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1화-후폭풍(3)
“빌어먹을!”
“술, 술이 먹고 싶어 죽겠어.”
사람들이 먹을 곡식이 부족하니 밀로 만든 맥주를 금지하란 황제의 명은 제국 내에선 식량 생산량이 정상화되기 전까진 술의 제조를 금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국 전체적으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임에 틀림이 없었으나 이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행동은 전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았다.
“한달 용돈이 고작 20실버고 이래저래 나가는 돈을 쓰고 남는 돈으로 하루에 한잔 마시는 게 인생의 즐거움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빼앗아가나?”
“어제는 마누라가 이제 앞으로 술 안 먹어도 되니까 용돈 더 줄여도 되지 않냐고 묻더니 앞으로 용돈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통보를 하더군.”
“귀족 놈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잘만 먹고 마신다던데 왜 평범한 우리들만 술을 못 마시는 거냐고, 왜!”
“나라에 식량이 부족하다잖아.”
“에이 씨. 하필이면 왜 대화재가 나가지고.”
“그것도 그거지만 열 받는 건 귀족들끼리 우리가 가진 골드나 실버, 브론즈의 함량을 반으로 줄인거지.”
“갑자기 상회에서 물건을 싸게 팔라고 지시가 내려오나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이말이지?”
“그 정보를 나도 미리 알았으면 쟁여놓은 비상금으로 물건 사놓고 나중에 되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비상금을 잘 갖고 있다가 2배,3배로 뻥튀기나 하는 건데.”
“그거 윗사람들 몰래 파느라 죽을 고생한 거 생각하면 생각도 하기 싫다.”
“우리 같은 놈들이 그런 고급정보를 어디서 구하냐?”
상회에서 물건을 싣고 내려놓는 일을 주로 하는 직원들이 내놓는 불만은 제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축소판이었다.
“어이, 거기.”
험상궂은 표정의 남자가 나타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신들에게 말을 걸자 자기들이 쪽수는 많은데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야, 너 부른다. 가 봐.”
“무슨 소리야. 해머, 너 부르는 거 같은데.”
“거기, 형씨들 4명.”
“다 부르는 거잖아.”
“어디 잡혀가는 거 아니야?”
네명이 서로 눈치만 보면서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험악한 이상의 남자가 말을 다시 걸어왔다.
“형씨들, 방금 술이 마시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그런데요?”
남자가 묻는 질문을 듣자 자기들이 생각한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네명의 남자들 앞으로 얼굴에 칼자국이 길게 새겨진 덩치 좋은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가진 좋은 술이 있는데 원하면 팔 생각이 있네.”
“상회에서도 술을 구입하거나 판매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쪽은 술이 있습니까?”
“당신들 먹을 술은 얼마든지 팔 수 있어.”
“잠시만 저희들끼리 이야기해 봐도 되겠습니까?”
해머가 동료들을 이끌고 잠깐 뒤로 빠져서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야, 지금 가지고 있는 비상금 다 모으면 얼마야?”
“너 저 말을 지금 믿어?”
“괜히 믿었다가 비상금 모아서 다 털리면 어떻게 하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저번처럼 우리는 죽을 고생하고 상회만 돈 버는 그런 거 말고 우리도 뒷돈을 좀 벌어보자고.”
“저 남자한테 술을 사서 팔아 보자고?”
“이 두 놈이랑은 다르게 케인은 역시 말이 통하네. 요즘 술만 있으면 얼마든지 비싸게 팔아치울 수가 있는 거 몰라?”
“일단 저 남자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네.”
“미쳤어? 해머! 케인!”
“카이, 내 말 한번 들어 봐. 어차피 우리가 가진 비상금을 다 모아 봐야 저 남자에게서 술을 사서 마셔봤자 몰래 몇 번 취하는 게 전부일거야. 그런데 너희들도 알잖아. 레이미 상회의 직계 가족들은 물건을 저렴하게 원가로 사서 자기들은 싸게 쓰는 거. 저 남자한테서 우리가 술을 사서 팔아주고 이익의 일부로술을 마시면 몇 번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 또 다른 돈주머니가 생기는 거지. 황제가 내린 금주법이 끝이 나기 전까진.”
