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88화-참기름 대전(大戰)
“사장님, 그때 왜 무력으로 정리하려고 하지 않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특히나 귀족측에선 이후에 비용처리 과정에서 꽤나 까다롭게 굴었을 때 굳이 판을 깨버리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섀넌은 원탁의 평야로 이름 붙은 그곳에서의 합의에 대해 의문이 있었는지 그때 이후로 시간이 흘렀는데도 단 둘이 있게 되자 물어봤다.
“우리 입장에선 많은 노동력의 확보를 통한 인구의 증가도 중요한 것이지만 향후 우리들이 만든 상품들을 구매해줄 잠재고객인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장기적으로 시나브로의 수익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죽이지 않는 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법이잖아요.”
“영주의 입장과 사장의 입장은 많이 다른 것 같네요.”
“우리가 확장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와서 영주들과 부딪히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또 다른 대응을 해야겠지만 그 전까지는 만만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두려움의 존재가 되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도 군림하려고 들지 않는 정후의 판단과 당시의 합의 과정에 불만이 있었던 섀넌은 불만이 희석되는 것 같았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언제든 섀넌의 마음속에 궁금함이 생기거나 의문점이 생기면 물어봐 줘요. 혹시라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실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장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나보다 더 날 믿어주는 것만 같은 섀넌의 확답에 어쩐지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이주해온 이들은 모두 잘 적응하고 있나요?”
“이주자 적응 프로그램 덕분인지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탈북자들을 대한민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기본교육을 진행하듯 기존의 인식을 가진 더스트 행성의 주민들이 세븐시티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느낄 이질감과 적응과정 상에서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있어 미리 어느 정도 완화할 목적으로 정착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여긴 천국인가?”
“여기서 나가서 정착하게 되면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총 12주의 교육을 받고 나서 수료 후에는 저금리로 장기 대출을 지원하고 집을 구매할 수 있게 해준다는 교관의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빈스 님은 그때 먹었던 삼겹살 생각 안나십니까? 쩝.”
“당연히 생각이 나지. 그런 맛은 인생 살면서 처음이었으니까. 귀족들도 아마 그런 맛은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을 거라는 거에 내 오른쪽을 걸지.”
“무슨...?”
“아닐세...”
교육관에서 사회적응 훈련을 받고 있는 이 둘의 대화 그대로 보거농과 비트레이도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네도 그 테이블 구매했나?”
“정원에 앉아 따뜻한 상태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혁명적인 도구를 보고도 어찌 구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저번 연회에서 도발적인 붉은 색의 테이블들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더니 그걸 본 귀족들이 너도나도 우리들처럼 테이블에 반해서 구매하고 있는 모양인 것 같더군.”
귀족파에서 두 사람이 핵심인 이유 중의 하나는 두 사람이 하는 행위가 곧 현대 셀럽의 행위처럼 귀족들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따라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테이블 구매는 귀족들의 정원이나 저택을 80년대 후반 배기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던 시절의 고깃집의 풍광으로 변신시켜 연출하기도 했다.
정원에서 파티를 하면 불판들에서 구워지는 연기로 정원이 가득 찼으며 연회장에서 파티를 하면 연회장은 마치 불이 난 것처럼 뿌연 연기로 가득 차고 사람들의 옷은 불향으로 가득 했다.
“얼마나 처먹는거야.”
“그러게. 오늘따라 귀족양반들이 많이들 먹는군.”
“냄새만 맡고 있으려니 이 짓도 못할 짓이야.”
수십개의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다보면 자연 필요한 불판의 수도 어마어마했는데 수시로 교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파티를 하는 날이면 해당 귀족의 하인, 하녀들은 음식 준비뿐 아니라 불판을 닦는라 중노동을 해야 했다.
“난 이 냄새를 하루 종일 맡고 있으면 식욕도 없어지더라.”
“그건 그래. 신기하게도 향긋한 고기 냄새를 하루 종일 맡고 나면 입맛도 없어.”
“덕분에 난 요즘 허리가 3인치는 줄었다니까?”
“호호호, 로버트가 그래서 자기한테 들이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런가? 흐흐흐.”
귀족들의 고용인으로 일한다는 것의 장점은 귀족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을 일이 많다는 거였고 상대적으로 영양 상태가 좋은 귀족가의 하인,하녀들은 제국민들 중에서도 중산층 이상으로 보일 정도로 피부 때깔도 다르고 입고 다니는 옷도 달랐다.
“우리들도 열심히 돈 모아서 저 테이블을 집에 가져다 놓고 고기를 구워 먹어 보자고.”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모르지. 인생은 모르는 거잖아.”
