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0화 〉110화. 소녀 엘리스와의 식사. (110/239)



〈 110화 〉110화. 소녀 엘리스와의 식사.

눈이 동그랗게 될 정도로 깜짝 놀라며 고기 맛을 본 엘리스는 그날부터 식사시간이 되면 내 옆에 다가와 주변을 서성거렸다. 12살 먹은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빤히 알  있었지만 장난기가 발동해서 괜히 모른척하고 자동차 정비를 계속하며 물어봤다.
“어? 엘리스, 지금 수업 받을 시간 아니야?”
“오늘은 제가 너무너무 수업을 잘 받아서 마더가 수업을 일찍 끝내줬어요.”
“그래?”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이곳을 떠나 엘프들과 드워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자동차를 정비하고 있으니 엘리스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지 않았다.

“왜? 엘리스, 할 말 있니?”
“아니요. 근데 아저씨 바빠요?”
“글쎄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는걸.”
“그렇구나.”
다행히 차 아래에 누워 정비를 하고 있었기에 엘리스는 웃음 가득한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사실 정비는 이미 다 끝난 상황이라 대충 뭔가를 하는 시늉만 하면서 엘리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데 엘리스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내가 뭘 하는지 쳐다봤다.
“아저씨, 다 끝났죠? 다 끝났는데 일부러  끝난 척 하는 거죠.”
“아닌데?”
“에이, 아니잖아요.”
“엘리스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내가 엘리스한테 뭐 잘못한 게 있나?”
“그, 그건...”
더 장난치면 엘리스가 울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엘리스,  배고픈데 우리 점심이나 먹을까?”
“진짜요?”
“응, 오늘 점심은 LA 갈비야.”
“그게 뭐에요?”

어머니의 비전을 이어받아 특제비법 양념을 활용한 우리 집만의 LA 갈비는 먹어본 사람들은 백이면 백 극찬을 할 정도였는데 엘리스에겐 아직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저번에 먹었던 고추장에 찍어먹는 삼겹살이라는 게 맛있었는데. 피이”
“그것도 맛있지만 이건 또 다른 차원의 맛이야.”
“아저씨, 내가 뭐 도와줄까요?”
“차 정비하느라 먼지가 묻었으니까 음식하기 전에   씻고.”
“그래요, 그럼.”

당장 먹을 수 있을  같다가  미뤄지자 엘리스의 시무룩해지는 표정이 귀여웠다.
“조금만 기다려.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랬어.”
“시장이 반찬?”
“배고프면 뭘 먹어도 맛있다는 말이야.”
“치, 내가 평소에 먹던 프로틴 쉐이크는 배고파서 먹어도 맛있지 않았거든요?”
“그으래?”
“네, 아저씨. 그러니까 빨리 씻고 점심 해줘요.”
샤워실로 가는 내 등을 떠미는 엘리스와 장난치고 있으니 나중에 섀넌과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상상에 빠졌다.

후딱 샤워를 하고 나오자 엘리스는 자신이 할  있는 밑준비를 다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됐나요~ 엘리스 어린이?”
“준비 됐어요~”

원래대로의 대한민국의 12세의 아이였다면 지금같은 반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순수 그 자체인 엘리스는 유치원 아이들도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반응을  보여줬다.
“손은 씻었나요?”
“네~”

 기다리게 했다간 엘리스 입에서 침이 폭포수처럼 흐를 것만 같아 전기그릴의 온도를 올리고 LA 갈비를 굽기 시작했다. 고기와 간장 소스가 가열되면서 나는 냄새의 자극에 엘리스는 옆에 서서 침을 꼴깍 꼴깍 삼켰다. 이윽고 고기가 다 구워지자 채소와 함께 먹으라고 쌈을 싸자 자연스럽게 엘리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는데 이러지 말아야지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동해 엘리스의 입으로 넣어주려다 내 입으로 넣으려고 하자 엘리스는 삐지려고 하면서도 내게서 쌈을 빼앗아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 먹어 봐.”
“우물우물.”

엘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미소가 만면에 가득해지는 이 순간은 엘리스에게 내가 새로운 음식을 먹여줄 때마다 만족감을 크게 주는 순간이었다.
“쌈 싸먹는 건 어떻게 하는지 알지? 아저씨가 고기 구워서 여기다 놓을 테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된다.”
“아라써요.”
입을 가득채우고 있는 쌈때문인지 볼을 가득 부풀리고 대답하는 엘리스의 모습이 귀여웠다.

폭풍같은 점심 식사가 끝나고 엘리스는 식곤증이 찾아오는지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면서도 점차 고개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조는 엘리스가 안쓰러워 공주님처럼 안아 주자 엘리스는 편하게 눈을 감고 제대로 자기 시작했는데 엘리스를 침실에 조심히 내려두고 나오자 마더의 로봇이 문 앞에  있었다.
“무슨 할 말 있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솔직하게 답해줬다.
“그래, 난  일이 있으니까. 여기에만 있어선 외부의 정보를 얻기도 어렵고.”

뼈아픈 지적이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 한두번 오고 말것이라면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면서 봉사활동을 하면 듣던 이야기였는데 엘리스와 지내는 시간이 즐거워 깜빡 잊고 있었다.

