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78화-확산(2) (78/239)



〈 78화 〉78화-확산(2)

지첨jicheome은 용병임에도 다른 용병과 다르게 용병생활을 하며 번 돈을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평생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소왕국 배니쉬의 수도에 펍과 집을 만들고서 행복해하던 것도 잠시. 동쪽의 열대우림에서 번진 불이 배니쉬를 집어 삼켜오기 시작하자  살배기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어쩔  없이 세간만 일부 챙겨 도망쳐야 했다.
전쟁을 하며 익힌 것들 중에 유니언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서 지첨이 돈을 벌기에  만한 것이라곤 넘치는 힘과 건장한 몸뚱이뿐이었다.

전장을 떠돌면서 끝내 팔지 못했던 검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고 평생을 함께 해온 검을 팔고서야 지첨은 제국에서 건너온 ‘자전거’라는 물건과 그에 연결되는 부속품들을 구매할  있었다.
그렇게 산 자전거는 지첨의 벌이수단이 되었고 유니언의 수도에서 자전거에 사람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든 ‘인력거’ 혹은 ‘수레’를 연결해 귀족 나으리들을 모셔서 운반하거나  등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며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뭔 비가 이렇게 계속 내려, 빌어먹을.”

콜록콜록

지첨이 매일 자전거로 벌어오는 돈으로는 화재를 피하면서 연기를 들이마셔 폐를 다친 아내의 약값을 감히 감당할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니언의 수도에 있는 많은 신전들을 돌아다니며 부탁을 해봤지만 하나같이 큰돈을 기부할 여력이 없어 보이는 지첨의 아내를 치료해주는 신전들은 없었다.

지첨이 어쩌다 좋은 손님을 만나 후한 인심덕분에 돈을 더 받을 땐 제국으로부터 대량의 원조를 받게 된 쌀이라는 곡물로 만든 값싼 술인 막걸리를 마신다거나 유니온에 와서 아내가 처음 먹고 좋아하게 된 ‘국밥’을 어쩌다 한번씩 사줄 수나 있었을 뿐이었다.

방 안에서 들리는 아내의 기침 소리가 지첨의 귀를 후벼 팠다. 아픈 아내를 치료해주진 못하더라도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라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오늘은 나가 봐야 손님이 많을 것 같지 않았지만 나가야 했다.
지첨은 이런 날에 짐을 옮길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해 짐수레 대신 사람을 대신 태울  있는 인력거를 달고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호루를 쳤다.
그렇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으니  안의 문이 열리며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못하며 지첨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당신...오늘도 일하러 나가려구요?”
“그럼 놀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온다고 쉬고, 눈 온다고 쉬면 언제  버나, 이 사람아.”
“나 너무 아픈데 그러지 말고 오늘은 일하러 가지 말고 옆에 있으면 안돼요?”
“허어,  사람이 오늘 왜 이래?”
“저기...콜록...그럼...콜록...오늘 국밥 좀 사다줄래요? 몸이 으슬으슬한게 따뜻한 국밥이 먹고 싶은데.”

힘없는 몸을 겨우 열고 아프다며 같이 있자고 했다가 국밥을 먹고 싶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지첨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무엇이든 사주고 싶고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괜히 짜증을 내버렸다.
“이런 오라질 년! 먹어도 소화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국밥은 무슨. 사주면  다 토하려고?”
“미안해...요.”
“애나 잘 보고 있어. 나갔다 올테니. 에이.”

