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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화 〉120화-연애 많이 안해봤죠? (120/239)



〈 120화 〉120화-연애 많이 안해봤죠?

우리들의 이미지를 회복함과 동시에 두 형제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져 나갔지만 덤프티는 여전히 시종장이었고 험프티는 여전히 수비대장이었다.
나는 이제는 매일 식사시간에 참여해서 친해진 두 여왕에게 식사하는 도중에 물어봤다.
“두 사람을  자르지 않는 겁니까?”
<우물우물, 그래도 걔중엔 그나마 그 둘이 낫다고 할까>
<궁에 묶어두는 게 뭘 하고 다니는지 가장 파악이 쉽거든요>
‘무슨 황희 정승이냐?’

세종대왕이 퇴직을 원해 수차례나 사직서를 제출한 황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죽기 몇 년 전까지 일을 시켜 먹은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였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청렴한 관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나름 부정부패한 관리였던 황희는 그걸 알고 있는 세종대왕에 의해 죽기 2,3년 전까지 재능을 쥐어 짜이며 나라의 관리로 일해야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좀 조용해져서 심심하긴 해.>
<살짝 기대되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뭐가요?”
엘리스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두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상황이 오길 내심 기대했거든.>
<궁정 안에서 피어 오르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피어오르는 음모. 왕의 자리를 탐하는 신하와 그걸 마침내 물리치는 왕의 철퇴의 대서사시를 누가 다 망쳐 주셨지.>
‘미쳤네.’
<하지만 두 형제가 어설프게 시도한 덕분에 우리는 일을 해야 했지. 그러니  형제도 일을 해야지. 평생 진급 없이   자리에서 녹봉 인상 없이 굴릴거야.>
<평생이요.>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도망쳐라. 프티 형제.’

우리의 대화는 이어 자연스럽게 먼지로 뒤덮인 땅을 녹토로 바꾸는 뉴 프로젝트 ‘가이아’로 이어졌다.
“계산은 끝났어요?”
<오늘 오전에 끝났지. 마력이 언제 가장 증폭되는지에 대해 관측장비를 만들고 나서 변화의 추이를 계측한  토대로 화성에서 마력이 언제쯤 강대해지는지를 알아냈어.>
<정후, 분석 결과에 따르면 태양-지구-화성이 일렬로 서는 순간이 마력증폭의 효율이 가장 좋더군요.>
<태양-지구-화성이 일렬로 서는 현상을 과거의 학자들은 ‘화성충’(火星衝· Mars opposition) 현상으로 불렀는데 이 현상은 2년 2개월에 한번씩 발생해.>
<다만 정확히 일렬이 되진 않아요. 행성들이 공전과 자전을 하는 과정에서 움직이는 방향이 2차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3차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얼추 맞아 떨어지는 순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 언제가 좋은지 알았으니 이제부턴 이 마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세워야겠네.”

안 봐도 험난할 게 뻔했다. 새로운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이론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고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킬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 곳에선 이능력이 태동하는 순간이었지 이미 발전한 시점이 아니었기에  과정이 지난할 것은 뻔했다.
<우리는 마력을 활용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관으로 탑을 만들기로 했어요. 계측기구와 증폭실험을 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지상에서 높은 곳에 위치할 필요가 있거든요.>

세 인공지능이 내가 보여준 ‘오러’를 바탕으로 마력의 증명과 이용방법에 대한 이론을 세우기 위해 프로젝트를 가동했을 때 나와 엘리스는 세 명의 시녀장들과 함께 잡지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왜요?”
“저번에 보여줬던 ‘백  더 퓨처’라는 영화 기억 나?”
“놀라웠어요. 미래로 넘어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는 장비를 자동차로 만들어서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는 게.”

