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100화-영웅
세븐시티의 변화는 우리 세상의 19세기 유럽과 근접한 상태였다. 아니 그보다 나았다. 노동법이 존재했기에 최소한의 시급을 주지 않는 악덕업주의 경우 법적으로 처벌받았으며 사기를 치거나 타인의 재산을 횡령하는 수작을 부리는 경우 강력범죄와 동일한 수준으로 처벌하는 법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출품이 넘쳐 나는 상황에서 제국을 비롯한 더스트 대륙은 세븐시티의 시장 그 자체였기에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갔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로 인해 사람들의 주머니는 점차 두둑해져갔다.
사람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일부 머리만 똑똑한 이들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사람들의 돈을 빼먹을 수 없을까 고민하면서 기발한 사기 수법들을 만들어 내려고 했지만 현대사회에서의 다양한 사기 수법에 비하면 아직은 초창기에 불과했기에 해당 범죄수법에 대해 조사방법을 비롯하여 법적처벌 수단이 이미 완비된 상태였다.
단순히 돈을 훔친 것 혹은 경제사범들에 대해 중범죄로 형량을 만드는 것에 대해 혹자가 반발하기도 했으나 타인의 목숨을 해치는 것과 타인의 재산을 빼앗아 인생을 파멸로 모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에 이를 관철했다.
“힘드네.”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려고 함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점차 기득권이 되고 싶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더 챙겨주길 원했고 그만큼 다양한 불만이 접수되고 있었다.
“호의를 베풀면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당연해지는 것 같아.”
“요크, 너도 힘들구나.”
“분명 우리가 만든 도시가 이 세상 어디에 있는 영주의 땅보다 아니 제국의 수도보다 생활상으론 윤택한데도 사람들은 그칠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러지.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요크의 말엔 일견 일리는 있으나 21세기를 사는 내가 보는 세상에 대한 인식과는 차이가 있어 완벽하게 공감하긴 어려웠다.
“니가 전에 말했지. 헤이터(hater)란 종자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고 설령 상대방을 위한 호의도 호의로 받아들일줄 모른다고.”
“그랬었나?”
“응,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맞는 말인 것 같아.”
거미인간의 시리즈를 함축하는 대사로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책임이 따른다.’가 있다. 지금 내가 그랬다. 시장의 지위에 오르고 사장이 되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부가 내게는 생겼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이 세상엔 아직 없는 기술을 투입하면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나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부여했고 변해가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가난과 전쟁에 찌들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꽃이 피면 그 자체로 충분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사건과 사고들이 나의 모티베이션을 갉아먹고 있었다.
<번아웃 초기 증상인 것 같습니다. 사용자에겐 현재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아, 아는데 이미 달리기 시작한 열차라 내가 멈출 수가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기호지세라고.”
발전의 키를 거머쥔 내가 쉬고 있는 만큼 이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의 발전보다 뒤쳐진다. 이상했다. 내가 태어난 세상이 아님에도 나로 인해 바뀌는 세상을 보면서 내겐 책임감이 생겨났다.
동시에 늘어나는 부가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선을 넘어서고 더 이상 돈이 나의 목적이 아니게 되었을 때 날 움직이는 것은 돈이 아닌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감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당장 병원을 짓고 약을 시장에 푸는 것만으로도 죽을 사람들이 혹은 고통에 찌들었던 사람들에게 일상을 전해줄 수 있는 감사의 편지들이 냉장고 박스만한 크기의 용기에 가득 채우고도 넘칠 수준이 되자 잠을 자는 것도 자는 게 아니고 꿈속에서도 난 일하고 있었다.
<버크 샤이어 씨와 상담을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아저씨는 붉은 수염이란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죠?”
