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1화 〉111화-따뜻해. (111/239)



〈 111화 〉111화-따뜻해.

4인이 탑승 가능한 오프로드용 SUV를 타고 황량한 대지를 가로 지르며 달리고 있으니 마치 다카르 랠리에 참여한 선수가 된 것만 같았다. 다만 기존의 오프로드용 SUV가 내연기관인 것과 다르게 우리가 타고 있는 차는 전기모터이기 때문에 엔진 특유의 기음이 없어 차 안은 큰 소음이없이 조용했다.

“얼마나 더 가야 돼, 마더?”
<출발하고 어제까지 500km를 달렸으니 앞으로 3853km는  가야 합니다.>
“그럼 며칠을 더 가야 되는 거지?”

조수석에 앉은 엘리스가 손가락을 접으면서 계산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앞으로 약 9일은 더 가야 한다는 거네? 아저씨, 더 빨리 가면 안돼요?”
“응, 안돼.”
마음 같아선 하루에 1000km씩 밟고 싶었지만 전기자동차 특유의 한계인 충전시간과 더불어 황량한 대지 한가운데서 차가 퍼지면 귀찮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급한 것도 없고 해서 하루에 250km씩 천천히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달리는 중간 중간 멈춰서 차의 지붕 위에 있는 태양열 충전기판을 펼쳐놓고 자동차를 정비하기도 하고 로봇인 마더와 다르게 나와 엘리스는 식사를 해야 했기에 트레일러를 꺼내 트레일러 안에서 식사를 해결할 필요도 있었다.

“말했잖아. 며칠 뒤엔 지겨울 수도 있다고.”
“그래도...”

처음 자동차에 타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엘리스는 처음 경험하는 속도감에 살짝 겁먹는 것 같더니 이내 적응하고 여행을 간다는 것에 신이 났었다.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으며 놀이공원을 가듯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중에 딸이 생겨서 놀이공원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었다.

“밖에만 나오면 좋을 줄 알았는데.”
“원래 여행이란 게 가기 전과 시작할 때가 가장 즐겁고 여행을 마칠 때가 제일 아쉬운 법이야.”
“피~ 내가 가봤어야 알죠.”
우리나라였다면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려 화장실도 가고 핫도그나 알감자, 호두과자같은 것을 사서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도로조차 없는 이 세상에 휴게소가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나랑 가는 게 아니었으면 엘리스는 평생 거기에만 있었어야 했을걸.”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면서요.”
“그건 맞지. 근데 이 정도면 아주 호화로운 여행이야.”

엘리스는 트레일러를 가지고 다닐  있는 여행이 얼마나 복받은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화장실도 없는 평야에서 먼지 바람을 맞으며 볼일을 봐야 하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엘리스와 마더를 태우고 달리고 있자니 3명의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풍족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몽골여행이 떠올랐다.

어딜 가든 편의점이든 휴게소든 물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대한민국과 다르게 몽골은 물이 귀했고 마실 물도 없는 판에 씻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친구들과 나는 몽골에서의 여행기간동안 군대 혹한기 훈련을 떠난 것처럼 물티슈로 샤워를 대신해야 했고 준비해간 물이 필요 없는 워터리스 샴푸도 나중엔 많이 남질 않아 3일에 한번씩 머리를 감는 걸로 합의를 보고 아껴 써야 했다.
나도 모르게 그때를 떠올리며 우리가 얼마나 풍족하고 편안한 여행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엘리스에게 ‘라떼는 말이야.’를 뱉을 뻔했으나 말하기 직전 이를 자각하고 겨우 멈출  있었다.

밤이 찾아오면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을 무작정 나아가기엔 문제가 있어 우리는 자동차를 세우고 트레일러를 꺼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후우, 밤에도 계속 달릴 수 있으면 들어가는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긴 한데.”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달리는 것은 위험성을 증가시킵니다.>
“그건 맞아.”

이 행성의 현재 상태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데도 무작정 익스퍼트 상급의 육체적 능력과 내 능력에 기대서 달리는  사고 발생율을 높일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죽을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차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어린 엘리스가 있었기에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인공지능 마더에게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엘프들의 일족이 살고 있다는 곳을 향해 떠날  있었던 거였고.

