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50화-이상과 현실(4)
“그동안 계속된 와처의 지원은 이번주를 끝으로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정됩니다.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더욱 많이 돕기 위한 와처의 결정이니 몸이 건강하고 생산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된 여러분들은 새롭게 건설되는 ‘크로니클’ 마을로 이주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시면 됩니다.”
와처의 조장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와처의 도움 덕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젠 때가 온 것 같군.”
“그래도 몇 년은 더 도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아직 우리 애들은 너무어려.”
“영주의 땅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도망쳐 몰려오면서 와처의 마을로 오는 이들이 늘었던 게 문제였을지도 몰라.”
“자네 가족도 도움을 받아놓고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가 있나?”
“갑자기 이렇게 나가라니!”
“이렇게 쫓겨날 수는 없어!”
혹시라도 극렬히 반대를 하면서 드러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언지를 주라고 정후가 주의를 준 것들이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거주를 원하는 대상제외자들에 한해 영주들이 지배하는 다른 지역처럼 세금을 걷겠습니다.”
“이거 봐. 난 언젠가 와처가 이렇게 우리 뒤통수를 칠거라고 생각했어! 다 꿍꿍이 속이 있었던 거라고!”
“제이크, 닥쳐! 그래, 조장님, 세금은 어느 정도요? 다른 영주의 땅에선 소출의 70%까지 세금으로 거둬가고 있는 실정이라오. 너무 많은 세금을 요구하면 우리로서는 당장 그걸 낼 여유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와처가 이해해줬으면 싶구려.”
마을의 촌장인 제임스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와처의 결정을 거역하려던 양아치 제이크를 만류한 뒤 이번에 이주 지원을 맡은 조장에게 물었다.
“이곳에 거주한 기간이 10년이 넘는 자들 중 성년이 지난 이들은 다른 지역과 똑같이 평균수입의 70%인 매달 140실버를 와처 지부에 납부해야 합니다. 7년이 넘는 자들은 50%인 100실버입니다. 5년 이상은 30%인 60실버로 책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와처에서 내려온 지침은 하나였다.
「호의는 그대들의 권리가 아니다.」
뒤에서 켄이 읽는 상부의 지침을 듣던 립톤은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이번 일도 빅터 단장님이 하신 겁니까?”
“빅터 님이 트리니티 상단으로 넘어간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단장님이라고 하는 건가? 시나브로라는 기업도 생긴 마당에 거기선 이사라는 직책을 갖게 되셨다고 하더군. 앞으론 빅터 이사님 이라고 부르게.”
“와처에 들어온 이들의 마음속에서 빅터님은 영원히 단장님일 겁니다.”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
켄 조장과 지미 조장은 빅터 단장을 향한 충성심을 보이는 신입 단원 립톤의 주장이 내심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주하게 될 그 ‘마을’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도 세금의 비율이 똑같습니까?”
와처가 지원하는 마을의 촌장은 모자를 벗고 하얗게 센 머리를 드러내며 물었다.
“노력하는 자들은 자식에게 먹고 살 걱정을 영원히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줄 곳이라고 합니다.”
“30년만 경작하면 내 땅으로 인정해주고 세금은 매년 자신이 벌어들인 소득의 30%만 내면 된다고 했소, 촌장.”
“지대만 30%입니까?...허허, 그동안 좋은 세월이 모두 흘러가 버렸군요.”
촌장이 30%에 대해 오해하는 것 같자 켄은 오해하는 부분을 정정해 주었다.
“그게 아니라 그 마을에서 사는 이들이 낼 세금의 총액이 그렇다는 것이오. 지대든 뭐든 그 외에 추가로 거둬들일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이 진짜입니까?”
선뜻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촌장과 켄이 하는 대화를 듣던 제이크는 한 번 더 딴지를 걸었다.
“촌장 할배, 이 인간들이이번처럼 또 나중에 말 바꿀지 어떻게 알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안 그래요, 마을 사람들?”
제이크가 마을에서 양아치로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존재이긴 해도 내심 그 부분이 걸리긴 했다. 자신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날 생각을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부분이 영주들이 거두는 막대한 세금이었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시나브로’와 계약을 맺은 여러분들의 권리는 와처와 크로니클, 트리니티 상단이 함께 공증하는 것으로 계약의 결과를 어기게 되면 모험가 길드장 ‘프리’의 권위까지 실추되는 것이니 정 억울한 일이 생기면 모험가 길드에 가서 항의를 하면 트리니티 상단을 찢어발겨서라도 당신들의 권리를 지켜주겠지.”
“그 정도라면...”
이 정도까지 확실한 것이라면 이제 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촌장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겠소, 이주비용을 와처에서 지원해준다고 할 때 가는 게 좋겠지.”
“촌장님, 이제 좀 말이 통하시네.”
“가진 것이 많은 이들도 자신의 것을 잃는 것이 싫겠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이 터전을 빼앗기는 것은 생존이 위협받는 것이라오. 반발하는 이들의 절박함을 조금만 이해해줬으면 좋겠구려.”
대화를 들은 립톤은 촌장의 마지막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촌장, 마을 사람들을 설득할거면 빨리 하시오. 제국 내에서 ‘크로니클’ 마을로 이주할 이들을 뽑는 건 당신들만이 아니니까. 터전을 잡고 나서 늦게 갈수록 당신들이 자리 잡기 어려워질지도 몰라.”
“클클, 어딜 가도 텃세가 무섭긴 하지. 알겠네.”
“그리고 저 제이큰지 뭔지 하는 저 새끼는 좀 입 좀 닥치라고 해주고.”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천둥벌거숭이라 그런 게지. 알겠네.”