2020년의 세상에서 백 투 더 퓨처는 이미 고전에 속할 정도로 한참 오래된 영화였지만 영화라는 것 자체를 접해본 경험이 없는 엘리스에겐 최신작이었다. 내가 SF 영화 중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백   퓨처’를 보여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영화 속에 나왔던 많은 것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미래가 되면 그런 최신기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품고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사람들에 의해 영화에 나온 기술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가 현실로 옮겨졌다.
영화 속의 것들을 몇가지 말해보자면 비행 가능한 승용차, 통신기계와 연결된 IOT 기능이 담긴 방범장치, 24시간 시청 가능한 다양한 방송 채널과 여러개의 채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기능을 가진 TV, 음성인식 기능이 첨부된 가전제품과 영상통화 기능, 그리고집에서도 통신장치를 이용해서 간편하게 결제가 가능한 기술 등은 이미 현실에서 이루어져 있거나 상업화를 준비중인 기술들이었다.
30년 전의 영화에 담긴 꿈의 기술들이 현실화된 미래가 바로 현재였다. 이렇게 누군가 상상한 것들을 영상으로 보고 그걸 보고 자란 이들은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공상을 현실로 옮기고자 하는 꿈을 꾸게 된다.
나는 그런 꿈을 가진 이들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꿈을 가지게  이들이 우리의 프로젝트에 도움되길 바라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만화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능력자의 각성과 그런 이능력자들의 존재가 바꿀 세상의 미래에 대한 거야.”
해리포터를 보고 마법사를 꿈꾸던 아이가 마법사가 될 수는 없었으나  세상에선 충분히 가능했다.

그림을 그릴만한 도구와 이를 인쇄할 기계를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세븐시티에 인쇄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배경지식과 함께 인쇄 장비의 설계도가 내게 있었기 때문에 엘레네와  여왕을 통해 드워프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후후후, 일해라. 엘프와 드워프들아! 일해라, 인공지능들.’
“아저씨, 표정 지금 되게 사악해 보였어.”
엘리스에게 순간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았다.

최초의 코믹북 ‘소드 마스터 제이’는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딱히 유희거리가 없던 이곳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아이들은 서로가 소드 마스터 제이와 그와 함께하는 마법사 섀넌을 하겠다면서 싸우고 어쩔 수 없이 악당 험프와 덤프의 역할을 맡은 애들은 이내  번 시늉하는 척하다가 얼른 바꾸자고 떠들곤 했다.
“야, 난 찌질한 덤프 하기 싫다고.”
“소안, 그럼 찌질한 덤프 말고 경비대장 험프해.”
“험프도 싫어. 어차피 제이랑 섀넌한테 발리는 역할이잖아.”
“알았어. 알았어. 10분 뒤에 바꿔줄게. 됐지? 자, 받아라. 소드 마스터 제이의 필살기 오러 붐이다!”
“으윽, 역시 정의의 기사 제이인가? 하지만 내 비열하고 더러운 모래 던지기 맛을 보면 달라질 걸. 에이씨, 이게 뭐야. 하기 싫어. 죽겠네.”
“제대로 해. 제대로. 내눈, 험프, 이 추잡한 자식같으니 어찌 정정당당해야할 승부에 모래를 눈에 던지다니.”
“제가 도와줄게요. 정의의 기사 제이. 모든 것을 치유하라, 힐!”
“그래, 섀넌이 있었군.”


길거리에서 꽤나 그럴듯하게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엘리스가 물어봤다.
“아저씨, 근데  주인공 이름이 제이에요?”
“멋있지 않아?”
“이상하게 아저씨랑 닮은 것 같아.”
엘리스는 이번 최신호로 나온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소드 마스터 제이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멋지게 보여?”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 보는 엘리스의 눈빛이 심히 거슬렸지만 못본 척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만화가 성공하고 나서 목표 연령대를 높여 잡아 어른들을 위해 ‘크로니클:위대한 여정’이라는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적당한 수위 조절과 신나는 액션신 덕분인지 꽤나 절찬리에 판매되는 것 같았다.
“크로니클에 나온다는 ‘후’라는 남자 주인공하고 섀넌은 언제쯤 연인이 되는 건가요?”
“엘리스,  아직 그거 보면 안되는 나이일텐데. 보이지? 책 앞에 적힌 빨간색 문구 ‘18세미만 열람불가’”
“아저씨가 보여줬던 15세이상 관람가 영화들보다 수위로 보면 별로  것도 없던데요, 뭘.”

그 점은 할 말이 없긴 했다. 언젠가부터 15세이상의 영화들에서도 꽤나 수위가 높은 씬들이 담긴 영화들이 있는 편이어서 영화를 보여주다 가끔 뻘쭘한 씬들이 나오곤 했는데 처음엔 엘리스의 눈을 가리곤 했지만나도 옆에 있는데다 엘리스에게도 나이에 맞게 어느 정도 성교육도 필요한 부분이 있어 엘레네의 참관과 이후의 성교육 지도를 엘레네에게 받는 조건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보곤 했다.
“그나저나 섀넌이랑은 언제 이어지냐구요.”
“그게 왜 궁금해?”
“이거 아저씨 이야기같아서요.”

