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화-Human Nature
“만약 내가 가진 차원이동능력 덕분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도 그런 우(愚)를 범하게 될까?”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에이, 할 거야. 할 거라고.”
엘리스는 쓸데없이 오지도 않은 먼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의 과제부터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다행히도 돌아가는 동안에는 팀원들 모두 분뇨의 냄새가 진동하는 마을을 들릴 생각이 딱히 없어서 굳이 시간을 맞춰 다음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팀원들은 강자였고, 길에서 잠을 자는 것이 차라리 도시에서의 숙박보다 나은 상황이었으니까.
우리는 그런 이유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짐을 챙겨 말을 끌고 도시를 나오려고 천천히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광장에는 어찌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누군가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번에 소작농이 된 게으르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들은 들어라! 황제께서 제국민으로 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로서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너희들은 황제의 명을 감히 어기고 세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따라서 적법한 제국의 법에의해 그대들의 땅은 오늘부로 황제를 대신하여 지방을 통치할 권한을 가진 영주의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관대하신 황제폐하께서는 그대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대들이 가진 토지에 대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그 권리를 보장하신다. 그러니 열심히 일한다면 언젠가 그대들의땅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처음 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 어떤 농부에게 세금을 못 낸 죄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일시적으로 가져가겠다는 관리가 오늘은 수십 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이들이 앞으로 소작농이 되어 자신들이 내지 않은 세금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읊고 있었다.
“세금을 못 내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이들이 많네요?”
내가 빅터 교관에게 물어보자 빅터 교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저렇게 대단위로 소작농으로 계급이 격하되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입니다. 이상하군요.”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자 드마코 형이 뒤에서 따라오면서 끼어들었다.
“불과 몇 년 전의 내 경험대로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이를 이런 도시에서 보는 건 1년에 1번 보기도 어려운 모습이었어. 보통 노름을 해서 돈을 날려먹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처럼 풍년이 계속되는 시기에 소작농으로 전락할 일은 별로 없을텐데?.”
“빅터, 한번 확인 해 봐야 할 것 같구나.”
버크 아저씨의 말을 들은 빅터 교관은 우리들에겐 도시 밖으로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으면 뒤따라 오겠다며 잠시 어딘가로 말을 돌렸다.
“어딜 가는 거죠?”
“이곳에 있는 와처의 지부에 잠시 들러서 정보를 얻으려는 거겠지.”
“그렇게 예감이 좋진 않네요.”
버크 아저씨의 앞에 앉은 요크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별일 아니겠지. 아니, 아니었으면 하네.”
우리가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빅터 교관은 금방 올 것만 같았던 말과 다르게 한참이 지나도 합류하지 않았다.
계속 움직이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나뭇가지에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흔적을 주기적으로 남기긴 했지만 더 움직이면 오늘 저녁 내로는 합류가 어려워질 것 같다는 코엘 누나의 판단에 해가 저물기 전에 이동을 멈추고 길옆에 야영지를 만들었다.
저녁 메뉴는 카레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나중에 빅터 교관이 늦게라도 오면 간단하게 데워서 먹어도 좋겠다 싶은 음식으로는 카레라이스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이 카레라는 거 조금 맵긴 한데 우리 같은 모험가들에겐 야외음식으로서 정말 좋은 음식같다.”
“그러니까. 그냥 물에다 풀어서 이것 저것 넣고 푹푹 끓이기만 해도 이런 맛이 나올 줄이야.”
‘오뚝이가 만든 4분요리가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한국인에게 익숙한 카레요리는 인도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우리가 먹는 카레는 인도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인도인에게 이 음식이 인도의 음식이냐고 묻는다면 인도 음식이라고 선뜻 말하기엔 출신 국적이 모호한 음식이다.
일설에 따르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영국인들이 현지인인 인도인이 그때 그때 가정마다 다르게 존재하는 향신료 레시피를 따라 향신료들을 섞어서 만들던 요리를 자기들 방식으로 커스터마이징을 하였다.
이후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외치며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이 되겠다는 취지를 갖고 있던 일본의 사회지도부 입장에선 개화기 당시 영국인 선원들의 덩치가 큰 이유를 영국인들이 먹던 ‘커리’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일본인들의 체구를 유럽인들처럼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커리를 영국요리로서 보급하였다.
