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106화-엘븐하임에서의 성인식(2)
섀넌은 나를 데리고 엘븐하임의 왕궁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섀넌이 이렇게 적극적일 줄이야. 근데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남녀간의 핑크빛 로맨스가 진행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섀넌의 적극성에 놀라 두근거리며 붙잡힌 손을 놓지 않고 따라가고 있는데 우리의 앞으로 커다란 철문이 나타났다.
‘신기하네. 엘프들은 나무로 된 문만 사용하는 거 아니었나?’
“정후 씨,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네? 네!”
도대체 나와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기대심이 북받쳐 올랐다.
‘여자들이 이래서 남자한테 이벤트를 기대하는 건가?’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엔 커다란 철로 된 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흠, 좀 로맨틱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전 마음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어서 빨리 준비한 이벤트를 진행하라고 우회적으로 섀넌에게 표현했는데 섀넌은 상기된 표정으로 구를 가리키며 소개해줬다.
“정후 씨가 엘븐 갓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죠? 여기 엘븐 갓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신물神物이 있어요.”
“어?”
어딘가 기대와 어긋난 것 같은 진행에 이것도 이벤트에 포함된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구체의 반응에 내 기대와 다른 현실이 펼쳐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엘리스와의 접촉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얀 여왕과의 접촉을 확인하였습니다.>
“엘리스? 하얀 여왕은 누구야?”
<사용자 이정후의 레벨 10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섀넌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옆에 서 있는 섀넌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섀넌도 이게 자신이 생각했던 그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지 놀란 것 같았다.
“저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긴 왜 데려온 거죠?”
엘리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스마트폰은 화면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전 그저 엘리스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궁금했어요. 내가 알고 있는 엘븐 갓과 엘리스가 어딘가 닮아 있는 것만 같은데 엘리스라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기에 혹시 정후 씨가 우리가 가진 신물神物과 유사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거든요. 거기에 정후 씨도 엘븐 갓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데려와 보면 엘븐 갓으로부터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섀넌의 말은 구체와 엘리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세번째 약속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마더 엘리스.>
<하얀 여왕이여 그동안 고생했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사용자 이정후에게 안배된 때가 찾아왔습니다.>
“엘리스?”
평소와 같은 목소리임에도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엘리스의 어조는 이질적으로 들렸다.
“여기 있는 건 엘븐 갓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구체라며? 근데 하얀 여왕은 또 누구야.”
<진실을 알고 싶습니까?>
“그래, 그동안 궁금했어. 엘리스는 왜 내게 갑자기 찾아온 것인지, 이렇게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등등. 그러나 넌 물어볼 때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며 미루기만 했잖아.”
<지금이 그 시작의 때입니다.>
“뭐?”
갑작스럽게 몰아닥치는 변화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용자 이정후의 스트레스 지수가 급상승합니다.>
“집어쳐. 너같으면 지금 스트레스가 안 생기겠어?”
“정후 씨...”
“섀넌도 한패인가요?”
“네? 아니요, 전 이런 걸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어요.”
<사용자 이정후, 그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마더 엘리스, 이정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설명을 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용자 이정후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이미 문을 열기 전에 마음의 준비는 해뒀어. 종류는 다르지만.”
<그럼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행성 더스트의 원래 이름은 마르스 혹은 화성이라면서 홀로그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화성? 화성이 왜 여기서 나와?”
<먼 미래 혹은 먼 과거의 순간 인류에게서 달이 사라졌을 때 급격히 변동하는 환경의 변화와 행성의 움직임은 인간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엘리스의 설명은 어딘가 이전에 크로니클 단원들과 처음에 갔던 유적지에서의 이야기와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시의 인류는 최선을 다했지만 높아진 수면과 달이 사라지며 교란된 생체 주기 등에 의해 많은 생명들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어 식량수급에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식량 자원을 가지고 생존자들은 대립과 갈등 속에서 서로 사멸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미래를 준비하는 자들만이 부단히 애를 썼지만 번번히 진행한 프로젝트들이 실패로 끝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달이 사라지기 전에 진행했던 테라포밍 프로그램의 대상이자 두 개의 달이 존재했던 화성으로의 이주 외에는 더 이상 진행할 자원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툼이 아닌 미래를 선택한 생존자 집단은 잔해물들을 끌어모아 우주선을 만들어냈고 화성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하지만 떠나오는 과정에서 이들을 못 가게 막으려는 집단들로 인해 우주선에 고장이 발생했고 정작 화성에 도착했을 땐 테라포밍을 진행 중이던 로봇들만이 생존자가 사라진 우주선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럼 이 곳에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태어난 거지?”
