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58화-분쟁의 씨앗(1)
트리니티 상단에 의해 철기의 기술력이 크게 향상되고 식량생산량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제국에선 풍년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이와 함께 영지를 가진 영주들의 재산도 팽창하게 되었는데 영주들은 늘어난 세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확충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트리니티 상단에서 판매되는 철기 생산품들의 수요는 영주들의 군사력 확충 과정에서 증가했고 상단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군비경쟁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던 영주들은 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간단하게 영지민들의 세금을 늘리는 쪽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이 정후가 봤던 소작농을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소작농의 증가로 인해 제국의 세수는 점차 악화되었는데 황제는 줄어드는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영주들에게 세금의 항목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악순환으로 인해 소작농이 폭증하는 동안 일부 지역들에서 소작농의 대단위 실종문제가 제국 내부에서 소문으로 돌았으나 귀족들은 그런 자잘한 소작농들의 문제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크로니클의 7개의 도시가 세상으로부터 존재감을 숨키고 내실을 다지는 동안 제국 내부의 영주간 군비경쟁도 극으로 치달았다.
“빅터, 팽창된 힘은 어디론가 터져 나와야 하는데 어떤 놈이 먼저 시작할 것 같아?”
“가장 먼저 창고가 비는 영주 아니면 인내심이 부족한 영주가 시작을 하겠지.”
“우리 ‘세븐시티’의 개방이 미칠 영향은 어느 쪽일 것 같아?”
“요크, 인간의 탐욕은 어느 쪽으로 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하나 확실한 건 힘을 쥐게 된 사람은 힘을 사용하고 싶어진다는 것이야. 인간들 중에서도 욕심 많고 탐욕스럽기로는 비할 바가 없는 존재들인 귀족들이 과연 그걸 참을 수 있을까?”
도시민들의 축제와는 별개로 오랜만에 모인 크로니클의 단원들에겐 14만의 도시민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빅터, 우리가 가장 먼저 팔아야 할 물건은 뭐가 좋을까?”
“코엘 단장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사치품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지민들은 일부 자작농이나 돈주머니가 두둑한 상인들을제외하곤 당장 하루 3끼 먹을 식량조차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 정도야?”
“귀족들을 대상으로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는 것이 귀족들의 힘을 빼는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영지민들의 수탈을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겠군.”
“빅터 부단장님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면 우리가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빅터는 의도적으로 말을 삼켰다.
‘영지민들이 가혹하게 수탈당할수록 제국에 대한 제국민들의 반감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우리 크로니클의 도시들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제국민들의 숫자도 빠르게 늘어나겠지. 결국 더욱 많은 도시민들을 필요로 하는 크로니클의 부족한 인구 수를 채워줄 것이다. 하지만 크로니클의 단원들이 굳이 이런 걸 알고 미리 괴로워할 필요는 없지. 이건 나 혼자 안고 가야 하겠군.’
“어차피 터질 일인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빅터의 말에 크로니클의 단원들에 채워진 시계를 쳐다본 코엘은 정후를 떠올렸다.
“정후는 지금 뭐하고 있지?”
“앞으로 출하할 돼지와 돼지고기를 미리 점검하고 싶다고 했어.”
단원들이 휴식하는 동안 난 돼지의 종자 문제에 대해 되짚어 보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먹는 한돈의 대부분은 흔히 말하는 요크셔,랜드 레이스, 듀록이라고 불리는 종인 YLD의 3원 교잡종으로 생산량에 집중하여 공장식으로 축사를 짓고 획일화시킨 규격돈을 6개월 정도 키워서 115kg 내외가 되었을 때 출하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근본적인 부분에서 맛의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직 삼겹살의 생산량을 증대하는 쪽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한국인들의 삼겹살 사랑은 남미에도 알려질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런 지독한 삼겹살 사랑은 다른 부위에 대한 낮은 수요로 이어졌고 삼겹살과 목살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한국에서 남는 부위들을 들여와 크로니클의 7개의 도시에 판매하면 남아도는 고기들을 팔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의 중간상인들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자연적인 시장구조에 따르면 낮아져야 하는 부위들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려 받고 있었다.
