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80화-후폭풍(2)
단번에 만들어낼 수 있는 화폐가치를 2배 증가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물타기는 언뜻 들으면 너무나 기발하고 좋은 계책인 것 같지만 큰 함정이 있다.
“좋은 돈과 나쁜 돈은 같이 돌아다닐 수 없어요.”
“정후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순금으로 된 골드와 50%함럄의 골드 주화가 있으면 사람들은 순금으로 된 골드를 집에 숨기게 되겠죠.”
“그럼 시장에는 함량이 절반 정도만 포함되어 있는 주화들만 돌아다니게 되겠네.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야? 난 들어도 잘 모르겠는데?”
코엘 누나는 함량 50%짜리가 돌아다니게 되었을 때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잘 모르겠는지 갸웃거렸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만들어지는 주화들은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에요. 일정한 금속의 무게를 대가로 교환의 약속을 맺은 거죠. 돈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암묵적으로 그 가치에 대해서 동의의 의사표시를 하고 사용하고 있어요. 1골드는 100실버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1실버는 100브론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약속을 국가가 먼저 어겼다?”
“이제 시장에서 기존의 주화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질 거예요. 상인들도, 제국민들도 모두 바보가 아닙니다. 제국의 결정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기존의 주화들을 찾아서 챙기려고 들겠죠. 기존의 주화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못해도 2배로 재산을 불릴 수가 있어요. 골드, 실버,플래티넘을 모아서 녹여서 파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면 기존의 화폐가치가 반으로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겁니까?”
“맞아요. 빅터, 정확히 절반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급격한 하락을 불러 오겠죠. 그로 인해서 돌아올 파급효과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이제 어마어마한 물가폭등이 있을 거란 것이고 두 번째는 제국의 화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깨졌다는 거죠.”
이제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두들이 제국의 결정이 가져올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맙소사, 미친 짓을 저지른 것이 맞군.”
“한번 깨진 신뢰는 어지간해선 복구가 안되는 법인데 로만이 대형사고를 쳤구나.”
“빅터, 이걸 빨리 황제나 귀족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닐까?”
에디나 누나가 빅터 교관에게 반말로 물어보자 빅터 교관은 별 의식을 하지 않는 것 같더니 고개를 저었다.
“세븐시티에 이 정보가 들어오기까지 1주일이나 걸렸어요. 그리고 한번 정해진 결정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황제의 결정은 그만큼 무거운 거니까요.”
빅터 교관의 말에 새삼 이곳이 현대가 아니라 이세계의 어느 나라라는 인식이 다시금 다가왔다.
“그건 빅터의 말이 맞아. 황제의 결정을 뒤집는다는 건 황제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이고 이걸 가만히 내버려둔 귀족들이 멍청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귀족이나 황제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야.”
드마코 형의 귀족들을 향한 차가운 냉소 섞인 대답에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정보를 얻지 못하거나 늦게 얻게 될 위치에 속한 사람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하겠군요.”
“정후 사장의 말이 맞습니다. 가뜩이나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많은 이들이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마코 형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굶어죽을 상황에 처한 이들이 무슨 저지를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 누구도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을 것을 선택하진 않을 거야.”
“그럼?”
“굶어 죽게 만든 자들에게 그 대가를 같이 치르도록 요구하겠지.”
정작 함량 미달의 골드와 실버가 주조되어 퍼지기도 전에 제국의 결정은 귀족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고 상인들은 신규 주화가 퍼지기 전에 기존의 주화들을 자기들이 거둬서 크게 남겨 먹을 속셈으로 기존보다 20%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아니, 샘 상회에서 무슨 일이야? 갑자기 할인을 해서 물건들을 판다니?”
“하하, 저희 상회를 이용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면서 상회주께서 할인행사를 기획하셨습니다.”
“이거 이럴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한테 어서 와서 물건을 사두라고 말해야겠어.”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샘 상회의 이런 결정을 지역 내에서 샘 상회를 맹렬하게 추격하며 2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레이미 상회에선 2일이 지나고 나서 지나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지점 직원들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보고를 받은 레이미 회장은 긴급회의를 하기 위해 즉시 상회의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샘이 고객들을 위해 감사의 의미로 할인행사를 한다고? 그 자식이?”
“아버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럴 놈이 아니야.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자식이 갑자기 이런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회장이 길게 놓인 테이블의 가운데에서 양쪽의 임원들을 둘러 봤지만 다들 무슨 이유일지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치노 가문에 이렇게 사람이 없단 말인가?”
샘 상회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임원으로 뽑아 성장했다면 레이미 상회는 치노 가문의 사람만을 믿을 수 있다면서 혈족들만 임원으로 삼았기에 냉철한 면은 부족했지만 레이미 회장의 결정이 떨어지면 한마음이 되어 모두가 달려들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공식석상에선 할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이라고 해야지. 아무리 가문의 인원들만 있다고 해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회장님?”
자신의 아들이 말하는 내용을 자르고 아버지께 어필하려고 하는 둘째 여동생이 아니꼬웠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장남인 제이미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키미야, 니 말도 일리는 있다만 우선은 아무도 무슨 이유인지 짐작하는 사람이 없으니 데이미가 말하는 것부터 들어보고 싶구나. 데이미, 하려던 말이 뭐지?”
“네, 할아버지. 그게 아니라 제가 드리려고 했던 말씀은 샘 상회만 저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저희 프린스 클럽에 속한 아이들에게서 듣기로는 샘 상회처럼 갑자기 할인행사에 들어간 상회들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샘 상회만 저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잘 나가는 상회의 자식들만 모인 곳에서 그런 이야기가 돈단 말이지.”