“영웅이 아니었으면 했단다. 아니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꿨지. 누군가를 죽여서 다수의 삶을 찾아준다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거든. 설령 그 누군가가 죽일 놈일지라도 말야.”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
“영웅이 필요하단 의미는 이 세상이 곧 난세라는 의미이거나 사람들에게 삶이 쉽지 않다는 의미일세. 영웅을 꿈꾸는 자들이 많다는 의미도 마찬가지고. 살기에 행복하고 좋은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영웅을 꿈꾸거나 바라지 않겠지. 행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걱정 없이 살아본 사람 중 어린 아이면 모를까 성인들이 영웅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까?”
“왕은 왕의 걱정이, 귀족은 귀족의 걱정이, 거지는 거지의 걱정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거랑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네. 걱정의 질이 다르지 않나?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있을까를 두려워하는 거지의 걱정과 어떻게 하면 영지민들의 재산을 더 갈취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넓힐까하는 귀족의 걱정이 어찌 같을 수 있겠나? 둘 다 걱정이긴 해도 전혀 다른 세상의 말인 게지.”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니 취업지원을 하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본 문구가 떠올랐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으나 벤치에 앉아서 우는 것보다 벤츠에 앉아서 우는 것이 덜 비참하다.」
만약 비가 오는 날이라면 둘의 괴로움의 차이는 더욱 클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처량하게 벤치에 앉아서 비를 맞으며 우는 자신과 벤츠에 앉아 차의 지붕과 유리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는 자신을 상상했던 기억이 있다.
“행복한 자들이 많아지면 영웅을 기대하고 꿈꾸는 이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내가 누군가가 바라는 영웅이 되어주자고. 굳이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불러도 될 걸세.”
구제를 바랐으나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구제해주지 않은 경험이 있는 버크는 자신에겐 그런 영웅이 없었기에 타인을 위해 영웅이 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버크의 말에선 진정성이 가득 느껴졌다.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고 나니 코엘 누나는 백발마녀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누나는 백발마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 거 다 일일이 신경 쓰고 살면 제대로 못 산다.”
“네?”
“그냥 니 맘 가는 대로 살아. 난 그렇게 살았어. 요즘 고민이 많은가본데 무슨 일을 할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 사람들의 시선에 발목이 묶이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게 가족이든 친구이든 타인이든 동료이든 선은 지키되 니 인생은 니가 원하는 쪽으로 살아야 해. 난 복수를 원했고 복수를 했을 뿐이야. 납치된 엘프들을 구한 것도 내가 원해서였지.”
너무나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의 답변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버크 아저씨는 타인의 기대에 부흥하는 삶을 살았고 코엘 누나는 오직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둘 다 각자의 세상에선 영웅으로 인정받았고 대접받았다.
“어렵다. 어려워. 마음으론 코엘 누나의 말이 끌리고 머리로는 버크 아저씨의 말에 끌리네.”
점차 커져 가는 세븐시티에는 저번 대화재를 기점으로 대륙의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유입이 되었는데 갑작스레 커진 도시인구수에 맞게 덩치를 키우지 못한 도시 경비대는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아, 요즘 조직들이 너무 많이 늘었어.”
“이게 다 너무 사람들이 세븐시티에 너무 꾸역꾸역 쳐 들어와서 그래. 시장들도 문제야. 이렇게 사람들을 무턱대고 많이 받아주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별의 별 잡놈들이 다 끼어 들어온 것 같아.”
도시경비대에 자리 잡은 경비대원들은 근래에 부쩍 늘어난 조폭들을 상대하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일이 피곤해지자 고참 경비대원들은 그 화를 신참 경비대원들에게 기강을 잡는다는 이름으로 풀곤 했다.
“인마, 제이크!”
“아, 왜요!”
“요? 이 새끼 봐라. 빠져 가지고. 장구류 정리 다 끝냈어?”
“다 끝냈습니다.”
“그래? 오늘 암구호 뭐야?”
“예?”
“예~? 예~? 암구호 뭐냐고.”
제이크는 갑자기 암구호를 물어보는 선임 경비대원의 질문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고참들이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구류 정비를 마치고 확인까지 하고 왔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 제가 아까 보고 왔습니다.”
“어, 그러니까 암구호 뭐야.”
