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화-도망치는 곳에 천국은 없다(3)
마을의 회의에선 각지에서 몰려온 탓이었는지 아니면 가족들이 잡혀간 이들과 가족들이 잡혀가지 않은 이들의 입장차이 때문인지 사람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가 나왔으나 크게 정리된 건은 두 개였다.
“하나는 여기 땅을 줘 버리고 가족들을 돌려받고서 우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는 쪽이고, 하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으니 모두가 결사적으로 항쟁을 하자는 쪽이라 이 말인 거군.”
마을에 포섭된 첩자로부터 의견을 전해들은 크카이는 포시아로 위장하여 활동했던 필로부터 현재 마을의 의견 대립에 대해 전달받았다.
“한쪽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가족따윈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이고, 한쪽은 마을 사람들의 재산을 버려서라도 자기 가족들을 지키고 싶은 이들이라니 참으로 똑같은 이들만 모여 있군.”
“자신들의 터전에서 싸우기보다 도망친 녀석들의 생각이란 건 거기서 거기일 겁니다. 주인님.”
“이 내용에 대해서 포로로 있는 녀석들한테도 한번 들려줘 봐라.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지는구나. 크크크큭”
마을 사람들과 풀의 의형제는 마을에 진입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포시아로 활동했던 필을 통해 마을회의의 결과를 전달받았다.
“이럴 리가 없다. 어떻게 우리 노자마 마을 사람들이 이런 결정을.”
“촌장. 촌장일거야. 개자식. 자기 사위가 이렇게 상황을 망친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올까봐. 미리 의견을 나눴겠지.”
“난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이들과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힘겹게 가꾼 땅을 줘버리고 또 떠나자는 말이야?”
“주변을 보라고. 우리랑 같이 온 자들이 어떤 작자들인지.”
포박을 당해 있는 마을 주민들은 오트나 상단이라고 했던 이들이 사실은 피도 눈물도 없는 크카이 로쉬의 부하들이라는 것을 알고서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크카이에게 빚을 진 자들 중 빚을 갚지 않은 자들은 어느 누구도 없는 걸로 하류층의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그리고그런 산전수전을 거친 자들이 온갖 무기로 무장한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의 숫자로는 당해낼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명확해 보였다.
“어쩌자고 이런 놈들과 계약을 한 거야. 이 머저리들아!”
“우리도 이 인간들이 ‘크카이의 악어떼’인지 몰랐어. 그리고 너희들도 우리들이 교역의 대가로 얻어온 물자들을 즐기고 좋아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잖아.”
“워워, 왜들 싸우시나? 우리는 받을 것만 받으면 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는 주인님의 의견따윈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단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의형제들 중 막내가 분위기 파악이 덜 된 것인지 얼마 전 만나게 된 마을 처녀와의 연애가 안타까워서인지 분노하며 필에게 소리쳤다.
“주인님께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한마디 하시더군. 돈 받으실 분은 생각도 안하는데 채무자들끼리 말이 많다고. 가서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알게 될 거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는 목책 앞에선 크카이는 목책 위에서 준비하고 있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우리가 쓸데없이 피흘리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무슨 소리냐!”
“우리는 너희들을 내쫓고 싶은 생각이 없어. 저 뒤에 데려온 마을 주민들을 보라고. 우리는 대가만 받으면 마을 사람들을 풀어줄 생각에 데려왔단 말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너희들의 땅을 평가한 뒤 내게서 빌려간 돈과 그 땅의 가치를 비교하여 부족한 부분은 너희들이 일해서 갚으면 된다. 원하면 땅을 임대해주도록 하지. 영주들이 받아가는 세금보다 훨씬 적게 소출의 50%만 대가로 받아가도록 하겠다. 어때?”
“계약서를 속인 니 놈들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서로 대표가 나와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하루의 시간을 주도록 하지. 계약서에 허점이 있다면 수정할 수 있도록 해주겠어.”
생각보다 그럴듯한 크카이의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을 먹고 있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동요가 생겼다. 싸울 마음을먹었던 이들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도망칠 마음을 먹었던 이들은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그래도 50%는 너무 많습니다, 촌장님!)”
