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96화-2D에 빠진 이세계 사람들.
빔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제국 곳곳에선 작은 영화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마치 자동차 극장의 모습을 연상케하듯 시나브로의 상점들 외벽에 빔프로젝트를 쏴서 상영되는 중독자의 삶을 그린 영화는 처음 별거 아닌 통증을 약으로 사용하다 이에 중독되어 나중엔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까지 파멸로 이끄는 줄거리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었다.
이전에 크로니클의 단원들에게 ‘목걸이의 황제’ 3부작 시리즈를 보여줬을 때 실사영화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실사영화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인상적일까를 생각해봤지만 아직은 영화를 이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이르지 않나 싶은 마음에 엘리스가 3d 기술을 이용하여 3d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장난감 이야기’처럼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를 검수한 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냈다.
“니, 어제 그거 봤나?”
“막 움직이는 그림 그거 말이지?”
“좀 무섭더라.”
“거기 나오는 그 약이 ‘페일’이라면서?”
“그거 보자마자 우리 엄마가 당장 집에서 이딴 물건은 갖다 버리라고 해서 우리 집은 버렸어.”
“너희 집도?”
“야, 우리 집도 버렸어.”
동네 아이들은 전날 저녁에 본 ‘애니메이션’의 흥미진진함에 빠져 한동안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문화유희에 눈이 떠 버렸다.
“근데 거기 나온 누나들 되게 예쁘지 않았냐?”
“난 특히 샤니란 주인공 누나가 엄청 매력적인 것 같았어.”
“나중에 크면 샤니같은 여자랑 결혼해야지.”
“나도 나도!”
‘내가 이 세상에 2D성애자들을 만들어 버린 건 아닌가 모르겠다.’
전날 본 영상물의 이야기로 어딜 가든 사람들 사이에서 ‘중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어지는 업무에 지쳐서 의식을 환기하는 목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볼 겸 산책을 하면서 수도의 거리를 섀넌과 걷고 있는데 섀넌의 얼굴이 지나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발그레해졌다.
“왜 그래요?”
“지나가는 아이들이 어제 상영했던 ‘중독’이란 애니메이션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이 어디 잘못되었나요?”
혹시라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되도록 약물의 부작용이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어떤지를 너무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 다루려고 완성 이후 공개하기 전까지 몇 번의 재편집 과정을 거쳤는데도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덜컥 걱정이 생겼는데 섀넌의 이어지는 말에 마음을 놓았다.
“남자 아이들이 유독 샤니란 캐릭터의 외모가 마음에 든다면서...”
“사내 녀석들이 다 그렇죠.”
“다 그런가요?”
섀넌의 표정이 묘해졌지만 난 한참을 섀넌에게 2D성애자가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설명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다.
회사로 돌아오고 난 섀넌이 이상하게 쌀쌀 맞은 것 같아서 요크에게 왜 섀넌이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꺼내자 요크의 표정도 섀넌과 비슷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니 왜!”
“화상아.”
“뭐가?”
“너 애니메이션에 쓴 캐릭터 샤니의 얼굴. 섀넌을 본 따서 만든 거 아니야?”
“어, 맞는데 왜? 내가 아는 얼굴들 중에선 가장 이쁜 얼굴이라 괜찮을 것 같았지. 극중에서도 주인공인 중독자가 마지막의 마지막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옆에서 최선을 다해 돕는 것도 샤니인 이유가 천사같은 얼굴을 한 샤니의 외모에 인성이 고스란히 투영된 거란 설정이었거든.”
“그거, 섀넌 앞에서도 이야기했어?”
“에이뭘 그런걸 일일이 이야기해.”
“응, 넌 바보 맞아.”
“어허, 사장님한테.”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놈한테 굳이 설명해줘야 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한 요크는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페일’에 대해 거부감이 확산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실제로 어제 와처의 요원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상영 이후의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봤는데 ‘페일’ 복용 이후 느꼈던 나른한 느낌이 중독에 이르게 된다는 애니메이션 속 모습하고 비슷해 보였는지 오늘 교환하러 온 사람들이 꽤 많았나봐.”