와처의 칼부림들을 기억하는 촌장은 고아로 자라 아무 것도 모르고 설치는 제이크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지켜봐 온 마을의 청년이었다.
“저 녀석 아비가 내게 진 빚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제국의 여기저기에서 크로니클의 이름으로 건설되는 마을로 이주하는 이들이 점차 몰려들고 있었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무슨 이야기?”
“크로니클이란 곳을 찾아가면 무료로 땅을 임대해주고 30년간 농사를 지으면 땅을 준다는 이야기말야.”
“그게 사실일까? 그런 꿈같은 소리. 누군가 속여 먹으려고 하는 소리지.”
요즘 마을에 있는 유일한 주점에선 꿈같은 땅 ‘드림랜드’ 혹은 ‘프리랜드’ 라는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안 믿어. 멀쩡한 농부들 데려다가 노예로 만들려는 수작같아.”
“벅, 이걸 주재하는 이들 중 하나가 와처라는 소문이 있어.”
“그럼, 와처가 변했나보군. 빅터 단장이 떠나고 나서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벅? 와처가 다시 정상이 된 게 언제인데?”
“그걸 믿나? 내가 30년 조금 넘게 살면서 느낀 건 인생에 공짜가 없다는 거야.”
“이 사람 참, 속고만 살았나.”
“내가 한 15년 정도 어렸다면 그런 말에 혹했을 지도 모르겠군. 시답잖은 소리 할 거라면 일어나야겠군. 오늘 술은 잘 마셨네.”
이런 대화는 이 지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유의 땅을 꿈꾸며 가족들과 떠나기도 했고, 누군가는 용병의 삶을 접고 자리 잡을 땅으로 크로니클 마을을 정하고 움직이기도 했다.
“요크 단원, 지금 크로니클 마을의 건설에 몰려드는 이들의 숫자가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정후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마을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최소 도시인 것 같아요. 그저 마을만 만들 것이라면 ‘상수도’라거나 ‘하수도’같은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둘이 이야기하는 트리니티 상단의 방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끼어들었다.
“어쩌면 정후군이 생각하는 바가 그보다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정후가 생각하는 마을이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하고 단위가 다른 건 아닐까?”
“코엘 단장님, 버크 부단장님. 오셨습니까?”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어요?”
요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오빠와 코엘에게 커피를 타 주었다.
“흐음...이 커피라는 것의 향을 맡고 있으면 잠자고 있는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야.”
“고맙구나. 요크. 코엘, 어쩌면 니 말대로 정후 군의 세상의 마을은 우리 세상의 마을보다 더 큰 것일지도 몰라.”
요크와 빅터는 버크가 갑자기 꺼낸 정후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역시 그런 걸까요?”
“놀라지 않는군.”
“정후 단원이 꺼내오는 물건들만 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들이 아니니까요.”
“그것보다 난 그 설계도라는 물건들을 보고서 깜짝 놀랐어.”
“언니, 아직 이해 못 했잖아요.”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 있는 것이지. 꼬마야.”
서로 장난치는 동생과 코엘을 보는 버크의 눈에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준비해왔다면서 정후가 빅터에게 건네 줬던 설계도가 떠올랐다.
“우리는 도로라는 것도 실제로 그렇게 만든 역사가 없었지. 하수도와 상수도라는 개념도 초고대문명의 유적에서나 나올 법한 개념 아닌가?”
“이미 주변의 강들을 끌어들여 상수도와 하수도의 제작은 끝이 났고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방사형으로 앞으로 마을을 관리할 청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빅터는 얼마 전 다녀왔던 크로니클 마을이 떠올랐다.
“최소 10만명은 거주할 수 있을겁니다.”
“아니, 그 정도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네.”
“그럼?”
“내가 본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후 군이 세운 마을은 확장이 얼마든지 가능한 형태지. 마치 중심을 찍어 놓은 원처럼 필요할 떄마다 새롭게 원을 감싸면 되는 형태인 것 같았어.”
버크가 한 말을 듣고 각자 봤던 도시의 형태가 그려진 설계도를 떠올릴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여기 다들 모여 계셨네? 버크 아저씨랑 코엘 누나는 언제 오셨어요?”
“우리도 방금 전에 도착해서 여기 왔어.”
“그래요? 어떻게 가셨던 일은 잘 마무리 되었어요?”
“젊은 엘프들이 최소 1만명 정도는 나올 거 같아.”
“그 정도나요?”
“후후, 우리 엘프들이 살 땅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거겠지?”
정후는 처음에 설계했던 마을의 녹지부분을 떠올렸다.
“그럼요, 엘프는 얼마나 빨리 마을에 올 것 같아요? 이왕이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건 왜?”
“전 크로니클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마을이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서 여기 지도를 보면”
정후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대형지도를 꺼내자 크로니클 마을을 둘러싼 지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엄청 세세하게 그려진 지도군.”
“마을을 만들기 위해선 필요한 거였어요. 아무튼 여기 부분을 보시면 일부러 비워둔 땅이 있죠?”
모두가 본 지도에는 아무런 그림도 없이 텅 비어있는 평야가 있었다.
“여기? 여기에 뭘 심으려고?”
크로니클 마을이 들어서는 곳은 여름에는 고온다습하다 가을부터 건조해지는 기후의 지역으로 밀농사를 짓기에 그렇게 좋은 기후가 아니었기에 모두들 그곳에 뭘 심으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쌀이요.”
“쌀?”
“우리가 저번에 라면에 말아 먹었던 그거?”
“크로니클 사람들이 앞으로 먹을 주식은 밀이 아니라 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