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화-이상과 현실(1)
“백발마녀가 사라지고 나서 붉은 수염의 세력은 전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태껏 질질 끌었던 전쟁이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하듯 와처의 협조를 받아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 나갈 수 있었지. 마치 전쟁을 처음 시작했을 때 들불처럼 퍼져나가서 확산되던 붉은 수염의 세력처럼.”
“버크가 빠졌는데도 그랬던 걸 보면 빅터와 와처의 도움의 위력이 정말 대단했구나.”
“대륙의 중부지역을 밀어내면서 와처는 드워프들이 노예로 잡혀 있음을 찾아냈고 이들을 거의 다 구제했을 무렵 어느 드워프 남매의 성이 붉은 수염로부터 들었던 것과 같은 ‘샤이어’라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어. 이를 붉은 수염에게 전달하자 붉은 수염은 호위대와 함께 며칠이고 그 드워프 남매를 구하기 위해 찾아가서 마침내 구해냈어.”
“그 남매가 험프랑 요크지?”
“지금은 우리 트리니티 상단의 기둥같은 존재들이지. 자신의 부모를 닮은 드워프 남매를 본 붉은 수염은 빅터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제 자신의 동생들을 드워프들의 고향에 데려다 주고 나면 붉은 수염의 이름과 두 도끼를 버리고 그저 ‘빅터 샤이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대.”
‘같지만 다른 존재라는 게 이런 의미일까?’
“붉은 수염이 있던 제국은 버크가 떠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집어삼킨 전선을 소화할 목적으로 전쟁을 멈추겠다는 합의를 했지.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도 있고 붉은 수염이 떠나면서 빅터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면서 와처를 빼겠다고 하는 바람에 앞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고 봤거든. 와처의 수장인 빅터는 전쟁이 터지고 나서 종식되기까지 대륙에서 비밀리에 노예를 구매했거나 혹은 이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첩보 또한 노예시장을 터는 과정에서 확보했기에 노예해방전쟁의 종식이 선언되고 나서도 한동안 와처의 수장으로 남아 제국 내의 노예의 구매 및 매매에 관련된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숙청을 했어.”
“황제가 그걸 용납했어?”
“버크가 원하기도 했고 황제의 입장에서 와처와의 정보협조가 있는 조건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대가였지.”
“역시 얻는 것이 있어서 그랬던 거구나.”
“그게 황제란 자리 아닐까?”
에디나는 계략과 암투가 가득한 사선(死線)을 넘어다닌 빅터를 떠올리니 매치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빅터는 배려심 많고 따뜻한 사람인데 상상이 안 돼.”
“그게 빅터의 정의였고 빅터의 꿈이었으니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참고 지냈던 거야.”
“그렇구나. 빅터는 언제 오른속 약지 손가락을 자른 거야?”
에디나는 빅터를 알게 된 후로부터 빅터의 텅 빈 네 번째 손가락 자리가 신경 쓰여 이참에 드마코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노예를 사고팔다가 걸려서 숙청된 귀족들 중엔 빅터의 배다른 형인 이슈라 황자도 있었는데 빅터는 같은 피가 흐르는 자신도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면서 속죄하겠다는 의미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어. 이에 대한 증거로 자신의 오른손 약지를 자르고 아직도 노예를 거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평생을 자신과 와처가 쫓아다닐테니 각오하란 경고를 남기고 그 증표로 두 개의 붉은 올빼미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만들어 검지와 중지에 꼈어.”
“지금 중지에 끼워진 반지가 그거구나?”
“반지의 다른 의미는 이 세상에서 와처들이 끼고 있는 반지들 중 하나라도 남아 유지되는 한 와처는 노예해방의 뜻을 따라 노예를 거래하는 자들의 척결에 힘쓸 거라는 의미야.”
‘빅터의 오른손 약지가 비워졌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섣불리 물어볼 수 없어서 궁금했던 부분이었는데 이렇게 알게 되네.‘
“그 후 빅터는 노예해방전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고아들과 피해자들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재단과 단체 ‘올빼미’를 설립했는데 빅터의 뜻을 평생 따르겠다는 올빼미 요원들 중 무력이 강한 일부가 충성의 의미로 자신들이 무기를 들지 않는 손의 약지를 빅터처럼 자르고 빅터의 두 반지를 닮은 문양의 검은 색 올빼미 문양 반지를 만들어 2개씩 끼웠어.”