집을 나온 지첨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온몸이 젖었지만 오늘따라 호루를 치고 인력거를 준비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인력거꾼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 신전으로 가는 귀족 손님들이 계속 있어 아침에 개시를 기분 좋게 하고 오후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손님이 이어졌다.
‘몇 건만 더 하면 아내에게 오랜만에 국밥에 고기를 잔뜩 넣어서 사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이라면 다름 아닌 행군인지라 튼튼해진 다리로 시원시원하게 밟는 지첨의 자전거가 뒤에 앉은 남자의 관심을 샀다.
“자네, 비를 맞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군.”
“아닙니다. 나으리.”
“왜 이런 날에 집에서 쉬지 않고 이렇게 나와서 일을 하는 건가?”
처음 만난 남자가 자신을 존중을 해주는 사람인  같아 지첨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 놓게 되었다.
“사실은 아내가 조금 아픕니다. 신전을 돌아다니며 부탁해 봤지만 치료할 약은 꿈도  꾸는 상황인데, 아내가 국밥이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내가 많이 아픈가? 겉보기에 자네 몸만보면 무심하게 칼질만 잘 할 것 같이 생겼는데 신기하군.”
“손님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한때 칼밥으로 꽤 오래 먹고 살았습니다.”
“그럼, 용병으로 다시 뛰지 않고?”
“아픈 아내와 어린 아이를 두고 멀리 떠나기가 쉽지 않더군요.”
“자네, 멋있는 사내로군.”
일반적인 남자들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사내답지 못하다고  텐데도 뒤에 탄 남자 손님은 오히려 진심으로 칭찬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손님, 이야기하신 스마르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헉헉.”
“오늘 돈을 많이 벌면 뭘  생각인가?”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한 국밥이나 사갈 수 있으면 좋겠군요.”
“아, 얼마 전에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국밥 말인가?”
“네, 뜨끈뜨끈한 국밥을 먹을 때마다 아내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면서 참 좋아하더군요. 제국에서 들어온 뚝배기라는 물건을 뚜껑으로 닫고 국밥을 담아 가져다 주면 평소엔 기침이 잦은데도 아내는 뜨거운 연기가 폴폴 나는 국밥을 먹을 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맛있게  먹곤 합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돈을 꺼내 29실버라는 거금을 줬다.
2실버만 받아도 하루 일당보다도 훨씬 많이 받은 것인데 남자가 준 29실버라는 돈은 너무 거금이었다.
지첨은 귀족 나으리가 잘못 준게 아닐까 싶어 혹시라도 나중에 딴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손님, 잘못 주신 거 아니십니까?”
“돌아가는 길에 자네 가족들이 먹을 국밥을 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사는 자네 모습과 아내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보기에도, 듣기에도 참 좋았네.”

신전에서 나온 신녀들이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의 머리 위에 제국산 ‘우산’을 덮어 씌워주며 마중을 나왔다.
“오셨습니까?”
“들어가도록 하지.”
“안녕히 가십시오, 손님. 감사합니다.”

지첨이 비를 맞으며 스마르 신전에 들어가는 남자의 뒤에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받은 거금을 떠올리며 어서 빨리 아내에게 국밥을 사서 돌아갈 생각에 기뻐할 때 거금을 주신 손님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 스마르 신전에도 부탁해 보았나?  신녀들에게 미리 이야기해 놓을 것이니 아내를 위해 약을 사가도록 하게! 스마르 신전의 약은 정말 저렴하거든!”

거금을 주신 것도 고마운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신전으로 들어가는 남자를 향해 남자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스마르 신전은 와보지 않았던 것 같아. 손님 말을 한번 믿어볼까?”

남자로부터 들은 정보가 진실할 것이라고 믿은 지첨은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나서 신전의 입구에 서서 쭈볏거리고 있었다.
다른 신전이었다면 벌써부터 신전을 지키는 가드들이 다가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텐데 스마르 신전은 달랐다.
“무슨 일로오셨습니까?”

입구에서 얼쩡거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붉은 옷을 입은 신녀에게선 묘한 향기가 났다.
“저기...그게...”
“혹시 로마베 님께서 말씀하신 분이신가요?”
“누구요?”
“방금 전에 인력거에 로마베 님을 태워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붉은 망토를 두르고 계셨는데.”
“예예, 맞습니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계신 남자분께서 여기에 오면 아내를 위해 저렴하게 약값을 구매할 수 있을 거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
“로마베 님께서 이야기 해두신 분이 맞군요. 따라 오시죠.”

지첨은 붉은 옷을 입은 신녀를따라가며 상념에 잠겼다. 신녀는 집에서 앓고 있는 아내와 다르게 생기가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내 아내도 저랬다면 좋았을텐데...’

