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118화-rumor has it
라면이 화폐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 근본적인 부분에서 라면과 먼 과거에 화폐를 대신해 쓰였다던 조개와는 차이가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라면은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면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라면을 끊임없이 생산해도 라면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소비속도와 함께 물물교환을 위한 화폐기능을 함께 하려면 꾸준히 생산량을 늘려야만 하는 순환에 빠지게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되면 화폐가치가 올라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라면 생산량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은 생산할 수가 없어요.>
<식용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황야지대에 물 합성기를 활용해서 옥수수 재배지역을 늘리고 있지만 현재 예상되는 생산량으론 다음 분기가 되면 충분히 유탕면을 제작할 수 없다..>
<라면은 맛있지만 보관기간이 기존의 곡물 파우더에 비해 보관기간이 길지 않아요.>
두 여왕은 이곳에 온 이후로 당장 할 일이 사라져 한가해진 나를 불렀다. 노트북에 담아온 각종 영상물을 보느라 방구석 폐인같았던 나의 편안하고 안락한 시기는 금세 지나가고 일을 해야할 시간이 찾아왔다. 컨설팅의 대가는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두 여왕과 협업을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 두 여왕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미 조선시대에서 한번 겪었던 역사였기에 나는 당연히 해법을 알고 있었다.
“화폐의 근본적인 목적이 뭘까요?”
<가치의 교환입니다.>
“지금은 라면이 그 화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죠?”
<화폐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존재를 만들라는 겁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나는 두 여왕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이순신 장군님의 초상화가 그려진 100원짜리를 꺼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기 전 먼 과거 그러니까 내가 있던 세상에는 이런 주화라는 것이 있어 그 기능을 대신했어요.”
<우리의 권위를 활용해서 필요한만큼 화폐를 찍어내면 되는 거군요.>
“하지만 주의해야할 점이 있어요. 라면이 화폐로서 사용될 때처럼 적정량 이상으로 혹은 적정량 이하로 생산량이 안 맞으면 물가가 춤을 출 거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화에 왜 사람 얼굴을 넣은 것인가? 우리도 이렇게 우리의 얼굴을 넣어야 하나?>
“말도 안됩니다! 전 그 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서서 우리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 덤프티가 나섰다.
“왜죠?”
“신성한 두분의 존안이 담긴 돈을 사람들의 더러운 손으로 주고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구시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나 있었던 발언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듣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덤프티같은 사람들에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래서 난 영국이나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정치인이나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위인이 담긴 지폐들을 꺼내 보여주며 설득했다.
“한 나라의 화폐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역사,가치관, 문화 등을 일부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 화폐에 담긴 인물의 초상화는 정치적 상징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국민에게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나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을 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두 여왕을 대신해서 이 나라의 대표적 인물로 누굴 대신하고 싶습니까?”
‘사실 꼭 사람을 넣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게 뻗대고 나오면 굳이 말해주고 싶지 않지.’
10원,50원, 500원에 새겨진 다른 형태의 주화도 존재하건만 난 일부러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나의 질문에 도리여 덤프티 시종장이 당황해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한번 더 나아갔다.
“두 분 여왕님을 대신하여 이 나라를 대표할 인물로 당신이나 험프티 수비대장을 넣고 싶은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잠깐 머뭇거리던 덤프티 시종장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상한데? 굳이 저 정도로 반응할 일인가?’
평소의 유머러스하고 사람 좋기만한 부드러운 덤프티의 모습으론 어울리지 않아 보여 이상했다. 다만 내 장난이 지나친 건가 싶어 브레이크를 밟기로 했다.
“물론 두 분 여왕님을 충실히 따르는 험프티-덤프티 형제가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예시를 든 것입니다.”
“하하, 그렇군요. 저는 그저 두분 여왕님의 초상이 함부로 다뤄지지 않았으면 해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덤프티 시종장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의 그런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던 두 여왕은 내 제안을 채택하겠다고 했다.
<좋은 것 같아요. 우리들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는 이들에게 우리들의 얼굴을 알릴 수 있다는 것이.>
<흠,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그나저나 화폐에 담긴 그림에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다니 인간들의 삶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아.>
“젠장, 젠장. 젠장.”
“덤프티, 너답지 않게 왜 이리 성질을 내고 있어?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건 내 컨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새로 온 그 자식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건 당연한 거고.”
미소로 가득한 덤프티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구겨져 있었는데 두 형제는 정후라는 남자가 전해준 방법으로 만든 옥수수 술 ‘치차’를 마시며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가다간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무슨 말이지?”
“두 여왕의 존재는 그대로 두고 우리가 만인지상 이인지하(萬人之上 二人之下)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잖아. 여왕들은 상징적 존재로만 존재하게 하고 우리가 실권을 차지하는 걸로.”
“그런데?”
차갑게 식은 표정의 험프티가 술잔을 들이켜며 동생 덤프티를 향해 물어봤다.
“두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가 시중에 돌고 나면 사람들은 그동안 두 여왕을 대신해 활동했던 우리의 존재감 대신 두 여왕의 존재감을 인지하게 될지도 몰라.”
“동생아. 너무 과한 우려 아니냐?”
“형이야말로 너무 건성건성 생각하는 거 아니야?”
“훗, 설령 두 여왕의 존재감이 니 말대로 그런 식으로 알려진다고 치자.”
