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화-Camino de crónica(2)
“굳이 산적들을 인부로 받아준 이유가 뭐죠?”
섀넌은 내가 산적들을 때려 잡기보다 인부로 채용을 한 이유가 궁금한 듯 했다.
“섀넌,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벽이든 어떤 이유든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원래의 자신이 생각했던 삶이나 신념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게 되죠. 누군가 손을 뻗어 자신들을 조금만 도와줬으면 하구요. 전 그들에게 내가 바랬던 것처럼 잠깐의 도움이 되고자 한 것뿐이에요.”
“쓸데없는 호의 아닌가요? 그들이 고마워할 거란 보장도 없는데...”
섀넌은 정후라는 남자가 세상물정 모르는 구석이 있고 사람들에게 호구같은 기질이 조금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인지는 몰랐다.
“예전의 기록에서나 존재했다는 성자聖子라도 될 생각인가요?”
“아니요, 오면서 봤잖아요. 그들 대부분의 눈에 겁과 걱정이 가득했다는 걸. 우리 크로니클의 도시들로 들어온 이들처럼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겁니다. 기회를 잡고 못 잡고는 그들의 선택이죠. 그 선택 이후의 삶에 대해서까지 내가 책임져 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저 내가 베풀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나도 분명 이득이 있어서 하는 일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랄까?”
내가 처음 이 세상에 와서 인간들의 마을을 보고 느꼈던 것 중의 하나였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들에겐 나의 능력 한도 내에서 한번쯤은 기회를 줘보자고.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취준생으로 간절히 바랐던 그 기회를.
섀넌은 정후가 장갑을 벗고 더러운 인간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선 귀족은 절대 농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고결한 자신들의 접촉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들의 오만함 때문에.
‘위생개념을 철저히 하던 사람이 굳이 흙과 퇴비로 더러워진 손을 맞잡아서 악수를 했을 정도면 말로만 한번일뿐 여러번 기회를 줄려고 했던 거 아닌가요?’
정후의 옆에서 많은 변화들을 경험하고 정후가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약자일수록 더 부드러워지는 것을 수도 없이 본 섀넌은 이 남자의 앞 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 웃겼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커피숍과 편의점들에서나 볼 법한 레드오션은 여기에도 있었다.
“중간에 멈춰서 정리하고 계약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네요.”
산 하나마다 존재하는 산적단들은 수도로 이어지는 길 내내 으슥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며칠만 더 가면 됩니다.”
“그나저나 슬슬 나타나는 산적단들의 무력수준도 올라가네요.”
“수도로 가까워질수록 강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는 중심으로부터 점점 밀려나는 법이니까요.”
“맞아요. 그건 당연한 거죠. 숲에서도 약한 짐승은 영역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약육강식의 법칙이 인간들의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리가 있나요.”
우리가 인원이 적거나 해서 얕잡아 보이는 건가 싶어서 따라오는 검은 올빼미 7명에게 보급된 흑기사 세트를 장착하도록 하고 겉으로는 기사단이 따라붙은 귀족의 행차처럼 보이도록 하고 따라오도록 했다.
“정후 사장도 실전을 경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기사를 7명씩이나 달고 다니는 집단을 건드릴 산적단이 감히 있을지 의문이군요.”
“실전경험도 좋긴 하지만 어지간해선 쓸데없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요. 내 경험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한다면 스스로를 내가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거나 상처를 입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순간이.”
현대인의 감성으론 내가 누군가를 해쳐서 피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중학교 시절 호르몬에 지배될 쯤에나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다가 치고 박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일뿐. 그나마도 고등학교 땐 실제로 주먹질을 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이제 산 하나만 넘어가면 평야지대라서 산적단이 없을거라는 말에 마음 놓고 있었는데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호오라. 그럴싸한 갑옷을 걸치고 계시는데 갑옷 좀 벗어주고 가시겠나?”
“저기요. 어디서 그런 멘트같은 걸 가르치는 곳이라도 있는 건가요? 나오는 산적단마다 하나같이 틀에 박힌 멘트들을 내뱉고 있거든요.”
“뭐? 이...이 자식이! 솜털도 안 난 것 같은 녀석이 우릴 보고서도 겁도 안나나봐? 제법 그럴듯하게 떠드는구만.”
