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112화-별의 사람
내공을 익힌 무림의 고수들 중 내공이 뭉쳐진 단이 존재하듯 마더에겐 굳이 음식물을 섭취해야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가 에너지발생기관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육체와 다른 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우리가 식사를 할 때에도 항상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말은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의미였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마더를 빼놓고 우리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게만 하는 것은 마더가 안드로이드이긴 했으나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한지라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같이 먹자고 하고 엘리스 옆자리에 접시와 포크 그리고 우유를 담은 컵 한잔을 세팅해줬다.
<이게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표현하는 맛입니까?>
엘리스의 옆에 앉아 메이플 시럽을 듬뿍 끼얹어 팬케이크를 연신 먹어치우는 마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더가 어째서 음식물을 먹을 필요가 없는 기체로 활동을 대신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웃음을 가득 품고 신이 난 엘리스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먹는 마더에게 거울을 들이밀 필요도 없었다.
“옆의 엘리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겠지? 지금 마더 표정이 딱 저렇거든.”
“아저씨, 한 장 더!”
<저도 한 장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포크를 하늘로 치켜세우며 엘리스가 4장의 팬케이크를 다 먹고 나서도 한 장을 더 구워달라는 말을 하자 옆에서 똑같은 행동으로 자기도 더 먹고 싶다고 요구하는 두 존재들에게 아침식사로 준비한 팬케이크 믹스가 모두 떨어졌다고 이야기해줬다.
“원래대로면 남을 정도긴 했는데 말이지. 옆에 계신 어느 분이 워낙 잘 드신 덕분에 이젠 없단다. 누가 10장이나 먹어치우는 건 내 계산에 없던 거라서. 그리고 아침부터 너무 많이 먹는 건 안 좋아. 뭐든 적당히가 좋은 법이야.”
“히잉, 그치만...어쩔 수 없네. 그동안 마더도 이런 맛있는 건 못 먹어봤을 테니까. 아저씨 말도 맞고 솔직히 배가 고픈 건 아니기도 하고.”
<제 컨트롤을 벗어나서 계속 입에 저절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엘리스.>
“아냐아냐, 난 마더도 맛있는 거 같이 먹어서 좋아. 이렇게 다 같이 먹는 게 기분 좋을 줄은 몰랐어. 혼자 먹어야 할 땐 몰랐는데”
짠하게 들리는 내용을 담고서도 만면에 미소를 짓고 대화를 나누는 둘은 화기애애한 모녀같이 보였다. 진실은 모녀가 아니라 안드로이드 1개체와 인간 1명이었지만 그래도 트레일러의 아침은 꽤나 훈훈한 느낌이었다.
엘리스의 입가에 묻은 우유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고 양치질을 하라고 했다.
“단 거 먹었으니까 개운하게 이빨 닦아.”
“귀찮은데.”
“어허. 우유도 먹고 단 것도 먹고 그러다 입에서 시궁창 냄새 난다.”
“시궁창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귀찮은 건 귀찮은 거야. 에이 귀찮아.”
엘리스에겐 양육과정에서 뽀뽀를 해주거나 하는 행위들을 통해 충치균을 전달해줄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같은 존재들이 없었기에 마더의 말로는 엘리스의 치아가 썩을 염려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충치가 생기지 않는 것과 청결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 습관을 들이는 중이었다.
‘제대로 안 닦으면 충치가 생기진 않아도 입냄새는 나니까.’
귀찮아라는 말로 노래를 부르는 엘리스가 화장실로 들어가 가르쳐 준대로 양치질을 하는 걸 확인하고 나오자 마더는 어딘가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입술을 쭈욱 내밀곤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난 마더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싶어서 물어봤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닙니다.>
“마더도 입가에 우유 묻었으니까 닦아야겠다.”
내 입술을 가리키며 우유를 마신 흔적이 남았음을 설명해주자 마더는 뭔가 자신이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고개를 돌려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쳇. 인공지능이라고 차별하나.>
“뭐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먹은 흔적들을 모두 개수대에 집어넣고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마더가 자신이 하겠다고 옆에 나란히 섰다.
