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08화-번뇌(煩惱)
섀넌과 좀 더 교감을 나누고 싶었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나 적었다.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 없이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싫었다.
“아, 정말 안 가고 싶다. 안 가고 싶어.”
섀넌과 다른 크로니클 단원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는 엘프들과 엘프들의 성인식을 구경하러 온 인간들에 의해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껏 생기를 자랑하듯 싱그러운 나무들과 오늘따라 어찌나 쾌청한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이제 몇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나를 우울하게 했다.
“엘프들이 엄청 많네.”
“집안에 성인식을 하는 엘프들이 있다는 건 100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집안의 아이들을 잘 키워냈다는 자랑이기도 하니까요. 집안에 성인식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가문의 영예가 높아져요.”
<이런 관습은 아무래도 후손을 많이 낳지 않는 엘프들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넌 다물어, 사기꾼.”
아직 엘리스가 여태껏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해 엘리스를 향해 툴툴거리게 됐다.
<저만 속인 것은 아닌ㄷ>
“어허~”
<알겠습니다.>
일어나고 나서 섀넌이 엘프 여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을 때 섀넌에게 물었다.
“코엘 누나를 보면 엘프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건가요?”
“엘프들 사이에서 낳는 후손의 숫자가 적어 지금으로부터 2536년전 당시의 엘프 여왕께서 인간과의 결혼 혹은 자녀를 두는 것에 전면적인 개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후 벌어진 노예해방 전쟁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파벌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정후 씨와 세븐시티를 통해 유입되는 신문물의 이점을 선호하는 이들이 주류인지라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아요.”
대답하는 섀넌의 표정은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물어보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과의 교제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뜰떴다가 이내 내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시무룩해졌다.
“섀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이곳으로 돌아올 거예요. 다른 크로니클의 단원들도 이곳에 있지만 무엇보다 섀넌이 여기에 있으니까.”
“정후 씨.”
우리가 다시 로맨스로 불타오를 즈음 동생과 크로니클의 단원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형, 크크큭, 보기 좋은데?”
“지후야.”
아무것도 모르고 활기찬 얼굴의 동생과 나와 섀넌을 보고 ‘니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버크와 코엘 그리고 드마코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금 이런 상황이 결정되었다는 사실과 이렇게 만든 세 인공지능에 대한 근거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형, 뭐하고 있어. 이제 이따가 일식이 시작되면 엘프들의 성인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더라고.”
“100년에 한번 한다는 엘프들의 성인식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행운이다. 행운.”
“허허, 난 이미 본 적이 있어서 딱히 궁금하지 않구만. 엘프들의 성인식보다 드워프들의 성인식이 더 힘차고 멋있거든.”
“동굴 안에서 제대로 씻지도 않은 드워프들이 모여서 맥주나 실컷 마시는 게 퍽이나 힘차고 멋있겠다.”
“흐지믈라고.”
내가 떠나야 하는 마지막의 순간도 처음 만난 순간처럼 투닥거리는 둘을 보고 있자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여러분, 우리 잠시 조용한 곳에 갈 수 있을까요?”
“정후군이 할 말이 있어보이는군.”
“형, 성인식 하기 전에는 끝나는 거지?”
“여러분, 모두 저를 따라 오세요.”
섀넌의 인도에 의해 우리는 엘븐하임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나무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보급한 LED 등들이 여기저기를 밝혀주고 있어 그 이질적인 감성이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우와, 멀리서 볼 때는 무지막지하게 컸는데 안으로 들어오니까 장난 아니게 넓다. 저거 LED 등이네?”
섀넌과 내가 아무 말 없이 엘븐하임의 왕궁 안으로 들어와 가드들을 지나쳐서 계속 들어가고 있으니 모두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점차 말이 없어지고 표정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어가자 내가 어제 왔던 ‘엘븐 갓’ 아니 하얀 여왕 본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엘리스?”
하연 여왕의 인사에 지후는 이런 게 여기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마더 엘리스에 의해 태어난 인공지능 하얀 여왕이라고 합니다.>
“엘븐 갓이 아니라 하얀여왕이라고?”
드마코 형은 이게 뭔지 전혀 처음 보는 표정이었고 버크 아저씨와 코엘 누나는 하얀 여왕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얀 여왕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엘리스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간략하게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형, 그럼 엘리스는 먼 과거에서 온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정후군, 근데 그게 지금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와 무슨 상관이지?”
“여러분들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후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농담이 그러냐, 정후.”
“형, 어디로 떠나? 왜?”
아무런 말 없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섀넌을 비롯해서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유독 친형제인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지후야, 넌 잠시 지구에 가 있어.”
10레벨에 도달하면서 제한이 풀린 내 능력은 한단계 발전했는데 놀랍게도 지구와 이곳을 잇는 게이트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부터 게이트를 만드는 능력이 가능했으나 엘리스의 능력제한에 의해 락이 걸려 있다가 어제 해제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이었다.
“형, 나 지금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난 왜 내가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 엘리스와 하얀 여왕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래서 정후가 약속된 자였던 건가?”
“정후를 지켜보라고 했던 엘븐 갓의 계시가 이런 의미였던 거였구나.”
“뭐야, 두 사람은 조금 알고 있는 눈치네?”
