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대제의 아들(1)
“너 혹시 마을에서 사고치고 도망 나온 거야? 왜 이렇게 놀라?”
“그러고 보면 우리랑 만났던 곳도 드루이드 마을이 아니라 12시 마을이었잖아?”
코엘 누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자 드마코 형도 비슷한 눈으로 에디나 누나를 쳐다봤다
“아니? 사고는 무슨? 내가 코엘인줄 알아? 생사람 잡네, 웃겨. 드루이드가 필요하단 이야기를 들으니까 신기해서 그런 거지. 신.기.해.서!”
누가 봐도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코엘 누나는 혹시라도 에디나 누나가 안 간다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에이, 농담이지. 그럼 빅터는 와처들하고 소작농들로 전락한 이들 혹은 전락할 위기에 처한 자들을 설득해서 땅을 준빟고 이주시킬 준비를 해줘. 정후랑 요크는 드워프들에게 그 설계도들 전달하고 교육해서 시제품 생산하도록 하고. 요크는 트리니티 상단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하게 봐주면 되겠다. 나랑 버크는 엘븐하임에 가서 여왕님과 면담을 하고 올게.”
코엘 누나가 이야기를 하고 나자 딱 두 사람만 남았다.
“나는?”
“말했잖아. 넌 드루이드 마을이나 갔다 와. 이왕이면 같은 지역 출신이 말하는 게 더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겠어?”
“나 혼자? 혼자 거기까지 어떻게 가. 산적을 만나면 어떻게 하라고.”
“드마코를 호위로 붙여줄게. 그럼 됐지?”
“드마코면 믿을만 하긴 한데, 내가 드루이드 마을에 갔다 와야 돼? 진짜?”
“그럼 내가 너랑 같이 갈까? 괜찮겠어?”
자신의 과거가 코엘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보단 입이 무거운 드마코랑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에디나는 코엘의 제안을 거절하고 드마코랑 같이 가겠다고 했다.
“(드마코, 확실히 알아 와. 사고치고 도망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맡겨둬)”
자신의 고향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한 에디나는 드마코와 코엘이 속삭이는 모습도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코엘이 나눠준 임무를 마치고 나서 일이 시작되면 이번 계획의 주재자는 정후 군일세. 모두들 정후 군의 지휘에 따라 잘 움직여 주게.”
“제가 리더요?”
“이 모든 걸 구상해 온 것도 너고 가장 잘 아는 것도 너잖아. 우리는 네 뒤에서 네가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게.”
“한번 리더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어 보면 정후 팀원의 정신적 성장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근데 이번에 우리가 진행하는 계획의 이름이 뭐야?”
갑작스럽게 떠맡게 된 리더의 자리에 당황스러웠지만 요크의 질문에 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떠올렸던 이름을 바로 대답해줬다.
“‘신세계’입니다.”
“크로니클이 열어가는 새로운 세계라 괜찮은데?”
‘영화랑 다르게 내 신세계는 나가리가 안 되게 최선을 다해야지.’
“정후 군. 그럼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은 이제 전부 전달받은 것인가?”
그 뒤로도 2시간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큰 틀과 시작 부분을 정한 우리는 각자의 임무를 마치고나면 트리니티 상단의 본부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들 맡은 임무 잘 마치고 건강하게 다시 보자!”
“에디나, 너만 잘하면 돼.”
“어?어...”
“신탁에 내려진 대로 변화가 시작되려는 건가?”
“알 수 없지. 트로니티를 통해서 철의 생산량을 늘린 것이 이렇게 바뀔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모두가 떠나고 남은 버크와 코엘은 엘븐하임으로 떠나면서 신탁에 의해 만나게 된 이정후가 가져올 변화가 어떤 미래를 낳을지 궁금해졌다.
“아, 정말 싫다. 내가 드루이드 마을에 이렇게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내가 아니라 빅터가 같이 왔어야 했는데 말이지?”
드마코가 던진 말에 에디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무슨 의미로 하는 이야기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정후도 눈치챈 것 같던데?”
“뭐?”
에디나는 팀원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들 알아챈 것인지.
“아오 귀 따가워, 뭘그렇게 놀라 놀라긴. 그나저나 빅터는 이런 일엔 워낙 젬병이라 에디나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직 모를걸?”
