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105화-엘븐하임에서의 성인식(1)
지후는 코엘에게 기초체력훈련을 받고 나서 검술훈련으로 들어가자 더 혹독한 시간을 경험해야 했다.
“백번을 찌르고 천번을 찔러도 흐트러짐 없이 똑같은 곳을 찌를 수 있어야 한다고! 갑옷을 착용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지쳤어!”
“죄...죄송합니다.”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반응하려면 한번, 두 번으론 절대 불가능하다. 만번이고 십만번이고 니 몸에 때려 박아서 생각하지 않아도 반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에도 몸이 반응을 하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출 수 있는 때가 찾아오는 거야.”
“헉...헉. 예.”
지후는 자기가 처음에 스타워즈에 나왔던 제다이들을 꿈꾸며 훈련하는 것을 떠올렸지만 현실 속 검술을 배우는 과정은 솔직히 지루하고 지루했다. 숫자를 세면서 같은 자세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는 멍해지고 자세는 쉬이 무너졌다.
“기본 자세를 유지하란 말야! 왜 자세가 무너지나! 아직 체력훈련이 부족한가?”
“아닙니다.”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아닙니다!”
그저 찌르고 베는 단순한 동작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되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코엘의 서슬퍼런 눈빛에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지후야, 지금을 잘 이겨내야 돼. 검술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기초가 중요하단 게 절실히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
너덜너덜해져가는 동생의 훈련을 지켜보며 맥주를 들이키고 지후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드마코 형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지치면 지칠수록 그때 한번 더 제대로 자세를 잡고 연마한 것만이 나의 실력이 되는 거지.”
얼마 전 익스퍼트 상급에 오르고 나니 마스터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세 사람과의 격차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마득하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은 어떻게 마스터가 됐어?”
“몰라, 그냥 끊임없이 휘두르고 찌르고 하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몸이 움직이고 싶은 것이 일치하는 순간이 오더라고. 그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유지하다보니까 마스터가 되어 있었어.”
“정후군, 마스터의 수준은 재능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 노력을 했을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거라네. 조바심을 가져서도 안되고 게을러서도 안돼.”
아저씨와 형의 조언을 들으며 나에 대해 되돌아 보고 있는데 어느덧 지후의 훈련이 끝났다.
“허억허억.”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정리 운동 잘하고 스트레칭은 꼭 해둬.”
“예, 알겠습니다.”
“수고했다.”
동생은 대답과 함께 땅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어때요, 동생은?”
“근성은 있어.”
“자질은요?”
“몸을 다루는 능력은 평범한데 머리론 잘 이해하고 따라오네. 중간보다 나은 수준?”
“코엘 단장 입에서 나온 평가가 그 정도면 후하네.”
“니들만 마시지 말고 내것도 하나 줘봐.”
“고생했어. 여기.”
드마코 형이 아이스박스에 담겨진 맥주캔을 하나 집어 던져줬다.
“드마코,오늘 저녁은 뭐야?”
“고기가 듬뿍 들어간 카레라이스.”
“오호? 일단 난 좀 씻고 온다.”
“땀도 안 났으면서.”
“먼지가 묻었잖아.”
주변을 돌아다니며 숲에서 나는 약초를 챙겨온 섀넌은 지후를 위해 엘프들만의 비전의 특제 쥬스를 만들어 가져다 줬다.
“쭉 들이켜요.”
“으윽.”
“입에 쓸수록 몸엔 좋은 겁니다.”
“섀넌 누나는 꼭 우리 엄마같은 소리하네.”
“정, 아니 지후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
쓰디쓴 약초 쥬스를 들이켠 지후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렸다.
“평범하지만 강인하신 분. 평상시엔 약하디 약한데 가족을 위할 땐 피곤해도 이겨내고 아파도 참는 강인한 분이셔. 칼같은 부분이 있어서 예의를 지키는 걸 중요시 여기는 편이라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 주셔도 일정 선을 넘어가면 우리들을 가차없이 혼내시곤 했지.”
“둘은 크면서 많이 싸우고 그랬어?”
스트레칭을 시작한 지후를 도와주며 섀넌은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보통 형제들은 많이 싸운다는데 이미 내가 사춘기에 들어갔을 때 형은 나랑 나이차이가 있다보니 나보다 머리 하나가 훨씬 큰 상태여서 난 감히 덤빌 엄두도 못 냈어. 근방에서도 형이 악바리로 유명한 사람이라 힘 좀 쓴다는 친구들도 나랑은 데면데면 지냈으면 지냈지 나한테 시비 거는 애들은 없었고. 덕분에 학교 생활은 편했지.”
“학교?”
“우리는 8살부터 19살까지 12년동안 기초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고 20살이 되면 선택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든. 12년동안 형의 후광덕분에 난 학교 생활하면서 크게 불편한 것 못 느꼈어.”
“그렇구나. 12년동안.”
“어억. 너무 세게 누르는데.”
“미안.”
정후가 어떻게 자라 어떤 유년기 시절을 보냈는지 지후의 입을 통해서 듣고 있는 섀넌은 정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해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도 정후 씨는 지금이랑 비슷했어?”
“궁금해?”