“우리는 그저 정후가 이 세상을 바꿀 예정된 자라는 계시를 믿고 정후를 돕고 있었던 것이 전부야. 그 외에는 지금 정후가 설명한 내용은 알지 못했고.”
설명을 들은 모두의 눈빛이 착잡해졌고 하얀 여왕이 있는 공간엔 적막함이 가득해졌다.
“밖은 축제 분위기인데 여기는 초상집 분위기네. 완전 운수 좋은 날이 따로 없다, 형.”
“그러게 말이다. 넌 일단 돌아가 있어.”
동생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동생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형이 이곳에 돌아오면 같이 돌아갈래. 형은 안 돌아올거야? 어차피 형은 제대로 성공시키고 돌아올게 분명해.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운 거겠지.”
“그런가?”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지후를 잘 지키고 있겠네.”
“정후야, 나 코엘이야. 나 못 믿어?”
“스승님, 전 믿어요.”
“어디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데 말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자꾸 까불어 봐. 앞으로 받을 훈련이 지루해질 수도 있어."
"아닙니다.“
코엘 누나의 말에 군기가 딱 잡힌 이등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넌 그렇게 웃고 있어야 보기 좋아, 정후야.”
“드마코 형.”
“우리같이 평범한 외모의 사람들은 안 그래도 빅터같이 잘생긴 자식이랑 비교되는데 그렇게 우중충한 표정으로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그러니까 못생길수록 많이 웃어야 된다. 정후야. 웃어. 그래야 거기서도 사람들하고 잘 지내지.”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는 형의 우스갯소리가 어이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외모는 내가 형보단 낫지.”
“뭐, 인마?”
“지후야, 안 그러냐?”
나랑 닮은 구석이 많은 외모의 동생인 지후에게 물어보자 지후가 차렷자세로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솔직히 우리 형이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코엘, 나중에 지후 가르칠 교관이 필요하면 말만 해.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드마코 형의 말에 동생은 자세가 무너져서 다급한 자세를 취했다.
“형님, 아니, 그건 좀.”
떠나야 하는 나를 위로해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이제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용자 이정후는 떠날 준비를 마무리하십시오.>
“정후야, 근데 하얀 여왕과 엘리스가 어떻게 널 과거로 보낸다는 거야?”
드마코 형의 말은 나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 엘리스. 날 어떻게 과거로 보낸다는 거야?”
<과거 대마법사들의 힘을 모아 우리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한 능력자의 능력을 담은 한가지 아티팩트를 만들었습니다.>
“그 아티팩트는 어디에 있는데?”
<섀넌 이드릴? 당신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엘프 여왕의 정식 후계자에게 물려지면서 대대로 보관되어 왔죠.>
하얀 여왕의 목소리에 섀넌이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과거의 눈물’이라는 이 목걸이가요?”
<맞습니다. 그 목걸이를 벗어 주세요.>
엘리스의 말이 끝나자 하얀 여왕의 본체 앞으로 목걸이의 모양의 홈이 파져 있는 기둥이 올라왔다.
<섀넌, 당신의 목걸이를 그곳에 놓아두세요.>
섀넌은 자신이 이 목걸이를 벗어주면 이제 정후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팠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서요.>
하지만 다그치는 하얀 여왕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목걸이를 벗어줬다.
목걸이를 기둥에 올려놓자 기둥은 다시 내려가 사라졌고 하얀 여왕의 구체가 있는 곳에서 웅웅거리는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용자 이정후는 하얀 여왕의 구체에 손바닥을 올려놔 주세요.>
엘리스의 말을 따라 하얀 여왕의 구체에 손바닥을 올려놓자 내 안으로 처음 느끼는 힘이 밀려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목걸이에 담긴 시간여행자의 능력이 증폭되어 당신을 통해 작동할 것입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몸을 울리는 것 같이 커지자 난 직감적으로 이제 곧 이들과 작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잘 있어요. 지후는 코엘 누나한테 잘 배우고 있고. 섀넌, 꼭 돌아올게요.”
내 말이 끝나자 내 옆에 서 있던 섀넌은 내게 다가와 키스로 자신의 마음을 전해줬다.
“섀넌...”
“기다리고 있을 게요. 굳건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엘븐하임의 태초의 나무처럼.”
섀넌이 키스를 마치자 동생도 날 안아줬다.
“조심히 다녀와. 다치지 말고.”
“내가 너보다 형이거든.”
코엘 누나와 버크 아저씨와 드마코 형과도 인사를 마치고 손을 흔드는 그 순간 갑자기 내 눈앞이 하얀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어우, 다음부턴 카운트다운이라도 해달라고, 엘리스.”
하지만 나의 부름에 항상 내 안에서 대답해주던 엘리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스? 엘리스?”
대답하지 않는 엘리스를 향해 혼자 소리치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검은 머리칼을 한 소녀였다.
“누구죠!”
“누구세요?”
“당신이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잖아요. 제 이름이 엘리스예요.”
‘뭐야, 엘리스란 이름이 이렇게 흔한 거야?’
소녀와의 만남은 가뜩이나 대답하지 않는 인공지능 엘리스로 인해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렇게 그냥 던져놓으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곳으로 무책임하게 날 던져버린 엘리스와 하얀 여왕을 혼잣말로 욕하고 있는데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날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