다양한 산적단들을 만나 직업 컨설팅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껏 봐온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거나 그나마 조금 나은 게 마을에서 무력을 담당하던 사냥꾼이나 자경단 출신들이었으니 딱히 무섭지가 않았다.
우리 앞에서 떠들던 남자가 손짓을 하자 주변에서 30명 정도 되는 인원이 나타났다.
“상단들이 이래서야 오갈 수가 있으려나.”
“안 그래도 오픈 축제를 하고 나서 조직해둔 별동대에게 지시해서 치우려고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래요? 근데 저 사람들은 평범한 농민들같지는 않네요.”
“귀족간의 알력에서 밀려나서 주군을 잃고 떠도는 기사들인데 좋게 말해서 방랑기사고 그냥 무력이 있는 걸 이유로 길을 오가는 상단을 털어먹고 사는 산적무리일 뿐입니다.”
빅터가 이미 이곳에서 산적단이 나올 거라고 언지를 주긴 했지만 기사들이라는 말에 살짝 걱정이 됐다.
“저기, 저 앞에 있는 유진이라는 기사만 조심하면 나머지는 정후 사장님이 직접 상대를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해치울까요?”
비서 섀넌의 말에 뒤에서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저 사람들이 누군가를 잔인하게 해쳤거나 하는 식으로 인성에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없나요?”
“다른 방랑기사들과 다르게 이들은 실력은 평범한데 충성심은 강했는지 자신들의 주군을 죽여버린 자를 주군으로 모시고 살 수 없다면서 자유기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먹고 살 길이 막막했는지 이후에 산적단으로 돌변한 것 같더군요.”
빅터와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기사 산적단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들의 수장인 유진이라는 자가 크게 소리쳤다.
“니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면 뭘 안다고 떠들어! 함부로 지껄이지 마!”
“유진 경, 32세. 평민 출신의 기사로 실력은 익스퍼트 중상급. 뒤의 덩치가 좋은 용병같은 사람은 돈 경,31세. 유진 경과 동일하게 평민 출신의 기사로 친구 관계. 실력은 익스퍼트 중급. 본인 이야기가 맞나? 여기 있는 인원들 모두의 신상에 대해선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 말이지.”
막힘없이 줄줄이 나오는 빅터 교관의 지목과 설명에 산적단의 표정이 멍해졌다.
“처음 보는 사이에 이 정도면 알아야 하는 건 충분히 다 아는 것 같습니다.”
“이...이녀석들. 너희들 누구야! 혹시 우리를 해치우기 위해 보내온 비트레이 후작들의 앞잡이들이냐?”
비트레이 후작이 누군지 몰라서 빅터 교관에게 진짜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쳐다봤더니 빅터 교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우린 비트레이 후작과도 관련이 없고, 그저 이 길을 지나려는 것 이외에는 그대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지나가려는 우리를 붙잡은 것도 그대들이 아닌가?”
“그럼 어떻게 우리에 대해서 알고 그렇게 떠든단 말이냐!”
“그저 지나가는 길에 혹시나 걸림돌이 될만한 것들이 없는지 조사하는 와중에 그대들이 포함된 것뿐이다. 당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대단한 관심같은 건 없어.”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을 감히 살려 보낼 수는 없다.”
“싸울텐가?”
빅터 교관이 워메이스를 들어 한줄기 빛을 내뿜자 상대측에서 느껴지던 기세가 급격히 죽는 게 느껴졌다.
“마...마스터라고?! 어떻게 이런 산길에서 마스터가 튀어나와!”
“유진, 잠깐만 기다려봐. 저기...저희 앞에 계신 마스터가 누구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굳이 저희들을 상대하실 마음은 없으셨던 것 같은데 저희들을 못 본 척 지나가겠다고 마스터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뒤에 있던 덩치 좋아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고개를 조아리며 빅터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습니까? 정후 사장님.”
“하던 대로 해야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내 말을 오해했는지 상대측에선 이를 악물고 다시 전투를 준비하려고 했다.
“아아아, 싸우자는 거 아니니까 무기들 내려놔요.”
“그럼?”
“몇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답변해주세요.”
“저희들 목숨만 살려주고 가신다면 좋습니다.”
