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6화-시동(2)
“휴, 이제 한시름 놓은 건가?”
“코코, 고생했어.여기.”
일반적인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와 다르게 소방대의 엘리트로 불리는 코코와 랜드 듀오는 최초의 소방차 운전자격을 획득하여 누구보다 빠르게 진화 작업에 투입되었다.
지난 1달간 소화 작업뿐 아니라 식수가 필요할 때 물을 나눠주는 작업을 하고 부족한 잠은 커피를 마시며 버텨 내느라 체력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하늘도 이들의 노력에 감복한 것인지 늦가을에 어울리지 않게 길고 긴 장대비가 내리면서 전염병처럼 번지던 화재도 겨우 끝을 맞이했다.
“자연의 힘은 역시 이겨낼 수 없는 건가 봐.”
“이렇게 대단한 물건으로도 우리가 한 거라곤 겨우 제국으로 번진 불을 잡고 버텨 내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빨간 색으로 빛이 나던 소방차는 화재의 현장에 다녀온 것을 증명하듯 검은 먼지가 잔뜩 내려 앉아 처음과 다르게 색이 바래 있었다.
“그래도 이 소방차라는 물건이 없었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겠지.”
“그건 맞아. 정말 다행이야.”
둘은 흙이 잔뜩 낀 소방차의 무한궤도에 기대서 피곤한 몸을 버티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진짜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비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내 말이. 둘 다 정신적으로 지쳐서 어디까지 진입한 것인지 파악도 안돼서 당황스럽던 차에 물이 똑하니 끊겨 버려서 패닉이었잖아.”
둘이 그 뒤로 한참을 그 순간을 떠들던 때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두 대원 모두 다친 곳은 없나?”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번개같이 일어나 뒤를 돌아보고 경례를 했다.
“아닙니다! 빅터 대장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자세 그대로 있어도 좋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불을 끄기 위해 목숨조차 내건 영웅들에게 그 정도 혜택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불편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많은 드워프와 엘프들을 구하여 드워프와 엘프들 사이에선 전설적인 영웅으로 이름 높은 빅터 그림우드와 대화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빅터는 두 사람의 그런 눈빛과 비슷한 눈빛을 경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지라 눈빛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이거, 빨리 전달할 내용만 주고서 비켜줘야 우리 영웅들이 쉴 수 있겠군. 오늘은 소방차 정비를 해야 하니 푹 쉬도록 하고 내일 오후엔 진화 작업이 종료된 도시 피델리에 가서 식수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좋군. 샤워장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오늘은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텐트에서 푹 쉬도록 하게.”
“안전!”
두 사람의 경례를 받고 악수를 나눈 뒤 두사람의 휴식을 위해 비켜주자 두 사람은 떠나가는 빅터의 등을 보면서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완전 멋있다.”
“은발의 기사, 빅터 그림우드의 옆에서 함께 일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 친구들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나중에 자랑해야지. 빅터 님께서 우리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악수를 해주시다니. 이 손 한동안 씻지 않고 싶다.”
“랜드...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위생 안전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 잊었어?”
“코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두 사람은 대화와는 다르게 빅터와 나눈 악수를 나눈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악수의 순간을 꽤 오랫동안 음미했다.
“드디어 불이 꺼졌어!”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이 팽배해.”
“선동작업이 생각보다 잘 먹히고 있는 것 같아, 에바.”
“때마침 비까지 내렸으니까요. 귀족들의 목을 잘라서 그들의 죄를 신들께 고하고 용서를 구하면 신들께서 용서를 받아들여 비를 내려주실 거라고 한 게 주효했어요.”
“비는 때가 되면 언젠가반드시 내리는 건데 말이지.”
“사람이란 존재는 그저 믿고 싶으니까 믿을 뿐인 거예요. 우리는 적정한 시점에그들에게 필요한 믿음을 내려준 거고.”
“그럼 우리가 신인 건가?”
“이 ‘페일’을 피우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신이긴 하더군요.”
에바 모르의 손에는 하얀색의 농축된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우리들이 이걸 만드는 비법을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 드워프 놈들과 트리니티에게 복수할 날이 분명히 찾아오겠죠.”
크로니클의 수작에 의해 함리스 상단과 배후의 투자자들로부터 축출당한 모르 가문의 일원들은 제국으로부터 도망쳐서 연합국에 들어왔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챙겨온 자금들은 가문의 여성들을 몰래 연합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의 모두 소진되어 굉장히 궁핍해진 상태에 몰려 있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모르 가문에게 신들이 축복해준 것인지 내려준 물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페일’이었다.
모르 가문의 일원들이 있는 지역엔 ‘페일’이라는 꽃이 많았는데 이 꽃은 신기하게도 상처가 나면 하얀 빛의 유액(乳液)이 흘러나왔다.
불이 번지면서 이 페일이 있는 지역에도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모르 가문의 일원들 중 일부가 이 와중에 페일이 타오르며 나는 연기를 들이마시곤 이상하게 기운을 못 쓰고 술 취한 사람처럼 헤롱거리면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를 위험히 여긴 에바와 모르가문의 수뇌부 여성들은 천을 뜯어 물에 적신 뒤 코와 입을 막고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이들을 챙겨 도망쳐야만 했다.
도망치면서도 그때의 상황을 잊지 않았던 에바는 불이 번지는 지역으로부터 도망치고 나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꽃을 찾아내서 유민(遺民)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하였다.