“가끔 빅터 주변에서 나타나는 검은 복장의 아저씨들이 낀 반지가 그 의미였어?”
“그들은 앞으로 고아들 중에서 빅터의 뜻을 따라 노예해방의 의지를 가장 잘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자질 있는 아이들을 고르고 최종적으론 그들의 의사를 묻고 나서 자신의 대를 이어 검은 올빼미로 남게 하겠다고 맹세한 뒤 밤의 그림자로 남겠다며 검은 옷과 복면으로 가려 자신들을 세상으로부터 숨긴 거야. 그래서 그 아저씨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만 정체를 드러내고 외부활동 시엔 눈만 드러내고 다녀.”
“그럼 빅터는 언제 와처의 단장을 그만두게 된 거야?”
“시간이 흘러 대륙에서 노예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을 때 빅터도 많이 지쳤었나봐. 붉은 수염이 ‘버크 샤이어’로 되돌아갔듯이 와처의 단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빅터도 제국의 밤을 지키는 올빼미로서 남기로 하고 잠시 쉴 겸 버크 샤이어의 곁으로 찾아가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빅터가 아직도 중지에서 반지를 빼지 않는 거였구나.”
“아직까지 빅터의 마음 한구석엔 노예척결을 하고 싶은 붉은 올뺴미가 지켜보고 있는 거겠지. 난 부디 빅터가 자신의 선언을 포기하고 누군가 빅터의 손에서 그 반지를 이어받고 빅터가 자유로워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그건 자신이 처음에 맹세한 것을 어기는 거잖아.”
“세상에 절대란 게 있어?”
에디나가 선뜻 대답을 못하자 드마코는 어느새 도착한 드루이드 마을 입구를 바라보곤 에디나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정통 드루이드 음식을 먹어볼 기회라고 들든 모습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디나는 오랜만에 오게 된 고향이 좋기도 걱정이 되기도 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마코를 따라 들어갔다.
“드마코! 거기 아니야! 왼쪽 왼쪽!”
난 1차 산업혁명을 이세계에서 면직물 공업으로 시작하려 할 때 방직기의 종류들 중에서 뮬 방적기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결합하여 인력이 아닌 동력을 사용하는 에드먼드 카드라이트의 ‘역직기’를 도입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산업혁명의 본질은 노동의 기계화이자 생산성의 극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순한 산술계산만으로도 증기기관을 도입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6배의 생산성의 차이가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감안한다면 누가 봐도 증기기관을 도입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장 뮬 방적기, ‘나는 북(flying shuttle)’, 재봉틀이란 세 개의 물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증기기관에 대한 이해도까지 높이는 것은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다음 스텝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수와 제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최선의 수는 분명히 다르니까. 차근 차근 하자.’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서 생산 가능한 방식의 방적기와 방직기,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이미 설계도가 완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제품이 나오기까지는 더스트의 최고 장인들이라고 불리는 노장인(老匠人) 드워프들을 데리고서도 3개월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냥 설계도를 던져주면 바로 딱 보고 이해하고 물건이 탁탁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상황을 생각했지만 막상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완성된 시제품을 보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마치 주마등(走馬燈)이 지나가듯 지난 3개월의 역경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요크와 함께 트리니티 제철소를 찾아갔을 때 요크의 쌍둥이 험프가 책임자로 있었고 그 밖의 드워프들 사이에서 노장인(老匠人)들이 여기저기서 관리자로 함께 일하고 있었다.
“정후, 당신이 가져다 준 공작도(working drawing)라는 거 보기가 너무 어려워. 우리 드워프는 정후가 준 것처럼 이렇게 전체도, 부전체도, 상세도로 설계도를 나눈 뒤에 물건을 만들지 않아.”
“험프, 이제는 이런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니까.”
“누나...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거 알잖아.”
“아니, 이제는 그걸 할 줄 아는 드워프와 하지 못하는 드워프로 나눠질 거야. 이해하고 제작을 할 수 있는 드워프는 앞선 기술을 익히고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지만 못하는 드워프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만드는 뒷방 늙은이로 남아야겠지.”
