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86화-ㄷㄷㄷㅈ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하하, 이런 이벤트는 자주 있는 게 아니지!, 안 그래, 랄프?”
귀족군은 농민군이 수는 많아도 보급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굳이 어렵게 키운 기사들을 이런 전장에서 허무하게 잃는 것보다는 고용한 용병들로 하여금 힘빼기 작전에 들어갔다.
매일 일당을 받고 있는 용병들 입장에서야 수당이 늘어나는 상황이니 용병들만 신이 난 상황이었다.
“눈먼 창만 조심하면 어지간해선 죽을 일도 없고 적당히 치고 빠지기만 해도 돈을 주니 얼마나 좋아!”
“이 개같은 용병들, 너희들이야말로 진정 개보다 못한 놈들이구나. 우리가 이토록 귀족들에게 싸우는데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인 니 녀석들이야말로 함께 저 귀족들을 죽이는데 힘을 합쳐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너희들이랑? 들었어, 헤프너?”
용병과 대치중이던 한 농민이 쓰러져 죽기 직전 단말마같은 외침을 내뱉었지만 용병은 가차없이 그의 심장에 칼을 박으며 소리 질렀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군. 땅만 쳐다보고 사는 농부와 칼밥 먹고 사는 우리같은 분들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그래, 너희들을 위해 싸우면 우리에게 돈이 떨어지나, 밥이 떨어지나, 퉷!”
죽은 농부의 시체에 침을 뱉은 용병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도는 하이에나처럼 전장에 다시 합류했다.
“돈도 없는 거지새끼들이 어디서 감히 정의를 논하는 거야? 내가 어릴 적에 마을에서 동생이랑 굶어 죽어갈 때도 그 정의를 베풀었으면 나 같은 용병은 생기지도 않았겠지.”
“랄프, 개소리는 신경 쓰지 말고 한 놈이라도 더 칼맛을 보여주자고.”
전장에선 칼과 창이 부딪히고 방패와 창이 부딪히는 소리와 악다구니 그리고 비명이 난무했고, 사람들이 뿜어낸 피가 마치 안개처럼 옅게 흩어져 있었다.
농민군에 맞서 방패와 칼로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전장에 이골이 난 용병들은 쉬이 지치지 않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농민군들은 점점 바짝바짝 악에 받혀 기력으로 버티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슬슬, 기사들이 투입되면 좋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총사령관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보거농.”
전장에선 가끔 의도치 않게 실수하여 죽는 용병들 소수가 있었으나 언제나 더 많이 죽는 것은 농민군들이었고 처음에 압도적이던 숫자는 더이상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비트레이 후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움직이는 귀족군은 적당히 때가 무르익었다 싶어 용병들에게 줄 돈도 아낄 겸 쓸어버리라고 대규모 전투를 준비했다.
“젠장, 우리를 위해 싸워 줄 사람들은 없는 건가?”
“하지만, 하지만...”
계속되는 패전과 굶주림에 지친 농민군들에게 ‘페일’과 사제의 격려는 어느 순간부터 잘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제 전장에서 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군요.”
“사제들에게 오늘 밤은 두 개의 달빛이 약해지는 날이니 야음을 틈타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전파하세요.”
“이들을 더 돕고 싶은데 안타깝습니다.”
“교황님의 지시가 더 중요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린 사제는 강경하게 말하는 파견단장의 말에 더 이상 반대되는 의견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귀족군들에게 농민들이 모두 죽는 걸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적당히 밀리면 농민들이 먼저 항복을 하게 될 겁니다. 귀족들도 귀중한 인부들을 그렇게 다 죽여 버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아직은 솜털도 다 사라지지 않은 어린 사제의 앞에서 한마디 말을 하려다 삼킨 단장은 사제들에게 스마르 교의 신을 위한 성전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때를 기다리며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이번 전쟁에서 돈이 될 만한 거라곤 농민들뿐인데 그렇게 쉽게 다 죽여 버릴 귀족들이 아니지.’
다음날이 되자 귀족군의 진영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본 농민군들의 사기는 여지없이 바닥 밑의 바닥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배고파.”
