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113화-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과의 조우(1)
엘레네는 엘리스의 엄마이자 교육자로서 하루에 8시간 정도씩 차 안이든 쉬는 시간이든 커리큘럼을 진행시켰다.
“아저씨가 조금만 줄여달라고 하면 안돼?”
“그건 아저씨도 해줄 수가 없는 요구 같은데?”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엘리스는 머리는 뛰어났지만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류의 최초의 리더라는 운명으로 태어난 엘리스는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야 한다는 것이 엘레네의 지론이었다.
“마더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해야 하는 것부터 마치고 하라면서 노는 건 할 것 다하고 하라고 한단 말이야.”
“맞는 말같은데.”
“힝, 내 편은 없어. 왜 공부는 꼭 해야 하는 거야?”
<엘리스, 저라면 지금 이렇게 불평할 시간에 학습을 마쳤을 것 같은데요. 얼마 안 남았잖아요.>
여행지까지 학습지를 들고 온 엄마와 여행을 와서까지 공부를 해야 하냐는 딸의 대화를 보는 것 같았지만 엘리스가배우는 내용은 대학 학부생 수준이라 운전하고 있는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길에서 달리는 시간동안 공부해놓고 쉴 때 마음 놓고 쉬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이성적 설득을 시도하는 엘레네의 말이 정답이었지만 어디 사람의 마음이 이론대로 흘러가겠는가.
“오늘은 한시간만 일찍 끝내주는 건 어때?”
<그건 정후님이라도 관여하실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나와 함께 다른 특별한 체험활동으로 대신하는 건 어떨까?”
<특별한 체험활동이 어떤 내용인지를 듣고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뒷좌석을 돌아보니 엘리스도 VR교육을 위한 전용 안경을 벗고 기대감에 차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설에 있을 때는 따로 체육활동도 하고 운동하면서 관리를 했는데 지금은 차에만 타서 이동하느라 그럴 수가 없었잖아.”
<네, 그로 인해 체육시간이 다른 교육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애들이건 어른이건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땀을 흘리면서 배출해줘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건강에 이로우니까 오늘부터 매일 그 체육시간을 나랑 같이 체술과 검술 훈련으로 대신하는 건 어떨까?”
12살의 여자아이치곤 꽤나 건강한 육체를 지닌 듯 보였지만 이곳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자신의 육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호신술 정도는 익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설명을 들은 엘레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우선 오늘 하는 활동을 지켜보고 최종판단을 내리겠다고 결정을 유보했다.
“와아, 그럼 나 이제 러닝 시스템 꺼도 되는 거지?”
<그렇게 하세요, 엘리스>
“고마워, 마더. 고마워. 아저씨.”
하지만 엘리스의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저씨, 미워.”
“뭐든 기초가 중요한 거야.”
지후나 나처럼 지겨울 정도로 엘리스에게 기초체력훈련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검술을 배운다는 것은 제대로 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벨 수 있도록 기본동작을 반복숙달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빅터 교관이 가르쳐 준 검술을 처음부터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자,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아저씨, 숫자 세는 법 안 배운 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3번만 더, 3번만 더를 몇 번 더 했는지 알아?”
투덜거리면서도 엘리스는 앞뒤로 오가는 스텝을 반복하며 위에서 아래로 목검을 내리치는 행동을 잘 반복했다.
“엘리스 체력이 좋구나. 엄청 잘 따라하는 걸?”
“칭찬하면서 계속 시켜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다 알아!”
‘안 통하네.’
트레이너들이 어째서 트레이니들의 옆에서 자꾸 자극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를 외치는 이유를 잘 알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성과를 키울 수 있는 게 보이니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개인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영역을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운동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부족했던 체육활동을 대체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혼자서도 쉽게 펼칠 수 있게 컴프레셔를 활용해서 펼 수 있는 독일군의에어텐트를 카피해서 자체 제작해놓은 야전텐트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이는 걸 보면 뭐든 준비해서 나쁠 일은 아니었다.
해가 지고나면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온도의 변화를 막아 주기에 우리에겐 쾌적한 환경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야외 운동 도구였다.
운동을 마치고 나면 텐트를 걷고 트레일러로 돌아가 저녁 식사를 한 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잠을 잔 뒤 이동하고 쉬기를 반복했다.
“지루하긴 하네.”
오토크루즈 기능이 있어서 수시로 페달을 밟느라 다리가 피로해질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도로가 아닌 곳을 달리는 것이기에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어 눈을 감고 자면서 달리는 자동주행을 할 수는 없었다.
<정후님, 제게 운전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멍하니 앞을 쳐다 보며 가고 있는데 옆에서 엘레네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해왔다.
“엘레네, 운전할 줄 몰라?”
<프로그램 상으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진행하면 되는지 알고는 있는데 막상 이 육체로 운전을 해본 적은 없어서요.>
인공지능인데 이론적인 것은 모두 알고 있기에 패스하고 바로 실전으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엘레네를 운전면허 학원에서 보내서 실기 수업을 할 수도 없으니 내가 곧 엘레네의 운전 강사였다. 차를 정차하고 서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자, 오른쪽 페달이 엑셀러레이터고 왼쪽이 브레이크인건 알지? 한번 천천히 출발해볼까?”
처음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엘레네는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차가 주춤주춤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도 가르쳐줄 거지. 아저씨?”
“흠, 엘리스는 나중에 더 나이 먹고. 운전하기엔 아직은 너무 어려.”
도로교통법이 없는 세상이라 가르치려면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었지만 나도 있고 앞으로 운전을 배울 엘레네도 있는데 굳이 아이에게 운전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언제 가르쳐줄 건데?”