“빅터는...상처가 많은 사람이잖아.”
“음, 이야기 들었나?”
“잘 모르고 있다가 저번에 버크 부팀장님이 정후한테 자기 이야기 해주는 날 나도 들었지.”
에디나는 그동안 빅터와 버크의 사이가 기사와 시종이라기보다는 꼭 부자 사이처럼 보여서 신기하단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버크 아저씨가 정후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어떻게 해서 빅터를 만났고 키웠는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때부터 자신을 챙겨주는 빅터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빅터는 황제로부터 버려진 아들이었어.”
“어?!”
에디나는 빅터가 죽은 엄마와 함께 있던 걸 버크가 발견해서 10년간 키웠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갑자기 드마코로부터 나온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으로 들렸다.
‘빅터가 황자였다고?’
“음, 이건 몰랐나보군. 괜히 말했나?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드마코도 에디나가 당황하는 눈치에 순간 말을 잘못 꺼낸 건가 싶어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야 했다.
“있잖아, 빅터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드마코는 빅터와 만나 친구가 되기로 했기에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은 결혼하면 안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과 만나 슬픔을 느낄 사람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면 한다며 드마코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라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빅터가 스스로 잘라내 텅 빈 오른쪽 약지 손가락쪽을 보이며 다시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한 뒤로는 빅터에게 연애하는 건 어떠냐고 이야기를 꺼낸 지도 한참이 되던 차였다.
“빅터가 버크랑 코엘 그리고 내가 크로니클을 만들고 5년 뒤에 합류했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건 알지.”
“빅터를 알려면 빅터가 버크와 만나기 훨씬 이전. 빅터가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돼.”
“듣고 싶어. 어차피 드루이드 마을까지 가려면 남는 게 시간이잖아.”
드마코는 빅터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에디나가 빅터의 동반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빅터는 북부의 제국 ‘이슈라’를 통치했던 아이반 그로니지 대제의 아들로 태어났어.
“대제의 아들이면 황자님이라는 거잖아. 어린 시절은 행복했겠네.”
“황자라는 단어만 들으면 그럴 것 같아도 실제로 빅터의 어린 시절은 그렇지많도 않았어. 대제에겐 처가 무려 8명이었다고! 거기다 계승자가 될 수 있는 정통성 있는 아들도 4명이나 있었던 덕분에 그렇게 행복하게만 지낼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이 복잡한 건가. 근데 그래도 그렇지 황자가 일반 무지렁이 농민 자식들 중 하나로 태어난 것보단 좋지 않나?’
숲 속에만 살던 드루이드였어도 멸망한 이슈라 제국의 이야기는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에디나는황자였던 어린 빅터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해봤지만 아이였던 빅터의 모습은 상상이 잘 안됐다.
‘처음부터 지금 얼굴이었을 것만 같달까. 흠, 징그러운가?’
“빅터의 친부인 대제는 16살에 정략적으로 처음 맞이했던 황후 아나스타샤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해.”
“그건 들어봤어. 유명하잖아.”
에디나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들은 것만 같아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모든 걸 다 가진 소년 황제의 사랑이라니.
“아이반 대제는 가진 바 능력도 뛰어나서 북부의 작은 왕국이었던 이슈라를 제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을 정도였기 때문에 제국민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뛰어났던 대제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지. 그렇게 제국을 만든 대제가 30살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결혼 14년차 정도가 되었는데도 황후 아나스타샤에 대한 대제의 사랑은 옅어지지 않았지. 오히려 처음보다 더 깊어진 사랑으로 대했었다고 하니까.”
“황후에 대한 대제의 깊은 러브 스토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입으로 퍼져 나갈 정도였잖아.”
“그런 황후 아나스타샤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대제의 심정이 어땠겠어? 불행 중 다행히도 황후가 죽기 전에 황제와 황후 사이에선 황자가 둘이 태어났지만 첫째 황자는 어릴 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 버렸고 제국의 핏줄을 잇기에 황자 하나론 황실의 안위가 너무 불안하다는 귀족들의 끊임없는 발언들로 인해 결국 대제는 슬픔을 다 이겨내기도 전에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대귀족들의 딸들 중 6명을 골라 한꺼번에 처로 받아들여야만 했지.”
