도 제과, 제빵을 하는 과정은 일종의 심리치료 과정으로 좋다는 엘레네의 추천으로 요 근래 케이크부터 시작해서 빵같은 것들을 만들어 엘리스와 엘레네에게 주곤 했다.
정확한 계량과 정확한 조리 시간이 중요한 제과, 제빵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잠시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줬으니까.

“엘리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저씨, 할까 말까 고민했던 말은 그냥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몰라요? 넣어 둬. 넣어 둬.”
오물오물 케이크를 먹는 엘리스의 행복한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이내 이어지는 달콤함에 회복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먹을 걸 만들어서 자기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에 어이가 없어 삼켰던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살쪘어.”
“으윽...”

얼마나 잘 먹었는지 그동안 엘리스의 얼굴을 찬찬히 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몰랐는데 내가 그동안 만든 음식을 주로 처리하는 것이 엘리스와 엘레네였다. 엘레네는 인간의 형태이긴 하지만 인간의 대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에너지 소화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였기에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엘리스는 얼굴이 둥글둥글해지고 배도 살짝 나왔지 싶었다.
포크로 한 가득 케이크를 찍어 입에 넣고 움직이던 엘리스의 턱관절 저작운동이 멈췄다.
“아저씨가 ‘맛있으면 0칼로리’라고 해놓구선...”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지.”
<제가 봐도 엘리스가 이곳에 온 뒤로 토실토실 살이 오르긴 했지요.>
“얄미워, 마더.”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푸드 파이터의 자질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엘레네를 엘리스가 째릿하고 쳐다봤다.
<그렇게 저를 쳐다본다고 해서 엘리스가 먹은 칼로리가 연소되진 않아요. 인간의 육체는 그런 메커니즘이 없거든요.>

입 안에 있는 케이크는 차마 뱉을 수 없었는지 천천히 씹으며 음미하던 엘리스는 포크를 내려 놓으며 그만 먹겠다고 했다.
“난 아저씨의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 주겠다고 한 건데, 이런 건 배신이야. 배신.”
“먹는 건 좋은데 자기가 감당할  있을 만큼만 먹었어야지. 살은 먹은 것보다 더 움직이면 빠지게 되어 있는걸.”
“하아, 행복한 시간은 참으로 짧고도 짧구나.”
엘리스의 말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먹는 것이 아니라 크로니클의 단원들과 보냈던, 그리고 섀넌과 보냈던 불타오르던 시기가 떠올라서.

다시 그걸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지만  낌새를 눈치챘는지 엘리스가  말에 의해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마지막에 고민하고 있었잖아. 뭐, 덕분이라고 표현하긴 애매하지만 유예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나쁜  아니지 않아?”
“흐음.”

1차 오픈을 앞두고 의도치 않게 과한 바닷물의 유입으로 홍수가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작지만 존재한다는  인공지능의 분석결과를 전해 들은 뒤로 나로 인해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치며 두려워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결정하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내 선택의 폭을 제한당하는  다른 것 같다. 엘리스.”
“그건 그렇지. 지금 아저씨에 의해서 케이크를 통제당하는 나처럼 말이야.”

아직도 남아 있는 케이크가 엘레네의 입으로 계속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엘리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남은 케이크를 챙겨서 후다닥 도망쳤다.
“운동하고 나서 나중에 먹을 거야. 엘레네가 이러다 다 먹겠어.”
<이제 살짝 맛만 본  같은데...>
고상하게 입가를 닦는 엘레네는 이미 혼자 케이크 반판을 먹어치운 뒤였다.
“너무 달지 않아?”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인간과 다르게 제 육체는 쾌락의 역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감각으로 느끼는 부분에 있어서 내성이 존재하질 않아요.>
“뭐든 중독될 가능성은 없겠네.”

부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얼 먹든 무얼 하든 처음과 같은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한계 편익이 감소하는 인간에겐 있을  없는 일이긴 하죠.>
마약에 중독되고 게임에 중독되고 술에 중독되는 모든 종류의 중독과정에서 발생하는 행위시간 혹은 복용량의 증가는 근본적으로 한계편익 감소의 법칙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역치(閾値)가 증가할수록 점차 더 많은 양,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만 이전에 느꼈던 최초의 짜릿함과 비슷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을 중독으로 이끄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모든 것에 좋은 것이란 건 없었다.
“엘레네는 그럼 슬퍼도 기뻐도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야?”
<예, 저희들에겐 모든 기억이 처음 그 순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유사한 감정 센서가 처음 느낀 그 순간이 주는 감정과 감각을 그대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죠.>

좋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에게 느꼈던 분노와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시간이 흐르면 삭아간다. 오(吳)나라의 왕 합려의 아들 부차가 새롭게 왕위에 올라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을 때, 그로 인해 월(越)나라의 왕 구천은 부차의 마구간지기로 일하며 치욕을 느껴야 했다. 부차가 병들었을 때 부차의 대변까지 나서서 맛을 보고 간호한 덕분에 그 정성에 감동한 부차에 의해 신뢰를 얻어 구천은 풀려났다. 풀려난 구천이 그 치욕을 겪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트러지고 나태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불편한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매일 핥으며 자신이 겪었던 치욕을 잊지 않으며 노력한 결과 마침내 오나라가 빈틈을 보였을 때 구천은 오나라의  부차로부터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부차는 귀양을 가서 살라는 구천의 말에 가차 없이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베어 죽음으로써 그 복수극은 끝을 맞이했지만.