요크의 설명을 듣고 나자 재패니메이션이 ‘위아부weeaboo’들을 만들어 냈듯 문화상품 중 특히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 절대 무시할 수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적 성향을 지녔지만 스토리를 잘 표현해서 문화상품의 성격도 강한 시나브로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중독’은 이후로 사람들 사이에서 상영요구가 계속되어 편하게 모두가 앉아 볼 수 있도록 지금의 멀티플렉스 개념이 아닌 예전의 ‘단관극장’ 개념으로 상설극장을 만들게 되었다.
극 중에서 동생을 향해 끝없는 애정과 헌신을 보여준 희생의 아이콘인 ‘샤니’는 열광적인 팬들을 만들어냈고 시나브로 엔터테인먼트에선 나의 요구에 의해 ‘섀넌’에게 따로 캐릭터에 대한 초상권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캐릭터 ‘샤니’를 활용한 여러 가지 캐릭터 상품을 제작해서 팔기 시작했다.
‘이젠 여기선 인형의 상징은 ’바비‘가 아니라 ’샤니‘인건가?’
샤니의 얼굴을 한 캐릭터의 변주는 다양했는데 오리지널 샤니를 비롯하여 쌍검을 휘두르는 샤니, 활을 사용하는 샤니, 치료하는 샤니, 요리하는 샤니, 상인 샤니 등등 다양한 변주를 보이며 시나브로의 효자캐릭터가 되었다.
시나브로 호텔 옥상에 놓인 유리 정원 안에서 빗소리를 듣고 내가 비오는 날에는 부침개나 부쳐서 먹으면 딱 좋은데 라며 입맛을 다시자 섀넌은 세팅을 해줬고 도움을 요청받은 드마코 형의 솜씨 발휘 소식을 들은 크로니클의 단원들은 다들 모여 술판을 벌였다.
“섀넌은 정말 부럽다. 나도 섀넌처럼 좀 좋은 캐릭터를 주지 그랬어.”
애니메이션 ‘중독’에 활용된 여성캐릭터들은 자연스럽게내 주변의 요크,섀넌,에디나 누나,코엘 누나 등과 같은 이들의 외형을 차용하여 만들게 되었는데 에디나의 경우는 본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주인공의 치료를 돕는 백의의 가운을 입은 치료사로 등장했었다.
“에디나, 진짜 그게 단순히 캐릭터때문이라고 생각해? 캐릭터가 가진 성격문제가 아닐거란 생각은 못해봤지?”
“무슨 의미야, 드마코?”
“아니야, 모르면 됐어.”
“쓰읍, 너 방금 되게 표정이 불편했어. 말해. 말하라구!”
에디나 누나가 마시던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드마코 형을 잡으려고 들자 드마코 형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말했다.
“아이고, 해물파전을 다 먹었네? 더 구워줄까?”
코엘 누나와 요크 그리고 섀넌의 강력한 요구에 드마코 형은 쫓아오는 에디나 누나를 빅터에게 맡기고 파전을 부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빅터도 그렇게 생각해?”
왈가닥같던 사람이 변해서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에디나 누나의 말에 러시아의 차가운 미소를 지닌 미남 빅터는 어디로 가고 에디나 누나와 둘이서 꽁냥꽁냥한 모습을 보여 나와 다른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아, 두 사람이 저러는 거 볼 때마다 적응 안 돼.”
“언니도? 나도 그래 나도. 빅터가 저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상도.”
코엘 누나와 요크는 빗소리 들으면서 파전에 막걸리 한잔해서 기분 좋았는데 갑자기 기분 나빠졌다면서 막걸리나 더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누구는 연애 안 해봤나!”
“난 안 해봤는데?”
“맞다. 우리 요크는 안 해봤지? 내가 고걸 깜빡했네. 미~안~하네.”
코엘 누나는 그 가운데서도 요크를 약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장난을 쳤고 열이 난 요크는 막걸리를 연신 들이켜다 이내 뻗어버렸다.
“이야, 술에 그렇게 강한 드워프도 막걸리는 많이 마시면 취한단 말이야?”
파전을 한무더기 해오고 얼큰하게 끓인 칼국수까지 끓여온 드마코 형 덕분에 우리는 술에 취한 요크가 깼다가 다시 취해서 잠들 때까지 마실 수 있었다.
“어우, 머리 아파.”