“넌 어떻게 내비게이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거야? 여기에 인공위성이라도  있나?”
아직은 어린 엘리스가 저녁을 먹고 지쳐 나와 마더보다 일찍 잠이 들면 처음 우리에겐 정적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 어서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나는 하나의 정보라도 더 확보해야 했기에 내가 먼저 마더에게 질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공위성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긴 합니다.>
“무슨 말이지?”
<지구로부터 마지막 생존 인류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타고  모선이 이 화성 위에 떠 있으니까요.>
“그럼 너와 엘리스도 그곳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나? 어차피 둘뿐이라면.”
<모선에 있던 생명유지 장치에 핵심이 되는 부분이 파괴되어 모선 내의 자원만으론 이를 복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화성에서 테라포밍을 위해 진행 중이던 기존의 프로젝트가 있어 해당 시설을 활용할 방법을 모색한 결과 모선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그리고 엘리스는 화성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
“화성의 아이라고?”
<지구를 떠난 생존 인류는 이곳으로 오면서 모선에 당시 남아 있던 모든 생존자들의 유전자를 모아 유전자 풀을 만들었습니다.  중에서 가장 월등한 유전자들만을 취합하고 유전적인 결함이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제거한 결과 최상의 결과물이 탄생했습니다.>
“그게 엘리스다?”
<네, 앞으로 인류를 재건하는데 있어서 강건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을 가진 기준점이 필요했으니까요. 예전의 신화대로면 인류의 시작이 되는 엄마가 될 존재입니다. 태명은 가이아였죠.>
“엘리스는 그럼 인간처럼 태어나 자란 평범한 사람이란 소리지?”
<인공자궁 안에서 일반적인 인간처럼 10달의 시간을 지나 태어났습니다. 물어보신 의도가 처음부터 성체로 만들어지는 클론이냐고 묻는 것이라면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엘리스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한 존재가 아닙니다.>

닫혀있는 문에 달린 창을 통해 침대칸에서 자고있는 엘리스의천사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지금까지 엘리스는 내가 너말고 만난 최초의 타인이란 건가?”
<맞습니다.>

갈증이 생겨 트레일러 안에 있는 냉장고에 차게 식혀둔 맥주를 꺼내 깠다.
“휴우.”
<인간들이 마시는 발암물질인 알코올이라는 겁니까?>
“뭐, 그렇게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나도 어릴 땐 어른들이 이런 쌉싸름한 음료를 뭐하러 마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너도 한번 마셔보면 다를 텐데 아쉽네.”
어딘가 섀넌의 외모와 닮은 마더를 보고 있으면 내 안에 많은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마셔보면 다른 겁니까?>
“세상엔 경험하지 않고 보기만 해선  수 없는 것들이 있거든.”

상상만 하고 현실로 옮겼을  실현하고 나면 생각과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세븐시티에서 보낸 시간들은 많은 의외적 상황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저도 한번 마셔봐도 괜찮겠습니까?>
“어? 그래도 돼?”
<저도 한번 마셔보고 싶습니다.>

로봇인데 이런 거 마셔도 되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마더가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다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긴 한데. 로봇인데 이런 걸 마실 수 있나?”
<뭔가 착각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걸?”
<당신이 생각하고 계신 것과 다르게  육체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로봇이 아닙니다.>
“무슨?”
<이 육체는 기본 골격은 기계적인 형태로 당신이 이전에 보았던 제 활동형 모델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장기와 이 겉의 피부는 인간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터미네이터에나 나오던 ‘T-800’같은 걸 말하는 건가?”
<제 인공지능에 저장된 데이터에 따르면 비슷합니다.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고 소화하는 기능이 구현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엘리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굳이 현재의 육체로 활동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 하에 기지 내에서 봤던 활동형 모델로만 움직였던 겁니다.>
“혹시 너도  많이 마시면 취해?”
<이론상으론 인간들이 취하는 것처럼 취하진 않을 겁니다만 알코올을 구할 수 없어 실제로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이거 마셔도 일단 작동이 멈춘다든가 하는 문제는 없다는 거지?”
<그건 확실합니다.>
맥주를 건네주며 접촉한 마더의 손은 분명히 인간의 육체처럼 온기가 있는지 따스했다. 그 동안에는 알게 모르게 무의식적인 거부감같은 것이 있어 마더와 육체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없어 몰랐는데 마더의 육체는 분명 인간의 육체와 비슷했다.