“(그건 그래. 영주들이 가져가는 것보단 적지만...여태껏 우리끼리 챙겨 먹는것과 비교하면 50%는 많지.)”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싸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크카이의 생각대로 소작의 대가로 가져가는 비율을 50%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로 바뀌어 있었다.
“50%는 너무 많다!”
“그거야 얼마든지 조정해줄 수 있다. 대신 비율을 조정하면 기간이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짧고 굵게 내 밑에서 일하고 빚을 갚든가, 길고 가늘게 내 밑에서 일하고 빚을 갚든가. 난 어느 쪽도 좋아. 빚만 갚는다면 말이지. 이제 그쪽에서 대표가 나와서 나랑 대화할 준비가 되었나? 서로 위치한 중간인 이곳에 테이블을 준비해 놓을 테니 교섭할 준비가 끝나면 나오라고.”
크카이가 말을 마치고 마차로 돌아가자 목책을 지키는 몇몇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시 촌장의 집 앞에 모여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중에 상단의 계약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촌장은 이런 계약에 대해서 잘 몰라서 마을에 유입된 주민들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해봤지만 대부분이 상단은커녕 농사나 짓던 농부들이었기에 그런 쪽으로 해박한이들이 없었다.
단 한명을 빼고.
“와..와이즈!”
“그래, 맞아. 상단에서 일했던 와이즈가 있었어.”
“와이즈, 와이즈는 어디 있지?”
“와이즈는...오늘도 거기 있겠지.”
마지막 남자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와이즈를 불러 오게!”
촌장의 말에 마을의 어린 아이들이 와이즈에게 뛰어갔다.
“부르셨습니까?”
분뇨를 치우는 일을 맡은 와이즈의 몸에선 분뇨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자네, 오늘도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이게 제가 마을의 일원으로서 맡기로 한 역할이니까요. ”
풀은 분뇨 냄새가 진동하고 있음에도 부끄러워하거나 움츠리는 기색 없이 당당한 와이즈를 보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끄럽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씻고 오면 안 되겠나?”
아무리 여기저기 볼 일을 보면서 분뇨 냄새에 익숙해진 마을 사람들에게도 와이즈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익숙하지 않은지 많은 이들이 코를 부여잡고 있었다.
촌장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뒤 와이즈가 자리를 잠시 떠나자 사람들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조용한 상황에서 와이즈와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한 마을 주민이 나지막하게 빈정거렸다.
“우리들 중 상단에 대해 그나마 제일 잘 아는 사람을 똥퍼로 만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아쉬우니까 찾는 건가?”
“(여...여보!)”
남편의 말에 화들짝 놀란 부인이 남편을 말려도 와이즈와 함께 이 곳으로 들어온 남자는 멈추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아니,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맞잖아. 용병인지 뭔지 알 수도 없던 놈들을 불러다가 교역의 책임자로 붙인 게 화근 아니었어? 그때 와이즈 말만 들었어도 이런 일이 벌어졌겠냐고.”
남자의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촌장은 자신의 위치에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이미 정해진 과거의 일에 대해 떠들면 무엇 하겠어? 이제 와서 굳이 과거에 대해서 떠들 필요가 있냐고? 에잉. 농사나 짓던 놈이 뭘 안다고. 잘 모르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것이지.”
촌장이 윽박을 지르자 투덜거리던 남자는 뭐라고 더 말대꾸하고 싶었지만 워낙 서슬퍼런 촌장의 위세에 감히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와이즈가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자 촌장이 말을 현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다.
“교섭장에서 저들이 가져온 계약서라는 걸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촌장의 말을 듣고도 표정변화가 없는 와이즈의 말에 촌장은 와이즈와 자신들의 측근 몇몇을 데리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럼, 일단 나가보도록 하지.”
목책의 문이 열리고 몇 명의 남자들이 나오자 크카이 측의 남자들도 교섭을 준비할 테이블을 가져다 놓느라 살짝 부산스러워졌다.
“주인님, 굳이 이들과 교섭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 많은 땅을 가져도 일 할 사람이 있어야지. 어디서 저 땅을 모두 일굴 농부들을 구해 오겠어? 그 돈은 누가 낼 거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땅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농부들은 열심히 일을 하게 되어 있는 법이야. 난 그 희망이란 달콤한 미끼로 저들을 낚으면 그만인 거지. 결국 다 내 것이 될 것들인데. 뭐하러 내 재산에 흠집을 내?”