특히나 남아도는 앞다리와 뒷다리의 경우 삽겹살보다는 반값 이하로 저렴하기는 했지만 남아도는 양에 비해 저렴하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엘리스 말은 내가 대량으로 전지와 후지 부위를 구매하는 행위가 양돈을 하는 축산인들을 돕는 것보단 실질적으로 중간상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 이거지?”
“결정적으로 내가 사오는 양이 늘어날수록 전지와 후지 부위를 저렴하게 구매해서 소비해왔던 국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건 생각 못했어.”
한돈은 또 다른 문제를 지니고 있었는데 한돈의 생산은 삼겹살에 집중되어 있어 하몽같은 상품을 만들어 내기엔 돼지의 다리가 짧고 건강하지 못했다.
엘리스의 조언을 듣고 고민한 결과 새끼 돼지들을 이세상에 가져올 때 난 의도적으로 YLD 3원 교잡종의 새끼들과 함께 교잡종이 아닌 순수종의 돼지들과 이베리코 돼지들을 들여와서 지역을 나눠 키우도록 했다.
그렇게 5년의 세월 간 엘프들의 숲과 드루이드들의 마을 주변에서 방목되어 자란 돼지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고 3년 전부터 도시 버크에서 생산되어 묵혀둔 천일염으로 돼지들의 뒷다리는 세븐시티에 유통시키지 않고 꾸준히 하몽으로 만들었다.
“28개월동안 숙성시킨 게 이건가요?”
“예,10~14kg 짜리 뒷다리 넓적다리를 가지고 만들었더니 이렇게 가르쳐주신대로 50% 가까이 축소되더군요.”
이 하몽 하나를 생산하는 데 단순히 고기와 소금 그리고 세월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품을 만들기 위해선 기본적인 도량형의 통일뿐 아니라 사람들에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교육이 추가로 필요했다.
“벅 생산부장의 입에서 kg이라거나 %에 대해서 듣게 되니 기분이 묘하군요.”
“저도 제가 여기서 이렇게 돼지를 키우고 그 돼지의 다리로 하몽이라는 걸 만드는 일을 책임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벅이라는 남자는 펍에서 우연히 크로니클로의 이주를 전해 듣고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듯 영주들의 포악적인 징세를 버티지 못하고 가족들과 도망쳐서 이주해 온 가장이었다.
농사만 짓던 농사꾼 벅은 자신의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당시에 괜찮은 임금을 지불한다면서 모집하던 돼지 연구부에 자원했고 이제는 크로니클에서 돼지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5년 만에 이렇게 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으리라.
벅 생산부장은 하몽으로 만든 뒷다리 살을 얇게 펴서 잘라서 내가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잘라줬다.
“이건 이번에 만든 하몽들 중에서 아주 드물게 나온 ‘파타 네그라’입니다.”
“음...정말 맛있는데요? 소금에 절여놔서 짤 것만 같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 짜지 않게 만들 것을 요구하셔서 연구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벅 생산부장은 베요타, 레세보, 데세보로 나눠지는 하몽의 1등, 2등, 3등품을 차례대로 잘라서 내게 줬다.
“확실히 말씀하신 대로 드루이드들이 머무는 산악지대의 숲에서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들로 만든 하몽의 육질이 더 맛있었습니다.”
벅 생산부장의 설명대로 베요타 등급의 최상품 하몽은 그 맛이 쫄깃하면서도 쫀득한 육질이 일품이었다.
“이건 포도주랑 같이 먹으니 정말 좋네요. 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직원들에게 인센티브와 함께 2주일간의 휴가를 나눠서 쓸 수 있게 해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함께 와 있던 벅 생산부장과 직원들이 환호성을 외치며 좋아했다.