그렇게 영국인들이 빵과 함께 먹던 카레는 일본인에 의해 밥과 함께 먹는 카레라이스로 바뀌었고 나중에 일본인들에게 카레가 사실은 영국음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땐 이미 ‘카레라이스’가 일본의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통해 유입되어 다시 한 번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로컬라이징이 되었고, 현재 우리가 먹는 ‘카레라이스’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릴 때부터 급식을 통해 김치를 먹는 것이 익숙해져 있어서 모르지만 카레를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아무튼 다른 카레들에 비해 강황 가루가 많이 들어가 노랗게 변한 한국식 카레를 밥과 섞어 먹으면서 카레에 대해 떠올려보자니 내가 먹는 음식처럼 이곳의 음식들도 내가 알려준 음식들을 바탕으로 변형될 것이 기대되기도 했다.
드마코 형에게 이런 저런 레시피들이 담긴 너튜브 영상들을 따로 챙겨주자 가지고 온 재료들로 가능한 요리들을 드마코 형이 전담해서 하고 있는데 형의 요리 솜씨가 좋아서인지 한국에서 사 먹는 음식 못지않게 드마코 형의 음식들은 마치 셰프가 한 것처럼 맛이 제법 괜찮았다.
"드마코 같은 남자만 있었어도 내가 드루이드 마을에서 안 나왔는데, 휴우"
"언니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니에요?"
“뭬야! 나도! 어? 소녀같은 감성을 갖고 말야. 말같은 남편과 고양이같은 자식들과 함께 미래를 상상하던 때가 있었다고!”
“말같은 남편과 고양이같은 자식? 왜 말이랑 고양이야.”
“흐흐흐, 정후야. 알면서. 말근육을 봐 얼마나 건강해! 어? 크크크”
말은 대충 알겠는데 고양이같은 자식은 뭔지 내가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음흉한 미소를 짓고 에디나 누나 옆에 있던 코엘 누나가 고양이의 습성을 넌지시 알려주며 고양이 같은 자식의 의미를 알려줬다.
“고양이는 개랑 다르게 독립적인 삶을 살잖아. 부모 입장에서 개같은 자식도 나쁜 건 아니지만 고양이처럼 자기 스스로 알아서 잘 사는 자식들이 최고라는 거지.”
“아! 그래서.”
‘근데 사람 자식한테 개같은 자식은 좀...’
“그런 거지.”
캠핑에 온 것처럼 이들과 이렇게 식사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크로니클의 팀원들과 식구(食口)가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레 냄비에서 고기만 골라서 건져 먹는 코엘 누나에게 에디나 누나가 혼자 다 처먹을 거냐면서 빅터 교관이 먹을 거 남겨둘 생각은 안하냐고 핀잔을 줄 때쯤 빅터 교관이 먼지가 나지 않도록 말의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 내리곤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야영지에 다가왔다.
“식사하고 계셨군요. 제가 늦지 않게 온 것 같습니다.”
“잘 왔다. 빅터, 네가 언제 올지 몰라서 먼저 먹고 있었는데, 딱 맞게 왔구나. 어서 와서 같이 먹자꾸나.”
“알겠습니다.”
“손부터 씻어요. 빅터!”
버크 아저씨는 빅터 교관을 마치 아들처럼 대하며 따뜻하게 맞이해줬고 에디나 누나는 손부터 씻으라며 휴대용 샤워장비로 물을 뿌려줬다.
‘저 둘 진짜 뭐 있다니까’
빅터 교관이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드마코 형이 왜 이리 늦었냐고 물었다.
“처음에 우리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어, 드마코.”
“설마 로만이 타락한 건가? 그 녀석이 그럴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드마코 형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빅터 교관의 말을 듣자마자 혹시라도 버크 아저씨는 자기를 따르던 부하 중의 하나가 원인이 된 것인지 많이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타락이라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느새 따로 챙겨둔 카레 덮밥 한 그릇을 전부 싹싹 비운 빅터 교관이 숟가락을 내려놓자 에디나 누나는 입가심으로 마시라며 캔맥주를 던져줬고 빅터 교관은 한모금을 들이켜더니 자세를 잡고 설명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노예해방 전쟁은 대륙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전쟁터에선 많은 젊은 남자들이 사라졌고, 그 과정에 휘말린 여성이나 아이 그리고 노인들까지도 죽어 나갔죠.”