“저들이 싸우지 않을 것이란 걸 아셨습니까?”
“도망치는 것도 습관이다. 한번 도망쳐 버린 저들에겐 애초에 싸운다는 선택지는 그림에 불과할 뿐인 거야.”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오트나 상단의 여론조작 행위에 싸우다 눈을 다친 크카이의 왼쪽 눈이 강렬하게 빛이 났다.
테이블이 준비되자 양측의 인사들이 모두 자리에 모였다.
“간단하게 포도주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 싶은데?”
크카이가 부하를 시켜 포도주를 가져오게 했다.
“저기 크로니클이라는 곳에서 만들어 파는 포도주와 ‘와인잔’이라는 거야. 처음 보지?”
크카이가 상자에서 맑고 투명한 잔을 꺼내서 붉디붉은 포도주를 따르며 교섭자 대표로 나온 촌장과 와이즈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너희들을 뭘 믿고 이 술을 마시란 거지?”
“믿기 싫으면 믿지 말고.”
크카이는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와인잔에 따른 포도주를 따라 호기롭게 마셨다.
“음, 맛있군. 나무잔이나 주석잔과는 다르게 투명한 와인잔처럼 포도주의 맛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있지.”
“무슨 말인가?”
“이곳에서 맺어지는 계약은 너희들과 나만 알면 된다는 거지. 너희들이 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와인잔처럼 이곳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은 듯 있다가 가면 좋겠어.”
와이즈가 준비한 계약서를 읽으며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살피던 와이즈가 크카이의 말을 알아 듣고선 고개를 들고 물어봤다.
“이면계약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래, 여기 대표로 나온 4명에 한해선 어떤 대가도 받지 않겠다.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교섭의 대표로 나온 너희들이 45%로 깎았다고. 난 40%만 받아가도록 하지. 대신 5%는 너희들에게 내가 주는 대가다. 이만한 마을에서 5%의 소출이면 꽤 큰 대가라고.”
촌장과 함께 온 측근 2명도 크카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마을 사람들을 팔아 우리들은 호의호식하란 건가?”
“그렇게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모두 다 같이 고통을 나누는 것도 너희들의선택이고, 너희들의 가족만은 그 고통에서 제외하는 것도 너희들의 선택이야. 대신 내가 제안하는 계약서에 서명하면 소출의 5%는 돌려 주겠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다면 원래대로 50%를 받는 걸로 하지. 어느 쪽도 존중하겠다는 게 내 입장이거든.”
크카이의 말에 대표로 나온 4명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확실히 주는 건가? 그런데 우리들이 이곳에 지내는 동안은 5%를 4명이서 나눠 가져봐야 어디 숨길 곳도 없다.”
“초..촌장님!”
촌장의 말에 화들짝 놀란 마을 대표 중 한명을 바라보며 크카이가 대답했다.
“원하는 방법이 있는가?”
“제국의 플래티넘화나 보석같이 자그만 것들로 줘야 우리들이 무얼 받았는지 마을 주민들이 알 수 없을 거야.”
“오호, 그것도 따로 계약서에 명시해주겠다. 모두 동의하는 건가?”
크카이의 말에 마을 대표로 나온 3명이 와이즈를 쳐다보았다.
“제 선택은...”
서로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와이즈가 계약서를 검수한 뒤 완성하자 크카이는 포도주와 와인잔은 교섭의 증표라며 선물로 주고 떠났다.
와이즈가 내놓은 의견이란 자연재해나 천재지변과 같은 경우를 비롯해서 혹시나 갚아야 하는 소출이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3년씩 기한을 늘리는 것과 자신들이 맺은 계약은 자식들에게도 계속 대를 이어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었다.
"생각도 못했어. 소출을 조절해서 영원히 자신들이 노자마 마을의 사람들에게서 골수까지 빼먹겠다는 거 아닌가?"
자신조차 고개를 갸웃할 정도의 극악한 조건을 듣고 크카이는 아직도 자신은 멀었다고 속으로 반성했다.
그해 노자마 마을에선 수확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먹을만큼 수확물이 걷힐 때쯤 황금빛이 가득한 밀밭에 불이 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