이장님이 돌아가시고 더 이상 자신을 비호해줄 상대가 없었던 제이크는 능력도 없고 딱히 배운 것도 없는 자신의 신세를 뒤늦게 깨달아야만 했다. 하지만 깨달음과 다르게 행동에 변화가 없자 마을 사람들은 사고만 치고 주변 사람들과 싸움박질만 하면서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는 제이크를 도시경비대 훈련소에 강제로 입대시켰고 사람이 많이 필요했던 도시경비대는 겉보기엔 덩치가 좋은 제이크를 다른 이들과 함께 훈련소에 받아줬다.
억지로 끌려온 도시경비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지만 점차 훈련을 버텨 나가면서 성취감이란 감정을 살면서 처음 느껴 훈련소 시절을 이겨내고 수습 경비대원이 될 수 있었다. 수습 경비대원이 되자 이제는 자신을 건드릴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기고만장하던 때가 있었으나 제이크는 알아야 했다. 훈련소 시절을 이겨낸 선배들 중에 자신보다 약한 이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는 걸.
시의 법에 의해 구타는 없었으나 규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경비대 업무를 잘 모르는 신병들은 고참들에게 갈굼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아무리 깨져도 고참들을 힘이나 기술로 이기지는 못하면서 반항심을 유지하는 제이크는 고참들 사이에서 타격감이 좋아 괴롭힘의 주요대상이 되었고 오늘은 출동을 마치고 돌아와 선임 경비대원들이 벗어놓은 장구류를 정리해놓고 기진맥진해져 있어 정신이 없었다.
“암구호 뭐냐고! 인마, 몇 번을 묻게 만들어!”
큰소리가 나자 잡담을 하고 있던 선임 경비대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걸 굳이 보지 않아도 제이크는 느낄 수 있었다.
“저, 그게.”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언터쳐블로 불리는 최고참 멜리사가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다 일어나자 다른 선임들은 움찔해 하는게 보였다.
“신참이 암구호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에디, 애가 모르면 가르쳐 주면 될 거 아니야. 넌 알아?”
“지금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당연히 알지 말입니다.”
“그래, 암구호 뭐야.”
“그게 그러니까 어제는 바니바니/당근당근이었고.”
“오늘 뭐냐고 오늘.”
신참 제이크를 한참 다그치던 에디는 멜리사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잦은 출동에 지쳐서 화풀이나 할 겸 만만한 신참을 건드린 거였고 자신도 신참 시절 이리저리 일에 치이다 보면 암구호를 외우고서도 까먹곤 했으니까.
“썬더/플래시다. 지도 못 외우면서 왜 애를 잡아. 그것도 쉬는 시간에 시끄럽게 하면서. 제이크, 너도 인마 똑바로 암구호 숙지 안해? 작전 나가거나 피아식별 구분해야 할 때 암구호만 알아도 많은 상황에서 도움되는 거 안 배웠어?”
“배웠습니다.”
“한, 두번은 실수해도 좋아. 하지만 세 번은 안 돼. 그건 실수가 아니라 습관이야. 내가 존경하는 분이 하신 말씀이지만 진정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 제이크는 다음부터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내가 습관이 되지 않도록 몸으로 고쳐주겠다.”
몸의 대화라고 불리는 멜리사의 훈육은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 아무런 말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강도 트레이닝이었고 훈육을 하면서 동시에 같이 진행하기 때문에 누가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시켰다고 그 밑의 대원들은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멜리사의 개입으로 겨우 빠져나온 제이크는 혼자 군화를 닦으며 아까 멜리사의 따뜻한 도움을 떠올렸다. 여자임에도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인 멜리사가 자신을 지켜주자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포근함과 강인함을 느낀 제이크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멜리사 수경님 덕분에 살았네.”
언젠가 자신도 멜리사처럼 탄탄하고 커다란 근육을 가지고 조폭들을 때려잡고 후임 경비대원들에게 착한 선임 경비대원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제이크는 분명 이전의 양아치 제이크와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