“해머 말이 일리가 있어. 대신 저 남자가 우리에게 물건을 계속 가져다 줄 수 있을 만한 물량이 있는지부터 확인해보자.”
상회에서 하는 일은 별 차이가 없음에도 정직원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가져가는 자신들 넷의 처지는 언젠가 정직원이 될 날만 기다리곤 있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는 거 어떻습니까?”
“앙?”
‘빨리 물건 팔고 할당량 전부 팔아치우려면 골치 아픈데 괜히 돈도 없는 인간들한테 잘못 물었나?’
카폰은 이 놈들이 처음엔 자신을 보고 쫄았다가 이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담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오히려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길래 뭔 수작인지 어이가 없었다.
“당신들 상회에서 물건 싣고 내리는 일하는 잡일꾼들 아니야?”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는 거지요.”
“내가 형씨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 빨리 대답이나 달라고. 술 살거야, 말거야!”
조직에서 내려온 물량을 팔아 치워야 할 책임을 맡게 된 말단직원 카폰은 짜증이 나서 확 소리를 질렀다.
“살 겁니다. 사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거죠. 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좀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갑시다.”
카폰은 눈앞의 놈이 점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은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서 말을 건 첫 번째 손님이었으니 처음부터 물건을 못 파는 것보단 파는 게 낫겠다 싶어서 네명의 남자들을 따라 가며 허리춤 뒤쪽에 숨겨둔 두 개의 단검을 확인했다.
‘여차하면 찌르고 튀던가 해야지.’
“그래, 여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그만 가지. 이봐들, 여기서 이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한번 말해 봐.”
주변을 둘러본 해머는 동료들에게 망을 보라고 하고선 눈앞의 남자에게 다가가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기회다. 이건 기회다. 레이미 회장도 분명 이런 순간이 있었을 거야.’
“흠, 저희 입장에선 팔아야 되는 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정말? 형씨들, 별로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데? 기껏해야 4명이서 50L짜리 맥주 한통 사갈까 말까 아니야?”
해머는 귀신같이 자신들이 가진 비상금의 합계를 얼추 때려맞춘 남자의 눈치에 소름이 돋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대사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당신 이름이 뭡니까?”
“알 카폰인데 그건 왜?”
“카폰 님, 딱 보니까 조직에서 내려온 물건 할당량 팔아 치우려고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물건을 저희들에게 갖다 주시고 판 물건에서 수익의 20%만 수고료로 떼 주시면 저희들이 가져오시는 물건 모두 팔아드리겠습니다.”
“20%?”
자신이 이 물건들을 다 팔아치우면 수익의 30%를 받는 것이 조건인데 거기서 20%를 떼어주면 조금 수고롭더라도 자신이 파는 게 나았다.
“너무 많습니까?”
상인들의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형님들에게서 곧잘 듣곤 했던 카폰은 섣불리 자신의 패를 까보이는 바보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해머를 노려보며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는 애매한 자세로 대꾸했다.
‘젠장, 많다는 거야. 적다는 거야.“
“그럼 이렇게 하죠. 카폰 님이 가져갈 수익의 절반. 절반만 저희들에게 주십시오. 가져오는 물건은 저희가 다 팔아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이놈 저놈 붙잡고 파는 것보단 훨씬 가져가는 수익의 비율이 높을 겁니다.”
‘15%라... 조금 더 깎고 싶은데.’
“수익의 10%. 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너희들이 파는 대가로 그 정도는 약속하지.”
“10%입니까?”
망을 보면서도 둘의 대화에 의식이 쏠리던 세명은 카폰에게서 10%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해머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뭘 고민해, 해머!’