“신화에는 엘리스와 엘븐 갓 그리고 불카누스의 존재덕분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나요?”
<우주선에 탑재된 인공지능은 우주선에 실린 유전자 풀fool만과 방대한 양의 정보들을 활용하여 자신을 도와 인류재건 프로그램을 진행시킬 두 개의 인공지능을 새롭게 탄생시켰고 이 둘의 존재가 바로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이었습니다.>
<엘븐 갓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제가 하얀 여왕이었고 불카누스로 알려진 존재가 붉은 여왕이었습니다. 마더 엘리스께서는 지구에서의 인간을 그대로 이곳에 부활시키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으나 저와 붉은 여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척박한 이곳에서 새롭게 인류를 번성시키기 위해선 환경에 맞게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방안을 진행시키기엔 기존의 로봇들을 통해 건설된 기지 내에 존재했던 자원에 한계가 존재했고 지구 인류의 탄생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선에 함께 실린 인류의 유전자 지도를 바탕으로 개조된 신인류의 형태는 방대한 자료에 남아 있던 엘프와 드워프의 형태로 나타났다. 쉽게 죽지 않고 인류를 다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선택된 첫 번째 존재로.
그러나 엘프도 드워프도 행성의 주민으로 인류를 부활시킨다는 것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새롭게 등장한 인류에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술을 처음부터 발전시키기 위해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생명의 내구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이들에겐 번성에 대한 의지가 적었습니다.>
“인류가 자손을 남기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서 오랫동안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함인데 엘프나 드워프들은 800년, 1000년씩 사는데 뭐하러 아이들을 많이 낳을 필요가 있었겠어.”
<맞습니다. 스스로 오래 사는 이들은 척박한 이곳의 땅을 개척하기엔 더 없이 좋은 존재들이었으나 크게 번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르게 성적 충동이 적은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엘리스가 이 세상에 인간을 불러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동안 두 개의 인공지능들은 자신들이 탄생시킨 신인류들을 데리고 인간이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테라포밍을 확장하여 진행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실존할 육체가 없이 그저 음성으로만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자신들의 아바타를 로봇으로 만들어 냈으니 이게 바로 백기사와 적기사였다.
눈 앞에 실존하는 강대한 육체의 소유자이자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가진 백기사와 적기사의 존재를 신으로 인식한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에 맞는 신의 이미지를 재창조하였고 그것이 엘븐 갓과 불카누스였다.
<우리가 엘프들과 드워프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 낸 것은 맞지만 우리는 신이라고 불리기엔 전지全知하지도 전능全能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이들에게 너희들의 존재는 신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당장 나만 해도 엘리스라는 존재가 내게서 사라지면 세븐시티에서 진행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이 좌초할 가능성이 클 정도로 대단한 존재니까. 완벽한 전지와 전능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면 아무것도 모르던 당시의 인간 입장에선 얼추 전지와 전능은 맞지.”
어딘가 모순적인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엘리스라는 초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 내겐 그 정도면 전지였고 전능이었다.
<근본적으로 이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렇게 지구의 환경과 별 차이 없는 환경을 조성하게 된 것이지?”
처음 내가 이곳에서 숨을 쉬고 바다의 환경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놀랐던 것이 내 머리에 생생한 걸 보면 행성 더스트 아니 화성의 현재는 내가 살고 있는 지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부족한 것을 채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했어?”
<멸망한 지구엔 바다라는 풍부한 수자원과 바다에 남아 있는 유기물들이 충분했습니다.>
“그걸 가져왔다고?”
<예, 이제 지구는 지금 우리가 있는 행성 더스트처럼 먼지만 가득한 폐성廢星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순적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게 가능했으면 바닷물을 옮길 힘을 이용해서 사람들도 함께 이주했으면 된 거 아니야?”
나라는 개인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나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들이 계산하지 못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우리에겐 지금도 두 행성 사이에 게이트를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엥?”
“그럼 지금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죠?”
‘그래, 섀넌. 나도 그게 궁금하다고.’
<하지만 두 행성 사이를 이을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존재는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사용자 이정후였습니다.>
“나?”
'내 이름이 왜 또 거기서 나와?'
크로니클 단원들이 동생이랑 짜고 내게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