갑자기 정곡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엘리스의 말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게, 그러니까. 이미 둘이 마음이 통하고 사귀는 사이인데?”
“에이, 말도 안돼. 여자는 남자랑 달라서 확실하게 말로 이야기해주길 원한다구요.”
“그걸  굳이 말로 해야 되나?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과 표정, 그리고 서로 간의 분위기와 왜 그런 것들을 통해 눈치로 알게 되잖아.”
“확실하게 말로 표현하기 전까진 그냥 ‘썸’일뿐이죠.”
“키스까지 했는데?”
“키스까지 했구나.”
실실 웃으면서 나도 알건 이제 다 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엘리스에게 난 소설의 이야기라고 둘러쳤다.
“그래 주인공이 히로인이랑 키스까지 했지.”
“아저씨가 그런 걸로 치길 원하면 그렇게 치죠. 소설이라고 치고  인물이 키스까지 해도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다. 연인이다. 이야기하기 전에는 둘은 연인이 아닌 거죠. 부부도 헤어지는 판에 확실하게 증거도 없는 남녀 사이에서 서로의 관계를 확실히 표현하는 순간은 필요해요.”
“그러냐?”
“겉으로 보기에 거칠어 보이는 여자일수록 속에는 말랑한 부분이 있는 거라구요. 진짜 연인이라면 친구처럼 대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내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이 사람이 날 사랑하는 구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라든가 말이 필요한 거죠. 아저씬 여자 마음을 참 모르는  같아. 아저씨 연애 많이 안해봤죠?”

묘하게 엘리스에게 말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처음엔 소설 이야기였는데.’
“아닌데? 많이 해봤는데? 그리고 너도 많이 안해봤잖아.”
“왜 이래요? 요즘 시종들 통해서 나한테 러브레터 보내는 남자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라디오와 만화 그리고 소설에서 엘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켜준 것이 화근이었을까. 엘리스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귀여운 소녀 엘리는 의외로 인기가 많았는데 그 모델이 엘리스라는 것이 어떻게 흘러 나간 것인지 기사 제이님게 보낸다는 팬레터도 적지 않았지만 소녀 엘리스에게 오는 편지들도 많았다.
“요즘 자꾸 밖에 산책한다며 나가는 이유가 그럼?”
“히히, 걔중에 소안, 노타, 누손, 지난, 레우스라는 애들이  괜찮게 생겼더라구요.”
‘엘리스, 너 은근 얼빠구나.’
나는 엘리스가 사람의 외면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인성과 내면을 더 중요시 여기길 바라는 마음에 말을 꺼냈다.
“얼굴만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 사람은 상대방의 내면을 깊게 새기고...”

 말에 지루하단 표정을 한껏 드러낸 엘리스는 사춘기의 아이처럼 반발했다.
“아저씨, 얘들 다 착해요. 아저씨가 얘들 직접 봤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안 봐도 뻔해. 너한테는 착해 보이겠지. 원래 사귀기 전에는  그런 거야. 남자놈들을 항상 조심해야 된다. 만약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내가 가르쳐 준 호신술로 말이야...”
“으으, 아저씨. 방금 말 꼰대같았어.”
“뭐, 내가?”
'내가 꼰대라니? 내가 꼰대라니?'

아직 애도 없고 결혼도 안한 내가 꼰대라니. 그리고 꼰대라는 단어는  언제 주워 배운 거야.
꼰대같다라는 불의의 일격에 얻어맞고 나자 뭐라고 더 말하기가 그랬다. 꼰대가 아니라면서 엘리스와 맞네 아니네 하는 것도 그렇지만 꼰대라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난 꼰대도 아니었으니까.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저씨나 아저씨 연애  좀 해봐요.”
‘야, 하고 싶어도 지금  수가 없는데...’
엘리스는 하던 대화를 마치고 오늘은 누손과 만나기로 했다며 자리를 떠났다.
“나도 섀넌 만나러 가고 싶다.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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