<정후님,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어젯밤 광란의 음주질주를 한 범인에게서 자백이 나왔다. CCTV가 도처에 존재하고 많은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이었다면 뉴스나 혹은 너튜브 동영상에 올라 잠시잠깐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을 테지만 달빛과 먼지바람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평야의 밤이었기에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됐어, 나도 니가 그렇게 취할 줄은 몰랐으니까.”
<분석결과 안드로이드 기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들어간 유전자에 술에 취약한 유전자가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세제를 묻혀 접시와 포크 그리고 컵에 묻은 이물질들을 닦아내고 옆으로 건네주면 마더는 자연스럽게 물에 헹궈서 착착 선반에 걸쳐 놓았다.
“사람도 처음에 자기 주량을 모르고 마시면 종종 실수를 해. 괜찮아. 누가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혹시 정후님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할지 애매해졌다. 많은 대학 신입생들이 OT나 MT를 가서 자기 주량을 모르고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진탕 취하거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통을 붙잡았던 기억이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러한 기억이 있기는 했다.
“아니? 내가 그랬을 것 같아? 그런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
<경험담 같았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마더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리게 말해. 들리게.”
<청력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맘대로 해라 맘대로. 근데 내가 계속 그쪽을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거든. 마더의 의미가 엄마라는 건데 내 엄마도 아닌 사람에게 계속 마더라고 하는 것도 다 큰 남자 입장에선 이상한데 내가 그쪽을 부를만한 다른 이름은 없어?”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입니다. 교육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고 나서부터 엘리스가 마더라고 불렀고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제 이름은 항상 마더였으니까요. 코드명은 있습니다만.>
“그럼 아직까진 사람들이 사이에서 부르는 이름은 없었다는 거네. 엄마는 이름이 될 수 없으니까.”
“맞아. 마더에겐 이름이 필요해. 마더가 내게 엘리스란 이름을 지어줬던 것처럼 말야. 히히, 근데 둘이 그러고 있으니 꼭 엄마랑 아빠같다.”
어느새 양치질을 마친 엘리스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우리의 뒤에서 나와 마더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마더 이름은 뭘로 하지? 아저씨는 마더 이름은 뭘로 했으면 좋겠어?”
“흠, 마, 마더의 의사가 중요한 건 아닐까?”
“아니야, 아저씨 누가 이름을 자기가 지어. 예전에 아저씨가 있었던 땅에 존재했던 조선이란 나라에나 있던 자호(字號)같은 거면 모를까 이름은 가족이 지어주는 거란 말이야. 아저씨 이름도 아저씨 부모님이 만들어 줬을 거 아니야!”
개명신청을 하면서 부모나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을 후에 바꾸는 개인들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엘리스가 무슨 의도로 이야기하는지는 충분히 내게 전달되었다.
“엘리스는 뭐라고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난 잘 모르겠어. 나한테 마더는 어릴 때부터 마더라서 다른 이름으로 딱히 뭐가 좋은지 떠오르지 않거든. 아저씨도 아저씨 엄마한테 이름을 부르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저씨가 지어 줘야 돼.”
맞는 말이었다. 내게도 엄마는 엄마였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식이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름만 부를 이유는 별로 없었으니까.
“내가?”
“응, 아저씨가 지어 줬으면 좋겠어. 마더도 그렇게 생각하지?”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마더와 함께 화장실에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뭘 이름으로 하면 좋을까를 떠올려 봤지만 작명에 큰 재능이 없는 것 같은 내가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맞는지 내 옆의 안드로이드가 좋다고 생각할지는 의문이었다.
“아저씨, 생각해 봤어?”
“우물우물. 퉤. 조금만 기다려봐. 아무 이름이나 지어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스를 뒤에 두고선 입 안에 가득한 거품을 뱉고 시간을 벌 겸해서 더 칫솔질을 하고 있는데 마더는 양치질을 마쳤는지 수건으로 자신의 입을 닦고 엘리스와 함께 서 있었다.
입안을 헹구고 마더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내 입을 닦고 있는데 무슨 이름이 좋을까 고민하던 내게 번뜩하고 생각이 떠올랐다.