지첨을 안내한 신녀는 하얀색 액체가 든 투명한 무언가를 꺼내 보이며 지첨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페일이라는 스마르 신전의 특효약입니다. 아내 분이 기침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말을 기억해주고 이렇게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놓았을 줄 몰랐던 지첨은 붉은 망토를 둘렀던 손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더욱 표현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예, 맞습니다.”
“로마베 님께서 이야기하신 분이시니 오늘은 특별히 약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찾아오셔서 ‘비오는 날의 인력거’라고 이야기해주시면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해드리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로마베님이 말씀해주신 단어 옆에 성함을 적어 놓으려고 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지첨입니다. 지첨 골드”
“네, 메모해 놨으니까 아내 분이 아프실 때 찾아와서 이  값을 구매하실 때는 원래 가격이 1실버인데 지첨님께는 50브론즈로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로마베 님께서 지시하신 일인걸요.”

거금을 준 것도 고마운데 이토록 세심한 배려라니 지첨은 손님께 다시 한 번 마음으로 진심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아내에게  약이 비에 젖지 않도록 품에 잘 챙겨서 나온 지첨은 오늘 일은 이걸로 끝내고 손님의 말대로 자신의 가족들이 먹을 국밥을 사기 위해 국밥집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여기 국밥 3인분 포장  해주시오. 뚝배기는 나중에 반납하러 오겠소.”
“조금만 기다리세요.”
온몸이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떠는 지첨이 들어오며 국밥 포장을 요구하자 국밥집 아주머니는 지첨이 겉보기에는 산적처럼 보이는 것과 다르게 아내를 아끼는 다정한 남자라는 것을 아는지라 지첨이 안 보이도록 돌아서 빙그레 웃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지첨 골드 아니야?”
비에 젖어 식은 몸을 덥히기 위해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솥 옆에서 두 손을 가져다 대며 발을 동동거리던 지첨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누군가 싶어 뒤로 돌아 보았다.
“지스리?”
“이렇게 비오는 데도 일 했구만. 자네.”

같은 용병출신인지라 인력거꾼을 하게 되며 도움도 받고 마음이 맞아 친구가  지스리였다.
“뭐...그렇지.”
“이러지 말고 몸도 덥힐  한잔 하고 가지.”
“빨리 가야 되는데...”

오늘따라 많이 아파 보이는 아내가 눈에 아른거려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따뜻하게 몸을 덥히라면서 막걸리를 한가득 따라서 건네주는 지스리의 우정을 뿌리치기도 애매했다.
“세잔, 세잔만 마시고 가. 내가 누구야 지스리 아니야? 더 권하지도 않아.”
“그럼 자네 얼굴 봐서 세잔만 마시고 가도록 하지.”
“그래그래, 내가 이렇게  젖은 자네를 그냥 보내면 마음이 아파. 아줌마, 지첨의 포장국밥은 조금만 있다가 퍼줘요.”
비오는 날 손님도 별로 없는데 한잔이라도  팔면 좋은 국밥집 아줌마는 지스리의 말에 알았다면서 자리에 가서 잠시 앉았다.

지스리가 건네준 막걸리를 한 잔 마시자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달린 지첨의 위가 짜르르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캬아.”
“이 사람 이거. 막걸리 한잔  줬으면 큰일  뻔했구만.”

지스리와 마시는 막걸리가 오늘따라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요상했지만 지첨은 진짜 세 잔만 마시고 갈거냐고 붙잡는 지스리의 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세 잔, 세 잔만 더 마시고 가겠네. 이번엔 진짜야.”

지스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내의 생각을 계속하던 지첨은 지스리와의 대화에 도통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진짜 이제 가봐야겠어.”

비오는 날이라 가뜩이나 어두운데 이제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아내에게 국밥을 사다 주고 싶은 지첨은 다음에 자신이 한잔 사겠다며 약속을 하고 국밥 세 그릇과 서비스라면서 챙겨준 반찬들을 움직이지 않게 인력거에 잘 모셔두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응애응애.”

집 앞에 다가오자 들리는 아들의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구슬프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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