“하몽도 챙겨 가셔야죠.”
“비싼 하몽까지? 사장님 만세!”
“진짜입니까?”
“오늘 집에 2개씩들 가져가서 가족들하고 맛있게 나눠 드세요.”
축제기간인데도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집된 직원들에게 미안해서 하몽을 두개씩 가져가라고 선물로 줬다.
‘갑질하는 사장님 밑에서 일하려면 받아가는 거라도 많아야지. 비싼 거라 많이는 못 주지만.’
벅 생산부장은 꿈만 같았다. 도시를 책임지는 시장이자 사장인 제이님은 높으신 분 같지 않게 항상 존댓말로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줬고 혹시나 필요한 것이 없는지 관심을가지고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축제가 시작되었을 때 직원들과 불려 나왔을 땐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제이 사장님은 언제나처럼 친근하게 웃으며 자신들의 노고를 알아봐줬다.
‘그때 여기로 온 것이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일거야.’
도시를 지키는 군대를 창설할 때 자원해서 들어간 장남과 차남이 휴가를 나와 집에 왔는데 뒷다리 두개라면 생색을 내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사장은 자신도 단원들과 나눠 먹겠다며 포장해서 2개를 챙겨갔다.
“섀넌, 오늘 챙겨볼 건 전부 끝났는데 같이 가서 단원들이랑 먹을래요?”
정후가 굵어진 팔뚝으로 돼지 뒷다리를 하나씩 들어 올리며 워엑스처럼 휘둘렀다.
“사양할 필요는 없죠. 사장님.”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엘리스보다 사무적이고 무표정한 섀넌은 비서로서 사장인 내가 맡은 일을 보좌해야 한다면서 굳이 따라올 필요가 없으니 쉬라고 해도 따라왔다.
그냥 예의상 던진 말에 냉큼 가겠다고 의사표현을 한 걸 보면 진심인지 아니면 사장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인지 애매했다.
‘캐릭터상 싫으면 싫다고 할 타입이긴 한데.’
섀넌은 자신에게 하몽을 같이 먹으러 가자는 정후의 말이 기꺼웠다. 옆에 서서 살짝 맛을 볼 때 생전 처음 맛보는 하몽이란 것의 맛도 마음에 들었지만 크로니클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포도주와 함께 먹으니 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아쉬웠으니까
‘이왕 가져갈 거면 8개는 챙겨서 각자 다리 하나씩 놓고 먹어도 좋을텐데.’
정후가 휘두르는 두 짝의 하몽을 보며 섀넌은 내색하지 않고 등을 돌린 정후의 뒤에서 입맛을 다셨다.
정후란 남자와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업무 외적으로 같이 있어야 할 필요도 있었으니 자신이 크로니클 단원들과 먹고 마시는 곳에 가야 할 이유도 충분했다.
“짜잔~ 제가 왔습니다.”
맥주를 마시면서 뭔가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던 단원들은 날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줬다.
“그거 뭐야?”
“이게 바로 하몽이라는 겁니다.”
“그게 하몽?”
아니, 하몽을 환하게 맞이했다.
“빨리 열어봐. 들리는 소문으론 맛있다고는 하는데 구경도 못해봤다.”
“이게 니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그 하몽이란 거지? 술이랑 같이 먹으면 죽이는 안주가 있다고 하면서 2년만 기다리라고 했던 그거?”
육식계인 우리 크로니클의 여자 단원들답게 내가 들고 있는 하몽을 빼앗다시피 가져가서 포장을 뜯는다.
“정후야, 저거 어떻게 해주면 되냐?”
“드마코 형, 얇게 슬라이스하듯 잘라줘요. 두껍게 자르면 한번에 먹기엔 좀 짜니까.”
드마코 형에게 어떻게 먹을지를 설명하는 동안 단원들은 하몽 근처로 모여 냄새를 맡기도 하고 자기가 가진 칼을 꺼내서 잘라 먹어보고 난리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