“우우...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니...지옥 같았겠다.”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아니..동의없는 결혼이면 행복할 리가 없어. 아무리 새로운 신부들이 미녀라고 해도 대제는 황후를 깊이 사랑했다면서.”
드루이드 마을 친구들 중 그저 나이가 차는 바람에 마을 분위기에 따라 결혼하고 난 뒤 술에 취한 남편에게 맞고 사는 친구들이 많았던 에디나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던 황제의 입장이 이해가 되서 불쌍하게 느껴졌다.
“니 말이 맞아. 너도 아는 걸 대귀족들은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인지 다음 대 황제의 자리에 자신의 손자가 오르길 바랐던 대귀족들은 탐욕스럽게 자신의 딸들을 대제의 황후 자리로 밀어 넣었던 거야.”
“근데 제국을 만들 정도의 능력자라면 그걸 몰랐을 것 같진 않은데?”
“대제도 그걸 알기는 알았어. 그게 이유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6명의 처와의 사이에서 대제가 얻은 자식은 결국 아들 하나뿐이었어.”
“계승권을 지닌 손자가 없었던 다른 대귀족들 입장에선 초조해졌겠네?”
“맞아, 대제가 황후의 사망 이후 얻은 6명의 황비들 사이에서 한명의 왕자밖에 얻지 못했던 것은 아나스타샤가 떠난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 대제가 그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도 욕심에 눈이 멀었던 대귀족들은 그 사실을 끝까지 외면했어. 욕심에 눈이 먼 대귀족들은 아이반 대제의 고통스런 심정도 모르고 끊임없이 후대를 더 많이 잉태시켜야 하는 것이 황제의 책무 중 하나라면서 재촉했지.”
“욕심을 부리면 꼭 탈이 나는데.”
“아이반 대제는 지독할 정도로 계쏙 후대를 생산할 것을 요구하는 대귀족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어. 그 반감은 이후 멀쩡하던 황후가 왜 갑작스럽게 죽었어야 했는지 이상하다고 의심으로 변했고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비밀리에 감찰대 ‘오프리츠니나’를 만들었어.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사랑하는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발견했고 그 정황과 연관된 대귀족들을 찾아냈지. 그렇게 대제는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사랑을 방해했던 대귀족들을 ‘황후 독살’ 혐의로 전부 처형시켜버렸어. 그 과정에서 대귀족들의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모두 처형시켜버렸지.”
‘슬픔이 너무 커서 미쳐버린 건가? 죄없는 사람들은 왜...’
드마코는 고개를 갸웃하는 에디나를 슬쩍 보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국민이 사랑하고 자랑스러웠던 아이반 대제가 대귀족의 뒤틀린 욕심 덕분에 이제는 폭군이 되어버렸던 거야. 그렇게 처형과 고문으로 인해 대귀족들이 쓸려나가서 공백이 생겼는데도 자신이 그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귀족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나서 빈자리를 탐낸 이들이 많았는데 어느 실행력 좋은 귀족이 빈자리를 노리고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야.”
“어떤 아이디어였는데?”
“황후 아나스타샤를 똑같이 닮은 여자를 찾아내서자신의 딸로 입양을 한 뒤에 황제에게 바치자고.”
“미쳤네. 나같으면 납작 엎드려서 어떻게든 시선 밖에 있으려고 노력할 것 같은데.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그 점이 귀족들의 습성과 너처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차이점이기도 하지. 아무튼 차기 황제의 외활아버지가 되고 싶던 그 귀족은 황후 아나스타샤의 그림을 그렸던 궁정화가를 찾아낸 뒤 그가 이전에 황후가 살아 있을 때 그렸던 황후의 초상화를 다시 한 번 그려 달라고 거액을 주고 의뢰했어. 거액을 받은 궁정화가는 대제 몰래 황후의 그림을 다시 그려 귀족에게 넘겨줬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궁정화가도 나중에 ‘오프리츠니나’ 감찰대에 걸려서 끝이 좋진 않았던 모양이야. 가진 재산의 절반을 턴 귀족의 그 집념에도 불구하고 제국민의 딸들 중에서 황후 아나스타샤와 닮은 미녀를 찾기 위해 샅샅이 제국을 훑었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근데 말했잖아. 귀족 새끼들은 권력에 미친 놈들이라고.”
“결국 찾은 거야?”
에디나의 질문에 드마코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