<과도한 음주는 사용자 이정후의 신경계에 영향을 끼치고, 손발의 무감각, 사고 장애와 치매를 유발합니다.>
“엘리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잔소리가 아니라 꿀물이야.”
흔들리는 골을 부여잡고 뒤집어지는 속을 달래고 싶은 내 열망을 섀넌은 어찌나 잘 알았는지 나의 기상 소식을 듣고선 내게 꿀물을 가져다 줬다.
“사장님, 어젠 과음하신 것 같습니다.”
꿀꺽꿀꺽
“캬하, 요 근래에는 이렇게 많이 마셨던 적이 없었는데 그때 크로니클 사람들하고 처음 봤을 때 마신 이후로 이 정도로 마신 것은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꿀물을 마시고 난 뒤 물잔을 돌려주자 섀넌은 뭐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봤다.
“혹시 콩나물국 될까요?”
“콩나물국 말씀이십니까? 요리장에게 이야기해두겠습니다. 1시간 뒤 일정 시작이니 샤워를 하시고 시원하게 콩나물국을 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섀넌은 내게 대답을 듣고 돌아서 나갔는데 나는 다시 침대에 발라당 다시 누워버렸다.
“와, 섀넌도 어제 나랑 비슷하게 마셨는데 술은 꼭 나만 마신 것 같네.”
전날 달리는 분위기 속에서 드마코 형과 내가 나가 떨어지고 빅터는 에디나 누나를 에스코트해야 한다면서 적당히 마시다 말았는데도 섀넌과 코엘 누나 그리고 에디나 누나는 커다란 장독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모두 마시고서야 자리를 끝마쳤다.
“새로 제작해서 개봉한 애니메이션들 반응은 어떻죠?”
약물은 위험하다는 내용을 담은 프로파간다적 애니메이션 ‘중독’을 시작으로 다양한 주제의 애니메이션들이 단관극장 ‘처음’에서 상영되었다.
이제야 라디오가 생겨날 정도로 볼거리나 즐길 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 등장한 단관극장의 존재란 가뭄의 단비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상상 이상입니다. 예약제도를 진행하기엔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아 모두 선착순 현장판매로만 표를 판매하고 있는 상황인데 제국의 사람들은 다 몰려든 것 같습니다.”
“좋네요. 원래 우리가 생각했던 마약 퇴치운동도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나요?”
의도치 않게 시작된 영화사업이 흥행하고 있었지만 시작은 마약의 수거 및 퇴출이었기에 그 점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점은 정후 사장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와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시중에 돌고 있는 상품의 80% 이상은 수거 및 폐기처분이 진행되었습니다.”
“빅터 이사님 말대로면 아직 20%가 남은 것 같습니다만.”
“남은 양으로는 제국 전체에 퍼진 정도이기에 20%라고 해도 1인당 소비할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루트만 차단작업이 병행된다면 제국 내에선 마약이 다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장님...”
빅터의 말에 마약 문제가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임원회의 시간에 한 임원이 손을 들었다.
“무슨 의견인가요?”
“음,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내같은 경우는 오랜시간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병에 걸려서 괴로워했습니다. ‘페일’을 장기 복용하거나 과량 복용하면 위험하단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나 ‘페일’을 복용한 이후 제 아내는 눈에 띄게 편한 상태로 잠에 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주의하신 부분을 유념하여 한번에 많이 복용하지 않도록 조심하곤 있으나 제 아내처럼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페일’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페일’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마약을 퇴치했다는 것 자체에 빠져 있던 내게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직원의 사연은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군요. 지금 발언하신 분 성함이 안더스 맞죠?”
“예. 사장님.”
“한번 아내분하고 같이 찾아오실래요? 비서실장에게 말해둘 테니까.”
또 다른 숙제를 짊어지고서야 회의는 끝이 났다.
“전혀 생각 못했어요. 내가 벌인 일로 인해 누군가는 괴로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했는데.”
“정후 단원, 정후 단원이 세상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과한 죄책감 혹은 과한 책임감은 좋지 않습니다.”
회의 시간 중엔 사장님으로 불러주던 빅터가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크로니클의 단원을 대하던 교관으로 돌아가 날 위로해줬다.
“그래도 좋은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