27살의 나이에 화성으로 넘어와 10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선 공식적으로 28살의 나이밖에 되지 않은 나는 시간의 괴리감도 시간의 괴리감이었지만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는 상상을 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엘리스를 나는  딸처럼 친근감이 들어 편하게 대했는데 엘리스도 사람을 만나는 게 처음인지라 처음에는 경계심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내가 자신을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금방 느끼곤 사람이 그리웠는지 조잘조잘대며 자신의 어릴적부터 시작해서 요즘에 배우는 것은 무엇인지 사소한 것까지 다 이야기하곤 했다.
“그 점은 미안하군, 어른이라면 내가 먼저 생각하고 조심했어야 했는데.”

차갑디 차가운 철제 재질의 로봇이 모성애를 가졌을 리는 없었지만 엘리스를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엘리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마더’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날부터 떠나기 전에 엘리스에게서 차근차근 정을 떼려고 했지만 엘리스와 있는 시간동안 엘리스를 생각해 차갑게 대한다는 것이 솔직히 쉽지 않았다. 영특한 엘리스도 내가 떠나려 한다는  오래지 않아 눈치챘다.
“아저씨, 이제 떠나려고 나랑 안 놀아주는 거죠?”
“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답해 줘야 할지 몰라 어물쩍거리고 있는데 엘리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나도 아저씨 따라갈래요.”
“뭐?”

마더와도 이야기가 된 것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로봇을 쳐다봤지만 표정이 없는 로봇이 어떤 생각을 가진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마더, 마더 말도 맞는데 나중에 많은 사람들을 내가 도와서 이끌어 주려면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능숙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이곳에만 있어선 마더가 가르쳐준 사회성이라든가 리더십같은 걸 배울 수가 없잖아.”

“어떻게 가르쳐주지? 아저씨 말론 세상엔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해봐야 배울  있는 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그랬어. 아저씨가 요리해주는  가르쳐주는 것도 마더가 제공하는 에듀케이션 툴로만 배워선 익힐  없는 것이었는걸. 요리만 해도 직접 자르고 다지고 굽고 튀기고 볶아 봐야 배울 수 있는 거였어.”

“난 그럼 언제쯤 세상 밖에 나갈  있는 건데? 20살? 30살? 50살? 죽기 전에? 평생 죽을 때까지 혼자 ‘홈’에만 있어야 하나?”

조잘거리면서 간혹 나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엘리스에게 과거의 일화들을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엘리스에겐 그 이야기들이 크게 다가온 것 같다.
꼭 모녀가 싸우는 곳에 끼어든 아버지마냥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일부분 나로 인해 초래된 상황이기에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한참 설전을 하던 둘에게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리한 생각을 전했다.
“그러지 말고 둘다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필요한 짐은  인벤토리에 넣어 가면 되는데?”

익스퍼트 상급의 능력에 오르고 적어도 나와 누군가 한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충분히 몸만은 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도망간다면 나와 엘리스가 위험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섰다.
엘리스는 그건 생각 못했는지 잠깐 생각에 잠겼고 마더도 잠시 움직임이 없더니 이내 내게 질문을 연신 해왔다.

“흠, 둘만 먹는 거면 한 50년은 될까?”

“이 정도면 될까? 우리가 타고 가는 자동차도 있고.”
익스퍼트 상급이 되면서 내가 가진 능력의 증폭효과로 인해 잠깐이나마 가능해진 ‘오러’를 보여주자 마더의 의견이 급격히 기우는 것 같았다.

“그럼.”
정비중인 자동차 옆에 꺼낸 트레일러가 사실상 마침표였던 것 같다.

이렇게 되자 누구보다 좋아한 것은 엘리스였다.
“마더, 가자. 마더도 충전장비만 아저씨 인벤토리에 담아달라고 하고 따라가면 되잖아. 가자.”
조를 때 보면 아이가 따로 없는 엘리스를 지켜보던 마더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어설프게 출발하는 것보다 모든 것에 만전을 기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겠지. 편한 대로 해.”
인공지능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알고 있는 나도 ‘마더’의 합류가 싫을 이유가 없었다.

“와, 여행 간다! 나도 여행 간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맨날 디지털 북으로만 보던 여행을 나도 간다는데.”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수 있어.”

맨 처음 더스트에서 크로니클 단원들과 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내 느낀 지루함을 떠올리고 말해봤지만 한껏 기대감에 부푼 엘리스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  같았다.

며칠이 지나자 엘리스가 마더의 준비가 끝났다며 출발준비를 마치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왜 마더가 직접 안 오고?”
“마더를 보면 깜짝 놀랄 걸요?”
엘리스의 말대로 난 놀라지 않을  없었다. 터미네이터처럼 스켈레톤마냥 골격만 존재하던 마더에게 피부가 생겼으니까. 하지만 진짜 놀란 이유는 피부가 생겼다는 것보다 다른 이유였다.
“그 모습은?”
“이쁘죠?”

무표정하게  있는 마더의 모습은 내가 봤던 엘프 여왕과 섀넌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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