“지금보다 더 크면.”
“피이~”
엘리스가 클 때까지 내가 이곳에 같이 있을지 확신이 없는 상황이라 섣불리 몇 살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엘레네의 운전강습을 위해 양해를 구하고 VR 글라스를 쓰고 공부하라고 했다.
‘부모님들이 난처하면 애들한테 왜 들어가서 공부나 하라고 하는지 알 것도 같네.’
딱히 지켜야 할 신호등이나 정지선, 중앙선이 없어서인지 엘레네는 어렵지 않게 곧잘 운전을 했다. 부부간 혹은 부모 자식 사이처럼 가까운 사이에서 운전을 가르쳐주면 다투기가 쉽다고 하는데 엘레네는 워낙 빨리 습득해서 부드럽게 운전을 하고 있어 내가 뭐라고 딱히 지적해줄 부분도 없었다.
“잘하네, 엘레네.”
<잘하는 겁니까?>
“첫 운전이라서가 아니라 크고 작은 바위도 잘 피하고 혹시나 푹 파인 곳이 있는지도 잘 체크하고 가고 있잖아. 초보운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운전하는 사람도 이렇게 계속 주의집중하면서 잘 달리지 못하는데 엘레네는 그런 문제가 없고.”
그날 이후로 우리는 운전을 서로 번갈아가며 했는데 그렇게 계속 달리자 마침내 우리의 눈앞에 인공적인 건축물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대홍수가 일어나기 이전에 엘프들은 엘븐하임이나 다른 마을처럼 높은 나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막상 눈으로 지켜본 초고대의 엘프 거주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근데 이거 이렇게 갑자기 우리가 보이면 저쪽에서 공격하거나 적대적으로 나오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내뒀습니다. 며칠 뒤 인간의 지도자와 함께 제가 방문하겠다고.>
엘레네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된 하얀 여왕의 존재가 과연 내가 눈으로 본 모습과 같을까 붉은 여왕은 또 어떤 모습일까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지 하면서 계속 나아가고 있는데 마침내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엘븐하임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성벽 아닌가?’
내가 이곳에 오기 이전의 시간대에서 봤던 엘븐하임을 둘러싼 성벽이 시간이 많이 흘러 색이 바래고 오랜 세월을 겪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성벽은 건축된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지꽤나 깔끔하고 새것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성벽의 입구에는 엘프들이 아니라 엘프와 드워프가 함께 서 있었다. 우리의 차가 계속 성벽 근처로 다가가자 경비를 서고 있는 엘프와 드워프가 소리쳤다.
“정지! 정지!”
“정체를 밝히십시오!”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을 만나러 온 인류의 지도자 그리고 마더와 보호자다.>
엘레네가 차 문을 열고 어떤 징표를 보이자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경례를 크게 외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예전 부대 위병소에서 근무를 섰던 내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된 건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한 드워프가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며 안으로 뭐라고 소리치자 낙타와 비슷한 동물을 타고 엘프가 나타났다.
‘위병소장인가?’
“절 따라 오시면 됩니다.”
차를 타고서천천히 낙타를 탄 엘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성벽 안에는 엘프와 드워프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는지 길거리에는 엘프와 드워프들이 우리의 차를 뚫어지게 쳐다 봤다.
‘셀럽이 된 기분이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며 가고 있으니 엘리스는 뒤에 앉아 연신 주변을 돌아보기 바빴다.
“와아, 아저씨, 여기 사람들 엄청 많아요.”
처음 보는 사람들의 무리와 새로운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엘리스에게 엘레네가 충고 하나를 했다.
<엘리스, 당신은 앞으로 만날 엘프들과 드워프들의 지도자와 동격의 존재입니다. 예전에 가르쳐준 예법대로 행동하세요. 앞으로 태어날 인류의 첫인상은 당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알았어. 마더.”
엘리스와 별반 차이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도 엘레네의 말에 체통을 지키고자 근엄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나저나 원래 엘븐하임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숲과 나무가 이곳저곳 가득했던 엘븐하임의 모습과 다르게 지금 내가 보는 엘븐하임은 성벽을 뺀 모든 부분에서 달랐다. 기계로 된 설비들이 여기저기 있고 마치 정유공장처럼 플랜트 시설 설비같은 것도 보였으며 숲의 왕국이었던 느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공단에 온 것같은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공장들은 뭔가를 만들어내는지 굴뚝에선 흰 연기들이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자연적 소재로 된 소재가 아니라 인공적인 질감의 익숙한 소재로 보였다.
“저거, 면이 아닌 건가?”
<고분자 화합물질로 물과 바람 같은 주변 환경에 저항성이 높은 소재로 열에 취약하여 연소 시 녹으며 변형이 일어나는 소재입니다. 의류 이외에도 플라스틱병, 필름, 필터같은 용도로도 사용되는 물질이죠.>
“폴리에스테르?”
<예전엔 그렇게도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보이는 하나 하나가 다른 이곳이 엘븐하임이 맞는지 의문이 커져갈 때쯤 우리는 피라미드 형태의 인공건축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지금 타고 계신 탈것에서 내려주셔서 이동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우리를 데려온 엘프도 낙타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던 드워프에게 넘기고 우리가 차에서 내리길 기다렸다 내가 차를 인벤토리에 넣는 것을 보고도 별로 놀랍지 않았는지 다시 피라미드의 안쪽으로 데려갔다.
피라미드의 안쪽은 쇠로 되어 있었으나 천장엔 등이 달려있어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꼭 외계인의 우주선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