“우리는 도대체 뭘 위해 싸우고 있는 거지?”
“허기져서 싸울 기운도 없네. 이 허여멀건 죽도 지겨워.”
다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멀건 죽을 허겁지겁 들이키곤 상대방 측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오늘은 사제님들이 보이질 않는군.”
“그러게?”
“사제님들은 어딜 가셨지?”
“새벽에도 보이질 않았어. 평소같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기도를 해주시면서 돌아다닐 시간인데.”
이내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퍼지고 농민군의 대장인 빈스 멍beans mung도 이 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사제님들이 모두 사라지셨답니다.”
“뭐라고?”
몰락한 귀족의 후손인 빈스의 아버지는 영주가 또 다시 불이 번질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돌담을 쌓는 일에 필요하다면서 영지민들에게 가혹할만큼 부과한 세금에 저항하다가 모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그 뒤 빈스는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빈스가 입버릇처럼 자주 하는 말은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모두 죽는 것만 못하다”였다. 그래도 몰락한 귀족의 자손인 빈스는 아버지를 통해 글을 익힐 수 있어서 부업으로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읽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분노를 머금고 살던 빈스에게 농민들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굶주림의 공포와 대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된 이들의 두려움을 말하는 스마르 교의 교리는 크게 와닿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제공된 신의 선물 ‘페일’을 복용한 이들이 큰 고통 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걸 볼 때마다 신에 대한 신앙이 커지기도 했다.
농민군이 일어서고 지역에서 인망이 높고 기본적인 학식을 갖춘 빈스는 곧 농민군의 지도자로 자리 잡게 되었고 힘겹던 농민군의 지도자 자리를 도와주던 사제들의 존재는 빈스에게 큰 힘이 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 말도 없으셨는데...”
“대장, 혹시 도망간 거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사제님들이 왜?”
자신이 믿어온 스마르 교의 사제들이 전장에서 이탈했다는 말에 누구보다 패닉을 경험한 빈스의 천막에 한 남자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귀족군이 대규모 출정을 준비 중입니다.”
“뭐?”
“진짜야?”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참말입니다. 기사들이 말을 이끌고 나올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있었습니다.”
“이...이럴 게 아니지. 모두에게 전투를 준비하라고 해라. 오늘이 우리 농민군의 미래를 결정지을 날이 될 것이야.”
믿었던 종교지도자들의 배신으로 패닉에 빠져 있던 빈스는 어이가 없는 상황에도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전투준비를 서두르라고 다그쳤다.
“빈스 대장,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개도 꼬리를 밟으면 주인을 문다. 하물며 우리는 사람인데 짖을 줄도 모르면 영원히 죽는 것만 못한 신세가 되어 귀족들에게 착취를 당하겠지.”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는 겁니까?”
“이대로는 사는 것도 죽는 것만 못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전장에 설 준비를 다 해간다는 참모의 말에 빈스는 천막을 걷고 나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쳐다 봤다.
“죽기엔 너무 아쉬운 날이군.”
청명한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들판에 모인 양측은 전투를 앞두고 있어 시끄러웠다.
“신은 없는 건가?”
“신이 있었다면 날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진 않았겠지, 안 그래?”
“스포보인지 모스다인지 빌어먹을 신들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 불도 안 났을 거고 영주한테 옆집 해리가 죽은 아버지의 앞으로 나온 세금을 안 낸 것에 항의하다 죽지도 않았겠지.”
“어느 집 신인지 멍청하구만.”
약간의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마음속에 가득한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려고 신을 욕하고 전장에서 도망친 사제들을 욕하면서 달래보려고 했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은 눈을 감았다 떠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전장의 시간만 가까워지고 있었을뿐.
“올해 밀을 모두 걷고 나면 그녀에게 청혼하려고 했는데 말야.”
“빌어먹을 소리는 하지 말라고.”
“내 딸 지젤이 보고 싶어.”
“거참, 죽을 것 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니까.”
귀족군 측에서 나팔을 불고 말이 투레질을 하면서 돌격준비를 할 때쯤 어디선가 괴상한 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기기기기기긱
우웅우웅
위위이이잉
“이게 무슨 소리야?”