“약속하죠. 첫 번째, 이 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식량이나 식량을 구매할 금전이지 사람의 목숨이 아니니까. 어지간한 상단들은 전부 통행세만 받고 보내줬습니다.”
빅터를 쳐다보니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둘째, 기사가 된 이후로 본인들의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들 실버팽 기사단이었던 자들이 가진 유일한 자부심입니다..”
돈이라는 자가 가슴을 주먹을 세게 두드리자 다른 산적단들도 똑같이 행동을 따라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 용병단으로서 저희 시나브로 기업과 1년 계약을 맺을 용의가 있습니까?”
섀넌은 이 남자가 또 시작했다면서 정후의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빅터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워메이스를 다시 말 안장에 돌려놨다.
“용병단으로서 1년 계약이요?”
“예, 저희 시나브로에서는 기본적으로 1년간 계약을 하고나서 여러분들의 업무성과와 업무태도를 바탕으로 차후 재계약을 이어나갈지 그만둘지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계약 방법입니다. 여기 기본계약서가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세요.”
뒤에 있던 검은 올빼미 하나가 내가 꺼낸 계약서를 받아 돈 경에게 건네줬다. 계약서를 모두 읽은 돈 경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계약서를 읽어 보라고 주고서 내게 물어봤다.
“주 60시간 업무 진행시 ‘업무성과’에서 평가점수가 기본적으로 2단계 이상 부여된다고 되어 있던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뭡니까?”
“매일 10시간씩 주 6일간 일했으면 하루는 쉬어야죠. 만약 시나브로 측에서 그쪽에게 추가적으로 업무를 원하고 이에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응할 시 계약서에 적힌 대로 60시간 이상 업무를 수행할 경우에 한해 추가임금이 지급될 겁니다. 물론 재계약시에는 계약기간동안 꾸준히 증명된 성실성에 대해선 추가점수를 부여하여 최종 업무성과평가를 기본적으로 4단계 중 2단계까지는 무조건 부여하겠다는 겁니다.
“2단계를 받으면 뭐가 좋습니까? 그리고 그 이하라거나 이상의 평가를 받으면 어떤 것이 좋아지거나 나빠집니까?”
“3단계 이상부터는 그쪽에게 계약조건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 1단계가 나오면 계약 해지. 2단계가 나오면 계약 유지. 3단계부터는 재계약시 서로 간의 협의 후 일정 수준이상 임금이 상승되고 4단계는 그 상승 수준이 큰 폭으로 뛸 겁니다. 원하는 장비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할인해서 지원해줄 수도 있구요.”
처음에 4단계 평가를 통한 연봉제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크로니클 내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인센티브의 존재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라든가, 실증사례를 나는 너무나 많이 봐왔다.
반대로 공무원처럼 정년을 보장해줄 경우 인간이 얼마나 나태해질 수 있는지 뉴스를 비롯해서 동사무소에서의 경험처럼 많은 사례들을 직간접적으로 봐왔기에 난 이 부분에 대해선 내 주장을 관철시켰다.
“물론 기본 연봉은 개인들의 실력에 따라 용병들의 급수 기준을 기반으로 해서 다르게 부여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실력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니까요. 실력이 다른데 똑같은 급여를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기업가라는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의 가치는 모두 평등하지 않다. 시나브로를 세우고 내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꾸준히 공부를 하다가 충격 받았던 것은 동일한 직업일 때 미국인과 한국인의 목숨에 다른 가격표가 이미 보험사들에 의해서 정해져서 매년 계산되고 있다는 거였다.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지만 능력에 따른 격차는 분명히 존재했고 존재해야 했다. 집단농장의 예시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어떤지는 교수님들이 내주신 조별과제를 할 때마다 공산주의가 얼마만큼 이상적이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지겹게 경험해야 했다.
표준계약서를 모두 읽은 이들에게 계약할 것을 다시 묻자 이들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내가 주는 것이 기회의 손길임을 깨달았는지 받아들였다.
“여기 펜은 기념품으로 드릴 테니까 각자 서명을 해서 계약서만 돌려주세요.”
인원수에 맞춰서 모X 글로리의 천원짜리 펜들을 나눠주니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펜을 썼을 때 빅터의 표정도 저랬죠.”
“전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 맞네요. 저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더 했죠.”
빅터가 고개를 끄덕이다 이어지는 정후의 말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정후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