잡담이 길어지는 게 거슬렸는지 하녀들을 총괄하는 하녀장이 불판을 닦는 일을 맡은 이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빨리 닦아! 불판 교체해달라는 손님들이 많은데 그렇게 잔소리해가면서 언제 다 닦을거야!”
“예!”
대답을 한 하녀들은 하녀장이 음식 준비를 맡은 이들을 체크하러 떠나자 하녀장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언제까지긴 저 귀족 것들이 다 처먹을 때까지지.”
“로이 엄마도 참.”
“귀족들이 들을라.”
“듣기는 자기들끼리 처먹느라 바쁠텐데.”
하녀들이 고기가 눌러붙은 불판을 닦느라 팔뚝이 굵어지는 동안 귀족들의 허리둘레도 이전과 다르게 굵어지기 시작했다.
“당신, 요즘 허리가...으음...”
보거농은 자신이 화제를 잘못 꺼냈음을 부인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보고 깨달았다.
“아프지 않나 걱정 돼.”
“자기는...호호...항상 내 생각뿐이군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순해지는 부인을 보고 자신이 괜찮은 답변을 한 것인가 싶었지만 너무 과하게 먹힌 것 같아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동안은 저 연합국 자식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후추를 비싼 값에 구매해 와야 했는데 이젠 시나브로 마켓에서 판매하게 되었다니 참으로 다행인 것 같소.”
“그렇죠?”
삼겹살을 먹을 때 제이란 자가 준 소스에는 쌈장이라는 것과 소금장도 있었는데 쌈장의 그 마력적인 맛도 즐거웠지만 비싼 후추와 일반적이지 않은 소금 그리고 고소한 향이 나는 기름이 섞인 기름장을 찍어먹는 고기맛이란 평소에 지겹게 먹은 스테이크와는 다른 고기맛을 연출해냈다.
미식가를 자부하는 보거농 자작은 두 가지 소스에서 시나브로가 파는 물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시나브로에서 만든 마켓이란 곳에는 각종 과일이나 야채 뿐 아니라 육류와 곡식까지 많은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실제로 제국의 수도에선 이 시나브로 마켓에서 판매하는 버크 소금과 코엘 후추의 인기가 한창이었다.
“버크 소금이라는 게 우리가 평소에 먹던 산에서 캐오는 소금과는 그 맛도 다른 것이 색도 분홍빛이 감도는 걸 보고 있자면 마치 보석같다고나 할까?”
자작 부인은 남편이 또 시작했구나 싶어서 웃으며 맞장구를 쳐줬다.
“짠맛 뿐만 아니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맛들이 풍부하게 느껴지죠.”
“그것뿐이 아니라오. 그 갈색 빛의 기름은 어떻고?”
“참기름이라고 했죠?”
“아주 적은 양으로도 그렇게 고소한 향기를 내뿜는 기름이라니!”
“참기름 판매는 어때요?”
“매우 순조롭습니다. 특히나 마켓에 온 손님들에게 선보일 음식을 만들어 시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시나브로 직원들을 통한 판매량이 다른 상품들과 차이가 있는 편이죠. 사장님께서 주신 시식행사라는 아이디어가 잘 통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마트의 시식행사를 본 따 처음 접하는 음식재료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괜찮은 듯했다.
“앞으로도 세븐시티의 주민들이 먹는 음식들을 시식코너를 통해서 홍보하도록 하죠.”
시나브로 마켓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마트 식품코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마트들이 평범한 이들이 오는 곳이었다면 시나브로 마켓은 귀족들과 그들을 호종(護從)하는 하녀장 혹은 집사들이 모이는 상류층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호호호, 캐서린 자작 부인이 여긴 웬일이죠?”
“호호호, 마리 백작 부인. 제가 못 올 곳을 온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신경전을 따라 이 둘을 따라 온 양측의 하녀장들도 꽤나 앙숙의 관계였는데 하녀장을 돕기 위해 따라온 하녀들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해서 3대 3의 대치구도에서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 6명의 사람의 앞에서 참기름과 들기름 판매를 이용해 음식을 판매하는 직원인 세서미는 갑자기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하루에도 여러번씩 벌어지는 이런 상황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손님들, 오늘은 저희 마트에서 살이 찌지 않는 음식을 선보이려고 합니다. 참기름과 들기름을 활용한 샐러드라는 건데요. 저희들이 판매하는 ‘에디나 참기름’과 ‘에디나 들기름’을 이용하시면 이렇게 맛깔나는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3대 3의 대치구도 사이로 흘러드는 고소한 향기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대화와는 다르게 수면 아래에서 치열하게 오고 가는 신경전을 뚫고도 들어왔다.