“오른쪽을 봐봐. 해가 떠 있는 쪽.”
커다란 10개의 무언가와 그 뒤로 짐마차가 줄줄이 엮인 채로 굉음을 내뿜으며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마찬가?”
“말은 안 보이는데?”
“말보다 커.”
말보다 큰 10개의 무언가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전장에 접근했고 시간이 지나자 정지했다.
“뭐지?”
“저것들은 뭔가?”
“저번에 트리니티 상단에서 불을 끄기 위해 보냈던 소방차라는 물건과 비슷해 보입니다.”
귀족군에서도 소요가 일었지만 맨 앞에 선 물건에서 뚜껑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자 조용해졌다.
뚜껑을 열고 나온 사람이 손에 무언가를 쥐고서 가져다 대자 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아, 레이스 이거 마이크 되는 거 맞아요?]
[네, 소리 나옵니다.]
[되는 거구나.]
[사장님, 마이크 소리 지금 스피커로 나오고 있습니다.]
[헉. 철컥]
“아, 첫인상이 진짜 중요한데.”
랜드 레이스는 평소에 자신만만하면서도 단단해보이던 사장의 모습과 다르게 실수를 보이며 머쓱해 하는 모습이 살짝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아냈다.
“후우후우.”
난 심호흡을 마치고 다시 뚜껑을 열고 나가 마이크를 쥐고 마치 좀 전의 상황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대치중인 귀족군과 농민군에게 알립니다. 금일 이시간부로 현 상황에 대해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시나브로의 사장 제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자꾸 이장님 톤이 되려고만 하는 걸 억제하고 마이크를 쥐고 외운 대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부터 전투를 벌이는 측은 시나브로 사社의 제재가 있을 수 있으니 이상행동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측의 대표는 나와서 현재 제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거 뭐라고 하는 건가?”
비트레이 후작은 기껏 자신과 정리한 사항은 어디다 팔아먹고 황제가 보낸 전권대사랍시고 엉뚱한 게 왔는지 어이가 없었다.
“무시하시죠. 기껏해야 저런 거 10대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측에서 중재를 위해서 대사를 보냈다고?”
빈스는 패닉의 상황에서 겨우 자신을 가다듬고 죽음을 각오한 이 판에 나타난 존재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뒤에 길게 서 있는 허름한 옷차림과 여기저기 피가 말라붙어 추레한 모습의 농민들을 보고 나니 죽음을 각오했던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전쟁 안 해도 되는 건가?”
“어이어이, 황제께서 우리들을 위해 사람을 보내셨다니?”
양측의 판이한 반응은 망원경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난 귀족군 측이 군사적 행동을 하려고 하기 직전에 한 번 더 마이크를 켰다.
[귀족군 총사령관 비트레이 후작님, 지금부터 저희의 요구를 따르지 않아서 발생하는 상황은 저희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군사적 행동은 자제하시고 대화를 나눌 전령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쟤들이 멈출 리가 있겠어?”
“역시 그럴까, 드마코 형. 그럼 안되는데.”
“경고사격을 한번 해보면 다른 반응이 있겠지.”
“1번부터 10번까지 포탄 사격 준비”
나의 무전에 10대의 탱크가 일제히 공포탄 사격 준비를 마쳤다는 무전을 보내왔다.
“양측의 중간지대에 사상자가 없도록 일제히 사격!”
펑펑펑
쾅!
귀족군이 나팔을 불고 기사단이 튀어나오는 순간에 맞춰 발사된 포탄의 포격은 양측의 중간지대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말들이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세우고 일어나자 기사들은 질주하려던 스텝이 꼬이고 귀족군들이 있는 앞에서 얼마 가지 앉아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저...저게 뭔가!”
"신이시여!"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포탄의 후폭풍을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목격한 귀족들 일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일부는 심지어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농민군 측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기절하지 않은 이들 대부분 신의 힘을 경험한 듯 들고 있던 창은 내던지고 바들바들 떨며 엎드려 신에게 사죄를 청하는 이들이 즐비하여 더 이상 전쟁을 진행하고 말고 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