우리가 아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구천의 라이프 스토리를 봐도 인생 막장에 다다라 똥맛까지  본 인간이 자꾸만 삭아가는 자신의 분노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 보통의 쓴맛과는 차원이 다른 쓸개를 맛보며 흐트러지는 자신을 다잡고 각오를 다져야 했었다.
“엘레네에겐 모든 순간이 처음이나 다름 없네. 자신을 삼킬 것만 같은 나의  분노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텐데...”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엘리스는 어디까디 도망간 거야?”

한동안 방황했던 나를 다잡기 위해 그날부터 다시 처음의 수련으로 돌아갔다.
“근데  나까지 끌고 들어가는 거야. 아저씨.”
“너도 살 빼고 싶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 여기 온 뒤로 제대로 수련하는 걸 내가 본 적이 없었던  같아.”
“칫, 아저씨는 그럴 여유도 없었으면서. 허억 허억.”
“안 봐도 지금 니 하는 것 보면 맞지 싶은데.”

사람의 육체는 기존에 쌓아 올린 것을 쉽사리 잊지 않기도 하지만 동시에 편한 것을 맛보면 쉽게 망각하기도 하는 모순적인 존재라 엘리스처럼 열심히 훈련을 하다가 몸이 풀어지면  변화는 본인이 더 잘 느끼게 된다.
“얼마나 운동을 안 하고 먹기만 했으면 그거 좀 휘둘렀다고 헉헉거려.”

내 옆에서 버피테스트 100회를 한  검을 들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베기 1000회를 실시한 뒤 좌에서 우로 1000회 우에서 좌로 1000회를 한 엘리스는 자세가 다 흐트러져서 무너져 있었다.
“아저씨, 내가 잘못했어. 오늘은 그만하자.”
“안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히이익”
“험프티-덤프티 형제에게 한방 먹여주고 싶지 않아? 지금 니가 이렇게 힘든 건  형제때문이란다.”

이젠 바닥에 앉아 있을 힘도 없는지 땅바닥에 드러누운 엘리스는 한참을 숨을 몰아쉬더니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내가 지금 힘든 게 아저씨때문이지. 무슨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런가?”
“그나저나 아저씨 이제는 마음 잡은 거야?”
“뭘 하려고 해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그렇게 한동안 훈련과 먹방을 계속 이어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지도자로서 교육을 받으며 자리를 잡고 있던 소안과 노타가 찾아왔다.
“누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전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도와달랍니다.”
“엘프들끼리 내전이 벌어진거야?”
“험프티-덤프티 형제를 따르는 이들이 정후님과 세 분이 준비하던 연구소를 발견하곤 에너지 발생장치를 작동시키려고 했답니다.”
“누손과 제 친구들은 정후님과 엘레네 님께서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함부로 그걸 건드리면 큰 일이 벌어진다는 말을 믿고 크게 반대했구요.”
“뭐 ‘충’때만 잘 피하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긴 한데...”
크게 걱정하지 않는 내게 노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정확히 무슨 장치인지는 몰라도 ‘충’때에 맞춰서 작동시키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이 새끼들이? 선 넘네?”

안될 일이었다. 실험 진행을 앞두고 꾸준히 내 차원게이트 에너지를 추출해서 모아둔 상태라 해당 장치를 작동시키면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너희들 판단은?”
“친구들이 도움을 청했는데 드워프들의 탈출을 도와줬던 이들의 요청을 거부할 드워프들은 없습니다. 의리야말로 드워프의 상징이죠.”
“언제는 끈기와 힘이 드워프의 상징이라면서.”
“험험, 상징이란 원래 하나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는 법이라고 학장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말만 늘은  같아.”
“학장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가야지.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는데.”
“야, 넌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냐?”

돌아보는 노타의 옆에는 그동안의 집중특별훈련으로 벌크업을 계속해온 엘리스가 몸에서 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엘리스, 너 언제 드워프로 인종이 바뀌었냐?”
“꼭 드워프가 커지면 저렇게 될 것 같네. 우리 드워프는 너같은 드워프라면 환영이야.”
“이 새끼들이? 복수는 내 것이야.”

의도치 않게 험프티 덤프티 형제를 향해 원한을 불태우는 사람이 추가 되었다.
'흠, 너무 훈련이 과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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