설계도를 가져와서 도구들을 제작하려 했을 때 나는 드워프들의 기술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인지부터 파악했어야 했다.
이들이 만드는 갑옷이 당연히 판타지 세상에서 말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라고 불리는 통칭 ‘플레이트 아머’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에겐 아직 일체형 판금갑옷인 ‘플레이트 아머’에 대한 개념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드워프들이 만드는 최상급 갑옷은 ‘트랜지셔널 아머(경번갑鏡幡甲)’이었다.
당연히 내가 가져온 설계도에 그려진 부품의 수는 드워프들이 만드는 최상급 갑옷보다 훨씬 더 많았고 복잡했다. 드워프들은 경험적으로 이해해 물건을 만드는 상황인데다 1급품을 만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험프의 수준으로는 단순한 설계도조차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험프는 아직 안 되겠다. 넌 가서 노장인들을 불러 와.”
“노장인들도 안 될걸?”
“그만 토 달고 갔다 와. 맞기 전에.”
“아니 언제까지 때릴 거야. 결혼해서 애 낳은 게 언젠데. 가장의 권위라는 것도 좀 존중해주라고.”
요크의 말에 험프는 투덜거리면서 노장인들을 부르기 위해 떠났다.
“오는 내내 설계도를 배우고서야 나도 이해했는데 험프 수준으로는 혹시나 했지만 아예 감도 못 잡네.”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워?”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설계도가 필요한 물건을 아직 만들어 본 적이 없어.”
“그...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우리 세상에서 의뢰해가지고 시제품을 만들어서 챙겨올걸’
내가 설계했던 산업혁명의 핵심세력이자 키워드였던 ‘건설과 제작의 장인’인 드워프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다.
‘이들을 이제 하나하나 가르쳐서 건축, 토목, 제작의 장인으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건가. 동생아,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구나. 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 것이었을지도 몰라.’
노장인들이 몰려 왔을 때 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냄샌 뭐야? 코가 아파.’
노장인들의 악취에 머리가 아프다 못해 코까지 통증을 느낄 정도가 되니 참으려고 했지만 숨길 수가 없었다.
“이 녀석 왜 이래? 인성에 무슨 문제 있어?”
“예의 없는 녀석!”
“죄, 죄송합니다.”
코엘 누나가 드워프들에게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했던 말을 난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노장인들의 몸에선 몇달동안 제대로 씻지도 않은 것인지 험프하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악취가 심하게 났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코를 움켜쥐며 뒤로 주춤거리고 말았다. 심각한 악취가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독’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할아버지들! 에헤이 에헤이 본인도 의식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 할아버지들한테서 땀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고!”
다행히 옆에 있던 트리니티 제철소의 공동책임자이나 트리니티 상단주인 요크가 중재한 덕분에 더 큰 시비로 번지진 않았다. 분명히 요크도 그러면서 그때 보니 뒤로는 살짝 코를 막고 있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 이미 구르고 구른 노장로들과의 해프닝 이후 노장인들에게 엘리스를 통해 제작한 설계도를 보여주자 눈이 반짝 반짝거리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질문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엘리스가 집어넣어준 제작관련 지식도 있었고 상황에 맞게 머릿속으로 실시간으로 설명을 알려주는 엘리스가 있어 물건을 제작해본 적도 없는 난 드워프들에게 제작의 신 비슷한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Q&A 시간이 지나고 맑은 공기에 대한 감사함을 새삼 느끼며 나올 때는 이미 내 코가 악취에 적응하고만 뒤였다.
‘후각을 잃은 건 아니겠지?’
“정후, 자네가 예의는 좀 없는 것 같지만 인간임에도 우리 드워프들보다 제작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구만?”
“아하하, 아닙니다.”
처음 잃은 첫인상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직장 상사를 대하듯 웃으면서 노장인들을 대한 게 그나마 먹혔는지 노장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질문을 마치곤 내가 프린트해 온 설계도를 챙기고 다른 노장인들과 모여 복습을 하겠다며 떠났다.
“정후야, 우리 샤워시설부터 만들어야 될 것 같은데?”
“무조건”
난 그날 드워프인 요크조차도 참지 못하는 악취를 처음 맡고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