항상 술만 먹고 들어오는 자식을 보면서 화가 났던 게 한 두번이 아니었던 제이미는 자기 자식이 그래도 술만 처먹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아들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엊그제 엘 상회의 차기 회장으로 꼽히는 나인이 하는 말을 잘 들어두길 잘했다. 한동안은 술 마시러 다녀도 아빠가 뭐라고 하지 않으시겠지.’
데이미의 말을 곱씹던 레이미는 직감적으로 자신만 모르고 있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선, 우리도 바로 샘 상회처럼 상회에 속한 모든 지점에서 가격을 할인해서 판매하도록 지시를 내려야겠다.”
동물적인 자신의 감각이 남들이 갈 때 따라서라도 가지 않으면 나중엔 따라가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음을 뱉는 것 같았다.
“이유는 나중에 알아도 늦지 않아. 뭐해, 어서 움직여! 우리는 샘 놈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서 25% 할인해서 판다. 그 정도는 되어야 샘 상회로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우리가 잡을 수 있겠지.”
레이미 상회의 결정은 가문의 사람들답게 신속하게 퍼져서 적용되었고 이내 샘 상회의 지점들로만 가던 고객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레이미 상회의 지점들의 매출은 이전보다 급증했다.
“눈치챈 건가?”
3일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과 똑같은 할인 전략을 쓰는 레이미 상단의 움직임에 맞춰서 어쩔 수없이 25% 할인을 결정하여 지시를 내린 샘 회장은 보고서를 보고 책상에내려놓았다.
“그래도 아쉽군요. 며칠만 더 늦었으면 좋았을텐데.”
“기획실장, 레이미 그 놈이 어떤 놈인줄 기획실장이 잘 모르는 것 같군.”
“저희의 예상으론 못해도 저희가 전략을 실행하고 1주일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이미가 없었다면 1주일은커녕 우리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해 따라하지도 못했을 거야. 레이미도 아마 이해하고 따라한 것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 놈은 동물적인 감각이 매우 비상한 놈이야. 우리가 후원하는 보거농 자작으로부터 이 정보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해도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따라서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으로 움직이는 놈이거든.”
기획실장 케이퍼는 샘 회장의 설명에 도리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얻은 고급 정보를 알지 못하는데 우리보다 5%를 더 할인해서 판단 말씀이십니까?”
“그 놈은 그런 놈이야. 아무튼 며칠 먼저 우리가 이득을 봤으니 결과적으론 우리가 좀 더 이득을 더 볼 수 있겠지. 기획실에선 보거농 자작이 준 정보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질 ‘뉴 코인’이 퍼지는 시점 이전에 할인계획을 잘 마무리 짓도록 하게. 우리는 손해보지 않으면서 레이미 상회만 손회를 보게 말이야.”
“알았으니 가서 일 보게.”
기획실장을 내보내고 회장실에 혼자 있는 샘 회장은 어릴 적 자신과 경쟁하던 야채가게 청년 레이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 좀 올라봐라, 이놈아. 크크”
상인들이 이득을 보는 사이 제국의 국민들은 고급 정보를 접하지 못한 이들과 접한 이들의 차이는 이내 새롭게 만들어진 뉴 코인들이 시장에 퍼지고 나서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상인들같으니라구. 저번에 왔을 때만 해도 1실버짜리를 할인해서 75브론즈에 팔던 물건을 이제 와서 2실버를 내놓으라고 하면 누가 사? 살 곳이 여기밖에 없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도 위에서 정한 방침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제국의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고 제국의 국민들은 당장 평균적으로 물가가 2배나 뛰어버린 현실에 망연자실해했다.
“갑자기 가족이 2배로 늘어난기분이군.”
“말도 말라고. 부인이 한동안 술 마실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하더라고.”
“너도 그러냐?”
“하아, 요즘은 막걸리 마시는 게 내 낙이었는데.”
“이젠 술도 맘대로 못 마시는 건가?”
“그런 말은 하지도 말어. 말이 씨가 될까 무서워.”
“그냥 하는 소리지.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하, 또 무슨 일인가?”
황제는 시급히 모여야 할 일이 있다는 귀족파의 수장인 비트레이 후작의 말에 황제파의 수장인 에드워드 백작과 셋이서만 모이게 되었다.
“제 오른팔인 보거농 자작의 말로는 제국에 갑자기 온 이들이 너무 많은데다 평야지대에 번진 불로 올해 식량 생산량이 줄어들어 식량 가격이 크게 뛸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황제의 심드렁한 표정에 비트레이 후작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에드워드 백작을 잠깐 쳐다보곤 이내 대답했다.
“사람들이 먹을 밀도 부족한데 맥주를 마시는 일이 없도록 맥주 제조를 금지하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밀로 만든 맥주는 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에드워드 백작은 의견을 물어보는 황제의 눈짓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밀로 술을 만들어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걸로 하지. 됐나?”
“황제폐하의 제국민에 대한 애정을 모든 제국민들이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황제폐하의 마음을 뭐 굳이 제국민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딱하고 아는 것이지.”
“별 것도 아닌 거였군. 다음부턴 이런 일로 부르지 말게. 아니면 에드워드랑 둘이 해결하든가 하라고. 난 이만 바빠서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에드워드가 관리들에게 앞으로 밀로 만든 맥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황명으로 전달하게."
황제가 떠나가고 자기는 황명의 전달을 위해 일어나보겠다면서 에드워드 백작도 밀실에서 나간 뒤 비트레이 후작의 얼굴엔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거농의 말이 맞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