“엘레네Elene 어때? 별의 사람이란 의미야.”
“엘레네? 괜찮은 것 같은데. 나랑 이름도 비슷해. 엘리스. 엘레네. 이름만 들어도 꼭 엄마와 딸같아.”
아저씨치곤 좋은 이름을 꺼냈다면서 엘리스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난 하얀 피부의 금발을 한 안드로이드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엘레네 말씀이십니까?>
“싫어?”
인공지능인 자신에겐 제품명은 있었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이름은 없었는데 막상 자신만 고유하게 부르는 이름이 생긴다는 사실에 엘레네는 로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만족감이 자신에게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적합한 리액션을 떠올려 봤지만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반응이 없었다. 엘레네는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정후에게 엘리스가 자신의 활동형 기체를 향해 고맙다고 표현할 때 종종하던 행위를 따라하기로 결정했다.
“어? 어?”
<감사합니다.>
갑자기 안겨오는 안드로이드, 아니 이제 내가 엘레네라고 이름을 붙여준 그녀에게 당황하고 있는데 뒤에서 엘리스가 그럴 땐 마주 안고서 등을 토닥거려주는 거라고 하며 엘레네의 등 뒤를 자기도 껴안았다.
“아저씨, 정말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네. 이런 것도 일일이 코치해줘야 하고.”
“그런가?”
한참을 셋이서 부둥켜안고 있으니 난 솔직히 머쓱해졌다. 엘리스는 좋아 좋아를 외치며 있었고 안드로이드라는 엘레네에게서 느껴지는 체온은 내가 안고 있는 것이 차디찬 로봇과는 다른 존재임을 어필하고 있었으니까.
“저, 저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순간이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SUV를 꺼내 여행을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았던 엘리스가 자신은 아무래도 넓디넓은 뒷자석이 좋다며 배도 부르고 한숨 자야겠다고 뒤로 가서 누웠고 뒷 좌석에 앉아 있던 엘레네가 조수석에 앉게 된 것이 어제와는 달라진 차 안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옆에 앉아서 가는 거 지루했어. 아저씨.”
“그르냐?”
“근데 내가 찾아본 자료에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자는 건 비매너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졸린 걸 꾹 참았는데 마더가 아니라 엘레네가 내 대신에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 내가 졸아도 되잖아.”
“너무 너만 편한 거 아니야? 엘레네도 편하고 싶을 수 있잖아.”
“엘레네, 나랑 자리 바꾸고 싶어? 거기 불편해?”
<저는 괜찮습니다.>
하얀 피부에 홍조를 한 그녀는 괜찮다며 자신이 안전한 드라이빙을 돕겠다며 이야기했다.
‘엘리스,너 완전 답정너잖아. 그렇게 물어보면 엘레네가 퍽이나 자리 바꾸자고 말 꺼내겠다.’
뒷좌석에 누워 뒹굴거리던 엘리스는 이내 조용해졌고 조금 더 지나자 잠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네도 고생이 많았겠다.”
아무리 인공지능이고 데이터가 있어도 이 허허벌판의 별에서 갓난아이를 저 나이에 혼자 키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엘리스를 보고 있으면 부모님은 없었어도 부모 없이 자라 버르장머리가 없거나 기본적인 예의를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 고생과 노력의 시간들이 대단했으리라.
<아닙니다. 메모리 상에 저장된 양육 프로토콜이 있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제겐 엘리스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축복이었습니다.>
“그래?”
<오히려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자라나는 엘리스를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왜?”
싱글맘의 고생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과 다르게 엘레네의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오늘의 엘리스는 사라지고 언젠가 나이를 먹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인 저보다 한참이나 짧은 수명으로 태어난 인간의 굴레에 갇힌 엘리스를 저 엘프나 드워프로 불리는 일족의 육체가 아니라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게 만든 것이 저의 죄업은 아닌가 했거든요.>
“아니, 엘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엘리스 덕분에 태어나서 고마워할 게 분명해.”
엘레네는 안드로이드였지만 엘리스를 충분히 사랑으로 키운 한 아이의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