양쪽 다리를 벌리고 앞으로 수그리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지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관심있으면 내가 나중에 형 어릴 때 사진 가져다줄게.”
“사진?”
정후와 함께 생활하며 카메라로 자신을 찍기도 하고 자신이 뭘 하는지 영상이라는 걸로 남기는 모습을 종종 봤던 섀넌은 지후의 제안에 호기심이 동했다.
“싫으면 말고.”
“아니, 싫다는 건 아닌데.”
지후는 섀넌이 자신의 형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충분하다는 걸 눈치챘기에 혹시라도 자신의 형수가 될지 모를 섀넌이 처음엔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으나 한 사람에게 빠지기 시작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이내 알아챘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럼, 다음에 챙겨줄게.아...아파!”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힘이 들어갔는데 그게 지후에겐 과했던 것 같다.
“이젠 정리운동은 나혼자 할게. 도와줘서 고마워.”
“요리는 드마코 씨랑 정후 씨가 알아서 하니까 멀뚱멀뚱 하는 것도 없이 있으려니 심심해서 그랬던 거야.”
“그래도 고마워. 난 좀 씻어야겠어, 누나.”
“그래.”
며칠이 흐르자 우린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여정을 마치고 엘븐하임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멋있지? 우리 엘븐하임은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질 때가 특히 멋있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노을이 엘븐하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두 번째 방문하는 내게도 장관으로 느껴졌다.
“꼭 영화같네.”
하지만 엘프들의 삶의 터전은 인간들의 삶이 빠르게 변화했던 것과 다르게 큰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의 패션 스타일에는 약간 변화가 있었지만 살고 있는 나무들은 이전 그대로였다.
“여기는 예전에 왔을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네.”
“엘프들은 잘 안 바뀌니까. 너같으면 수십, 수백년을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아무런 계기가 없이 갑자기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바뀔 일이 있을 것 같아?”
코엘 누나의 반문에 잠자코 우리 세상을 떠올려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릴 적 먹던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어머니가 해주시던 손맛이 담긴 음식을 그리워하며 더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어릴 적 먹던 어머니의 음식과 크게 다른 음식을 먹고 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투 또한 자신이 젊었을때 쓰던 말투를 나이가 먹어서도 그대로 쓰는 경우들을 경험할 때면 불과 20~30년동안 경험을 하며 성장한 사람들도 50, 60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비슷한 삶을 사는 걸 보면 병이나 무슨 사고가 있지 않는 한 평균 천년이란 길고 긴 세월을 사는 엘프들 또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형, 형. 꼭 동화속의 한 장면같다.”
“동화?”
“그래, 동화.”
동생의 말에 내가 이 세상에 전파해야 할 것이 또 하나 늘었음을 깨달았다.
“지후야, 동화童話가 뭐야?”
“누난 동화가 뭔지 몰라?”
지후가 꺼낸 동화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는 4명은 생소해했다. 사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동화라는 개념 자체도 우리 세상에서 나온 지 그렇게 오래된 개념은 아니었다. 전래동화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애초에 아동에 대한 인권이 그렇게 높지 않았던 세계의 과거에서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따로 존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약 130여편의 동화를 저술한 동화작가 안데르센도 19세기 사람이었고 이솝우화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 아이소포스는 고대 그리스의 사람이었으나 그가 지은 우화들은 애초에 아이들이 읽기 위한 이야깃거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래동화는 이후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신화, 민담 등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아이들이 읽기에 좋게 편집한 후대의 발명품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의 몸을 다룰 나이가 되면 일터에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할 만큼 아동의 인권이 확보되지 않았던 이곳에 내가 어린 아동을 위한 기초교육 기관으로서 학교를 만들게 된 것이 이 세상의 아동교육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만큼 ‘동화’라는 개념은 이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스가 동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런 것들을 설명하며 알려주자 나를 비롯한 우리 6명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우리 세상엔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라는 개념이 아직까진 거의 없지. 부모가 시킨대로 뭐 안하면 누가 잡아간다거나 이런 이야기들은 어릴 적에 듣곤 했지만.”
“그건 어딜 가나 부모님들이 똑같은가?”
“돌아가면 세븐시티의 아이들과 제국의 아이들을 위해 동화 편찬사업도 시작해야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간 엘븐하임 문 안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건물들의 외형과 다르게 엘프들의 텐션 자체가 어딘가 들떠 있는 느낌이었다.
“묘하게 사람들이 들떠있는 것 같군. 모여든 엘프들의 숫자도 많고.”
“버크, 원래 엘프들이 성인식을 할 나이가 되면 모든 엘프 마을에 있는 대상자들을 비롯해서 그 가족들과 친지들이 엘븐하임으로 몰려든다고.”
“진짜 엘프들 엄청 많아, 형! 다들 이쁘고 잘 생겼다.”
모델같은 외형의 젊은 엘프들은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어 이전에 와봤던 나로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엘프들이 모여든 것만으로도 볼거리가 가득했는데 섀넌은 내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지나가고 있었다.
섀넌과 맞잡은 내 손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섀넌?"
"정후 씨, 나랑 가볼 곳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코엘 언니에게 미리 말해뒀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래요?"
모여든 젊은 엘프들의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것처럼 섀넌의 볼도 발그레한 것이 싱그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