계속적으로 가문의 일원들의 도움을 받아 실험한 결과 이 꽃은 불로 태워서 냄새를 많이 맡으면 사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특이한 증세를 보였고 꽃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액체를 먹이면 진정·진통·진경(鎭痙)·진해(鎭咳)·지사(止瀉) 등의 증상에 효력을 보였다.
“그렇게 얻어진 결과가 이거지.”
기존의 성분을 농축하여 얻어진 ‘페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에바가 제국으로부터 도망치고 나서 사용하는 이름인 ‘로마베romabe'를 찾아가면 어떤 병도 낫게 해준다는 말이 유민들 사이에서 떠돌면서 모르 가문의 일원들은 더스트 행성을 도는 두 개의 달인 모스다와 스포보의 이름을 가진 형제 신의 제사장과 제사장을 따르는 수행자들로 위장할 수 있었다.
“제사장 로마베를 찾아가는 자 평화를 얻으리라.”
자신과 얼마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고모인 테로 모르가 에바의 옆에서 웃으며 휘청거렸다.
“또 피우셨군요, 고모.”
“피웠지. 어떻게 이걸 피우지 않을 수 있겠어. 제 정신으로 살기엔 너무 힘이 든 걸.”
과거 함리스 상단주를 유혹해서 상단의 안주인처럼 살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내던 테로 모르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유독 많이 힘들어 했고, ‘페일’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페일’의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조카들이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엄마를 따라온 테로의 두 딸은 걱정스러운 눈치로 사촌 에바의 등 뒤에서 떨고 있었다.
“조카? 넌 쟤들이 조카로 보여?”
“맞지 않습니까?”
“개소리하지마! 저것들 좀 치워!”
듣고 있는 아이들이 신경 쓰였던 에바는 가문의 사람을 불러 두 딸을 데려가도록 했다.
“저 둘이 함리스 상단주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고모의 피를 이어받은 모르 가문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저 둘은 우리들이 세우는 신전 스마르의 상징입니다.”
“지겨워. 너도 지겹고. 이 지긋지긋한 모르 가문의 복수심도 지겨워. 떠돌이 생활은 더 지겹고. 어울리지도 않은 종교 집단이라니. 우리 가문이 언제부터 그런 숭고한 집안이었다고.”
“쌍둥이가 없어선 곤란합니다. 당신의 사치를 유지시켜줄 자식들이니 좀 더 세심하게 대해 주시죠.”
“에바, 넌 정말 내 아버지랑 닮았구나. 아마, 니 피도 니 마음처럼 차갑디 차갑지 않을까?”
다시 시작되는 언쟁이 길어질까봐 지겨워진 에바는 주변에 대기 중인 이들에게 눈짓을 해서 고모를 모셔가도록 했다.
“저를 이런 인간으로 키운 것은 모르 가문 아닙니까? 보고 배운 주변이 다 이런데 어떻게 제가 다른 삶을 살겠습니까?”
화려한 장식들로 둘러쌓여 있지만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아무도 남지 않은 공간에서 에바 모르가 독백을 했다.
“저도 가능하다면 모두들에게 인정받고 영웅으로 취급받는 버크 샤이어처럼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신은 제게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원이 겹쳐진 종교 스마르smar의 상징을 쳐다보는 에바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섀넌, 이정후를 만나보니 어땠니?”
이드릴의 질문에 섀넌의 머리로 이정후의 옆에서 보낸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세상에변화를 가져올 사람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정후가 더스트에 등장할 때쯤 엘븐하임의 중심부에 위치한 깊숙한 곳에 모셔진 신의 구체가 반응을 보였다.
엘프들의 신인 칼라드리엘은 그 구체를 통해 ‘약속의 때’가 도래했다며 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그’를 옆에서 수호하며 보필할 것을 명했다.
엘프들의여왕 이드릴은 자신이 여왕이 되기 전 그리고 되고 나서 단 한번도 들린 적 없는 신의 음성이 들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왕은 예정된 변혁자로 엘프의 신이 지목한 이정후가 보고 싶어 크로니클과 굳이 만날 필요가 없음에도 임무완수에 대한 보고서를 직접 듣고 싶다며 엘븐하임으로 크로니클의 단주와 부단주인 코엘과 버크를 부르는 김에 이정후도 불러 오라고 했다.
이정후는 입고 있는옷은 처음 보는 소재로 되어 색다른 느낌의 고급스러움을 주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외모 자체는 연합국에서나 볼 법한 흔하고 평범한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이정후를 만난 뒤로 약간 실망(?)은 했지만 여왕은 엘프들의 신의 명을 따라 가장 믿을만한 존재이자 다음 대의 여왕이 될 자신의 딸 섀넌을 예지자 이정후의 감시자이자 보호자로서 이정후의 옆에 붙였다.
섀넌으로부터 들은 이정후라는 남자가 이 세상에 나타난 뒤로 벌인 일들은 이 세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고 여러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지금 어머니가 사용하시는 찻잔과 마시고 계신 커피도 정후 사장이 준 거 잖아요.”
“맞아, 그랬지.”
여왕이라는 위치에 있지만 자신만의 물건이 딱히 없을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사는 엘프 여왕에게 이정후가 선물해준 이 커피잔만큼은 너무나 아끼는 자신만의 애장품이 되었다.
“입고 계신 옷들도 정후 사장을 통해 이 세상에 온 것이고.”
“그랬지?”
“사용하시는 향수라든가 이곳을 밝히는 등도 정후 사장 덕분이죠.”
“그...그래.”
여왕이기 이전에 어머니였던 이드릴은 차갑고 냉철했던 딸은 어디로 가고 딸의 마음에 어떤 존재가 자리 잡았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괜히 얘를 보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