“안 취한다메. 안 취한다메!”
 캔을 마셨을 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던 마더는 두캔을 마시자 서서히 얼굴이 발그레해지기 시작했고 세 캔이 되었을 때 혀가 풀리기 시작했다.
<으흐, 이른 게 취한다능 검니까?>
“취한 거 맞는  같은데.”
<이걸 마시니 기분이 조크든요. 하나 더 줘 보세요.>
“너  풀렸어 지금.”
<저한테 주기가 그렇게 아까운겁니까?>
마더의 눈은 분명히 게슴츠레 한 것이 풀려 있었다. 하나 더 꺼내서 마시겠다고 냉장고 문을 열길래 이대로  취하게 둬선 안될 것 같아 더 못 마시게 하려고 냉장고 문에 올린 마더의 손을 잡고 떼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뭔 힘이 이렇게 세.’
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내 힘으로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술 마시다 이게  꼬라지인가 싶어 현타가 오려고 할 즈음 마더는 섀넌과 닮은 얼굴로 피식 웃더니 힘을 빼곤 냉장고에서 손을 뗐다.
“그래, 안 마시기로 한 건 잘했어.”
<내가 취할까봐 겁나요?>
“어? 아니 겁은  나는데 걱정이 되네.”
<걱정해주는 건가요?>

발그레한 얼굴의 마더는 이상하게 덥다면서 트레일러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이게 뭔?”
화성에서의 밤은 차가웠다. 공기 중에 수분이 부족해서인지 지표면의 온도는 밤이 되고 태양이 사라지면 빠르게 식었는데 춥기가 강원도 인제에서 혹한기 훈련을 받던 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추워졌다.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나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왜 나가는데!”
혹시나 엘리스가자는데 추울까봐 트레일러 밖으로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문을 닫고 마더가 어디로 뛰쳐나갔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언제 저기까지 간거야.”
서둘러 마더를 잡기 위해 쫓아가고 있는데 어찌나 잘 뛰는지 쉽게 따라잡히지도 않았다.
<아~ 시원해~>
“야발, 술 마시고 그냥 자려고 하다가 이게 뭔 상황이냐.”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마더를 한참을 쫓아가서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아니 제압할 수 있었다.
“잡았다! 허억허억.”
<잡혔네~>
“허억,허억. 어디까지 가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많이 취했네.”
<안취해꺼든뇨?>

게슴츠레한 눈의 마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대며 버둥거리다 멈추고 땅바닥에 누운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는데 반팔을 입고 쫓아 나와 추운 날씨에 노출된 탓인지 이상하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트레일러로 빨리 돌아가자. 너도 이제 안 덥지?”
<그런 것 같기도?>

버둥거리던 움직임을 멈춘 마더의 손을 잡고 일으키자 마더는 비틀거렸다.
“혼자 갈 수 있지?”
<흐음, 땅이  흔들립니다.>
“아냐, 니 몸이 흔들리고 있어.”
<동의할  업쑵니다.>
트레일러로 돌아가기 전에 얼어죽을  같아 비틀거리는 마더의 앞에 살짝 굽혀 업히라고 했다.
“업혀. 빨리 뛰어가게.”
<어펴?>
“추워. 빨리.”
잠시 머뭇거리던 마더는  등에 몸을 실었다.
“자, 뛰어간다.”
<달려~>

한참 뛰어가고 있자니 추운 대기와 몸에서 나는 열기가 만나 정후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따뜻해.>
“뭐라고?”
<가랏!>
“내가 니 주머니 몬스터냐.”
트레일러 가까이 오자 말을 타듯 이랴이랴 거리며 흔들대는 마더를 겨우 트레일러 안으로 짐짝 던지듯 집어넣고 나도 바닥에 널부러졌다.
“이게 야밤에 뭔 꼴이야. 허억.허억. 술 마시다 길바닥에서 얼어 뒤질뻔했네.”
<히히히>
술에 취해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마더와 헐떡거리는 내가 트레일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침대칸에서  자고 있던 엘리스가 문을 열고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저씨?  빼고 둘이서 재밌는 거 했지? 나도 끼워 줘.”
“그렇게 보여?”
“응.”
“아니니까 들어가서 자라. 잘 시간에 자야 키가 커요.”
“히잉.”
“어허, 내일  가려면 지금 잘 자야지.”

엘리스를 자라며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오자 바닥에 널브러져서 잠이 든 마더를 보고 있으니  귀찮아지는 것 같았다.
“마더가 엘리스에게 술을 가르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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