“맞아,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지...”
드마코 형은 이때 잠시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젊은 남자들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피난을 떠났고 그들이 농사짓던 넓은 제국의 토지들도 황폐해졌다는 것이 당시의 제국의 수뇌부에는 골칫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우리 요크 덕분에 철제 농기구가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되면서 생산량을 증가시켜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 않나?”
“맞습니다. 저희 와처도 트리니티 상단의 혁신이 일으킨 변화로 인해 대륙 전체의 식량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식량이 넉넉해지면서 이전의 전쟁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것만 같았죠.”
“그거야 그렇지. 우리 엘프나 드워프들이 사는 곳에도 인간들이 식량을 가지고 들어와 거래를 원할 정도였으니까.”
“그럼 도대체 문제가 뭐였던 거야?”
빅터 교관이 듣고 온 바에 따르면 문제는 귀족들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많은 재산을 획득한 제국의 귀족들은 저렴하고 튼튼한 농기구로 농사를 짓게 되면 더 많은 생산량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예상을 했고 이내 더 많은 자산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자신들의 토지를 늘려나갈 욕심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불행 중 다행히도 자작농들은 귀족들의 욕심을 채우고도 전쟁으로 이미 줄어들었던 인구덕분에 쉽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농사를 못 지으면 못짓게 된 전후의 시대 덕분이라면 덕분이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을 다시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 귀족들도 대토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움직이는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탐욕이 그렇게 가볍게 끝날 리가 없지.”
“드마코 말이 맞아.”
'드마코 형은 귀족때문에 고통 받았던 경험이 있는 걸까?'
황제가 제국을 세우는데 이바지한 이들을 공신功臣으로 삼고 그들에겐 막대한 부와 권한을 나눠주었는데 그 중 제일은 면세의 권리였다.
“하아...그때 그 건인 것 같군.”
이야기를 듣던 버크 아저씨가 대장군일 적에 본 서류에 공신을 누구로 할 것인지 기록된 문서들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 진 귀족들이 서로 자신들의 속한 파벌의 귀족들을 공신으로 밀어넣기 위해 많이 싸웠네. 누가 더 나은지 객관적인 자료라고 할 것이 마땅치 않았던 황제는 당시 파벌들을 이끄는 수장들의 합의에 따라 승인을 해줬지. 그렇게 공신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 자들도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공신의 위에 오르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네.”
“그때 과도하게 공신의 자격이 나눠진 것이 이제 화근(禍根)이 되었습니다.”
빅터 교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면세지의 넓이가 너무 넓어진 덕분에 제국은 그 넓은 땅을 깔고 앉고서도 정작 세금을 거둘 토지가 부족해졌다. 세금을 거두기 어려워지자 제국의 중앙재정이 파탄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공신의 직위를 애들 장난감마냥 다시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의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는 대신(大臣)들은 면세지를 줄이는 것은 애초부터 생각하지도 않고 줄어드는 중앙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토지가 아닌 다른 종류의 세금을 새로 만들어서 납부하도록 신법(新法)을 탄생시켰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귀족에게 부여된 이 같은 세금의 부과가 귀족들에게만 부과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영주인 귀족들이 자신들이 내야할 세금을 영지민들에게 전가轉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금의 전가?”
세금의 전가는 그럭저럭 버틸만했던 자영농들의 조세 부담을 급속히 높여 버렸고, 자영농이었던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영주에게 자신의 땅을 조세 대신 납부하며 '소작농'의 신분으로 주저앉거나 땅을 버리고 유민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최근 우리가 본 것은 그렇게 제국 내에서 현재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소작농들 중 일부였을 뿐이라는 게 빅터 교관이 알아온 사건의 전말이었다.
“로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거군. 그녀석은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의 귀족들이 하던 대로 따라했을 테니까”
“노예가 ‘소작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한 셈이군요.”
“젠장!”
빅터 교관과 버크 아저씨는 굉장히 괴로워했다.
“노예를 이 세상에서 없애고 나면 세상에 노예로 고통 받는 이들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우리가 보낸 시간은 뭐였지?"
"30년의 세월이 무의미해졌군."
엘리스의 말이 오늘따라 기계처럼 차갑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