두 명의 하녀장과 두명의 하녀들의 시선은 이미 상대편 부인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시식 요원 세서미의 현란한 말솜씨에 빼앗긴지 오래였고 이를 참고 넘기려던 두 명의 귀족부인들도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한채 코만 벌름거리다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고기 샐러드는 고기를 볶은 다음에 이렇게 저희 코엘산 참나물과 함께 버무려서 샐러드로 해 먹으면 기름기가 많은 고기를 조금만 먹고도 배도 부르고 살도 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살을 빼준다는 단어가 귀족가의 여인들 사이에선 치트키나 다름없다는 걸 알게 된 세서미의 비장의 한수는 6명의 여인들을 단숨에 시식코너로 끌어 모으는데 성공했다.
‘좋았어.’
오늘도 시식을 전담한 직원들 중 매출 1위는 자신이 사수했다고 확신한 세서미는 박차를 가하며 조그마한 용기에 샐러드를 담아 6명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나눠 줬다.
“얼마죠?”
시식행사를 처음 경험한 캐서린과 두 명의 하녀들은 자연스레 캐서린의 손짓에 돈을 꺼내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세서미에 의해 막혔다.
“저희 마트에서 이렇게 하는 행사를 시식행사라고 하는데 이런 시식행사에는 따로 돈을 지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호호, 캐서린 자작부인은 오늘 시나브로 마켓에 처음 오셨던 거였나 보군요!”
마리는 일전에 호텔에서 당했던 캐서린의 일격을 기억하고 한동안 분해서 밤잠을 설친 기억이 불현듯이 떠올라 캐서린에게 촌년이라 넌 이런 것도 모르냐고 돌려서 꼽을 줬다.
“시나브로 마켓만의 특이함이죠. 처음 오신 분들이나 지방에서 오래 계신 분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갑자기 말로 얻어맞은 캐서린은 뭐라고 반격을 해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얼굴까지 붉히면서 언성을 높이는 건 결국 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캐서린 자작부인. 이 샐러드라는 음식은 갓 만들어 놓았을 때가 가장 싱싱하고 맛이 좋습니다. 어서 드세요.”
이전에 와서 다른 종류의 샐러드를 먹어 봤던 마리는 마침내 캐서린 자작부인을 향해 최후의 K.O펀치로 ‘샐러드라는 거 처음 먹는 넌 유행도 못 따라 가는 아싸구나.’라는 함의를 담아 말을 꺼내며 익숙한 듯 샐러드를 포크로 찔러 먹었다.
오랜 시간 앙숙의 관계였던 캐서린은 마리가 어떤 의미로 말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갈며 붉은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이게 그렇게 매운 음식은 아닌데 매우신가요? 얼굴이 많이 붉어지셨네요?”
환희에 찬 마리의 얼굴에 캐서린은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선 교양 있는 귀족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참으면서 참기름과 들기름을 한박스씩 주문한 뒤 마켓을 떠났다.
“아이, 고소해~”
참기름 향과 들기름의 향이 입 안에 가득한 샐러드의 맛을 즐기는 마리 백작 부인은 너무나 통쾌해 즐거워 했고 캐서린 자작 부인은 돌아가는 마차 안에 가득한 고소한 향기를 맡으며 터져 나오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내질렀다.
“나쁜 년! 나쁜 년! 빌어먹을 년!”
시식행사 도중 벌어진 이런 상황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참기름 대전’이라고 명명되어 알려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둘 사이의 일로 참기름이 알려져 불같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들었어요? 캐서린 자작부인이 열을 받아서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이 고소한 향기가 나는 기름들을 한박스씩 사 갔다는 거.”
“그래서 이렇게 사러 온 거 아니겠어요.”
“세서미라고 했죠? 저도 한박스씩 주세요. 이번 연회 때 이걸 활용해서 음식들을 선보여 봐야겠어요.”
이슈가 된 참기름과 들기름의 판매는 사실 다름 아닌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세서미의 뒷홍보와 함께 당시 마켓에 왔던 다른 귀족 부인들과 하녀들의 입을 통해 퍼진 입소문이 시작이었다는 것이 섀넌의 보고 결과였다.
“우리에겐 참 고소한 싸움이네요. 세서미 직원은 앞으로 시식행사를 전담해서 기획하는 팀장의 위치에 올려주세요. 대신 너무 과한 뒷홍보는 추후에 밝혀졌을 때 사람들에게 역풍이불 수 있는 일이니 앞으론 자제해달라고 하시구요. 속은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좋아할 수 없어요. 더구나 이야기의 주인공인 귀족들이 자신들이 이용당한 걸 알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합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