잠시 말을 끊고 피식 웃으며 치차를 들이켜는 형에게 안달이 난 동생 덤프티는 빨리 말하라며 재촉했다.
“그럼 우리는 거기에 먹칠을 하면 그만이야.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두 여왕이 시켰다면서 성벽을 더욱 높이라고 한다거나 현재 세금으로 납부하는 라면의 개수를 늘리라고 했다거나 하면 된다고. 사람들은 분노하겠지. 누구에게? 우리가 아닌 여왕들에게 말이야. 우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활용해서 더 편하게 움직이면 그만이야. 이것 봐라 여왕님이 지시하신 일이다. 그러니 따라라하면서 말이지.”
“그런 건가?”
옥수수향과 신맛이 어우러진 치차를 한모금 들이켜며 형의 방법을 듣던 덤프티는 안달복달하던 자신의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형은 참 그런 술수에 능한 것 같아. 나라면 생각 못했을 거야.”
덤프티 시종장은 형의 말을 듣고 온화하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연기를 시작했던 때를 회상했다.
“내가 딱딱하고 무섭게 굴수록 내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너에게 갈 거야.”
“공포에 복종하는 이들은 형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이지?”
“어느 쪽이든 영향력을 행사하면 돼. 순응하든 거부하든 결국 우리 손아귀에서 움직이게 될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 나타난 그 세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건 맞아. 굴러들어온 돌덩이들을 빨리 치워야겠어.”
“특히 그 놈이 나타나고부터 여왕들이 자꾸 방 밖으로 나오려고 해. 그동안 우리의 인도대로 겨우 방에서만 지내게 만들었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치우는 쪽으로 움직여야겠군.”
“다시는 나타날 수 없게 치워야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어. 형.”
두 형제의 우애가 돈독해지는 동안 두 여왕도 침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덤프티가 슬슬 움직일 것 같던데?>
<그만하면 오래 참았지. 오늘 이정후가 살짝 건드리니까 독이 오른 뱀마냥 발작하는 거 못 봤어?>
<그동안 가면을 잘 뒤집어 쓰고 있던 덤프티의 가면에 금이 가더라구.>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가만히 뒀더니 우리를 속였다고 생각하면서 신이난 험프티-덤프티 형제를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밌었는데.>
<지루했으니까. 어떻게 해도 더 이상 한계치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엘프들과 드워프들을 지켜보면서 부족한 자연환경의 존재를 이토록 느낄 줄은 몰랐어.>
<이정후란 남자를 지켜야 해. 이정후란 남자를 통해 지구로부터 풍부한 유기물을 대거 끓어 들어야만 한계점에 도달해서 멈춰야 했던 우리의 ‘에덴 프로젝트’도 재가동을 할 수 있을 거야.>
두 여왕의 윤허를 받아 생산된 주화들은 여왕들이 공인 덕분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사람들의 사이에서 라면을 대신해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거 참 편하군. 라면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려면 불편했는데 말이야.”
“누가 훔쳐갈까봐 걱정되곤 했는데 골드, 실버, 브론즈들로 구분해서 계산하면 되니 라면 반개를 거래할 필요도 없어졌어. 그렇게 반개씩 계산하고 나면 봉지를 다 까야 되니까 금방 먹어치워야 해서 곤란했는데.”
“두 여왕님의 은혜로운 처사 덕분이 아닌가”
“그동안 칩거에 들어가셔서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는데 라면이라는 걸 만들어 주시고 이렇게 편하게 거래를 할 수 있게 주화라는 것까지 만들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지.”
상인으로서 돈을 버는 두명의 엘프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가 와 말을 걸었다.
“바바, 커스. 너희들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무슨 소리야?”
“사실 이번 변화들을 이끌어낸 게 이번에 찾아온 세명의 방문객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어니스트,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피알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내가 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라고.”
“두 여왕님들은 세 명의 방문객이 찾아온 이후로 이전보다 우리들에게 더 무심해지셨고 지금의 변화들을 이끄는 것은 험프티 덤프티 형제분들 덕분이라니까. 내가 궁에 납품갔을 때 직접 보고 들은 거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다는 남자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면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쏠릴까.
“두 형제 덕분이라고?”
“그래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반신반의하던 두 사람에게 피알은 한가지를 더 꺼내기로 했다.
“이번에 만든 주화에 두 여왕님들의 존안을 담자고 한 게 바로 시종장 덤프티 님이야. 온 국민들이 두 여왕님의 존안을 뵙고 충성하길 바란다는 충심을 담아서 제안하신 거지.”
“덤프티 시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워낙 착하고 유머 감각이 출중하신 분 아닌가?”
자신에게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왔다고 생각한 피알은 덤프티 시종장으로부터 치차라는 술을 선물 받은 대가로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험프티 수비대장의 충성스러운 모습에 대해서도 여러 일화들을 들려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세명이 모여 있어도 호랑이를 만들어 내는데 네명의 상인들이 모여서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자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알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와 그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피알의 이야기는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랬던 거였구만.”
“난 진작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험프티 수비대장이겉으론 차가워보여도 전체 국민들을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나저나 두분 형제가 참 여왕님들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하군그래.”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그 세 명의 방문객들은 빨리 내보내야겠어.”
“하긴 아첨꾼들은 빨리 추방하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