‘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빨리, 좋다고 대답해.’
“흠, 좋습니다. 더 받아야 하는 것이 맞지만. 10%로 시작하도록 하죠. 오늘은 현금 15골드를 드릴테니 우선 15골드치부터 거래를 시작하는 걸로 합시다.”
한참을 어떻게 물건을 받을 것이며 수익금은 어떻게 받을지를 이야기한 뒤 계약서를 쓴 5명은
이내 물건이 보관된 곳으로 이동해서 15골드치에 해당하는 맥주통을 건네받고 헤어졌다.
“해머, 10%에서 왜 고민했어?”
“왜긴. 레이미 회장님이 누누이 이야기한 게 ‘이익이 있다면 불구덩이 속으로라도 들어가라’, ‘동물적 감각으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이익을 놓치지 마라.’ 그런 거였잖아. 근데 진짜 저 카폰이란 남자랑 대화하고 있으니까 느낌상 수익비율을 좀 더 올려볼만한 여지가 보이더라고.”
“근데?”
“첫 거래부터 너무 많은 걸 요구하면 상대방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더 큰 거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다. 이거지?”
“대단한데, 해머? 다시 봤다.”
레이미 상회의 4인은 이날을 시작으로 카폰과 협력하여 자기들이 레이미 상회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알게 된 수많은 거래처들을 활용하여 비밀리에 물건을 신나게 팔아치웠다.
“보거농, 맥주는 잘 팔리는가?”
“말해 무엇합니까? 없어서 못 팔 지경입니다. 조직원들 중에 말단이었던 카폰이란 녀석이 특히나 물건을 잘 팔아치우더군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둘 밖에 없음에도 누군가 들을 수도 있다는 듯 보거농 자작이 비트레이 후작 가까이로 다가가 귓속말로 속닥이자 비트레이 후작이 기함을 토했다.
“밀주가 이렇게 돈이 된다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보같은 에드워드 백작이나 황제는 후작님의 말씀에 귀찮아하거나 의심을 할지언정 깊은 의미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건 그랬지.”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밀주가 돈이 된다는 걸 안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밀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흠, 더 챙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입니다. 밀주가 이렇게 성행하는데 제국의 감찰대에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어졌을 겁니다. 이젠 빼야 할 때입니다.”
“보거농,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해. 난 혼자 기분좋게 시나브로의 꼬냑이나 마시면서 즐겨야겠군.”
비트레이 후작이 자신을 칭찬하고 크게 만족해하며 나가자 보거농 자작도 기뻐했다.
“밀주 판매자들 중에 제가 뿌려놓은 녀석들이 꽤 된다는 사실은 저만 알고 있기로 하겠습니다. 후작님. 저도 후작님 밑에서 일하는데 이 정도 이득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트레이 후작에게 상납할 금액의 3배를 더 챙긴 보거농은 딸에게 선물로 사줄 로로 시스터즈의 새로 나온 앨범을 구매해갈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거봐요. 금주법을 하면 무조건 밀주제작자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니까.”
“우리도 덕분에 막걸리를 이번 기회로 많이알릴 수 있었으면 됐지.”
금주법을 시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준비해서 맥주를 밀주로 판매하는 이들이 있다는 첩보를 얻자마자 제국에 막걸리를 팔아치우기 시작한 덕분에 이리저리 기름칠을 하고 크고 작게 들어간 비용처리를 모두 빼고서도 이곳의 화폐가치를 환산했을 때 한화로 500억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제국에서 결정된 사항을 뒤집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난 어차피 정해진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례를 통해 확신을 갖고 수익을 챙기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얻어진 수익금은 앞으로 발생할 기아나 난민들을 돕는데 활용할 예정이었는지라 그 때문에 더 큰 수익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 술을 더 못 판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앞으로 2년은 지옥같을 수 있어요. 이제 곧 각지에서 민란이 시작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