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현자의 시간
“하압!”
“이젠 제법 칼질이 정확해지고 있군요. 다시!”
배웠던 기본기를 모두 쏟아내면서 빅터 교관을 몰아붙여 봤지만 빅터 교관의 검은 마치 철벽처럼 뚫릴 것 같지가 않았다.
“정후 단원, 검식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억허억, 그야 상대방을 이기려고 있는 거겠죠.”
“맞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린 검식은 일종의 교과서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검을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벨 때는 거기에 맞춰서 검을 흘리거나 튕겨내고 다시 반격을 취하고, 반격이 어렵거나 빈틈이 보이지 않을 경우엔 상대방의 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빈틈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빅터 교관이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면서 방금 전 나와 나눴던 검격을 다시 재현했다.
“헉, 그렇습니까?”
“제가 그저 정후 단원의 검을 받아내기만 했는데도 정후 단원은 지쳐버렸지요.”
그랬다. 배운 것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일념에 빠져 하염없이 베고 찌르고를 해 봤지만 지친 것은 나뿐이었다.
“검을 휘두를 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면 쉽게 지치는 법입니다. 정후 군의 검은 본인의 검을 보여주겠다는 의식은 확고하게 세워졌지만 정작 상대방의 검을 보고 있질 않습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선 내 검을 보여주는 것보다 상대방의 검을 읽어야 합니다. 내가 찌르면 상대방이 어떻게 대응할지 내가 벤다면 상대방은 거기에 맞춰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죠. 검을 다룸에 있어서 실전상황이 벌어지면 강자와 약자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검을 최대한 정확히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서 이길 수 있게 내 검을 썼을 때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멀었군요.”
“아니요, 말했지 않습니까. 자신의 검은 확실히 보여줬다구요. 배운 지 오래되지 않은 것치곤 정말 잘하셨습니다.”
내가 시무룩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빅터 교관은 자신의 생각보다 내가 기본기를 잘 익히고 있다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더라도 기본기는 앞으로도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자세와 자세에 따른 호흡법 그리고 자세에 맞는 스텝을 배우던 기본기 학습은 이제 졸업을 해도 되나 했는데 빅터 교관은 앞으로도 매일 이 자세를 천번씩 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걸 앞으로도 매일 자세별로 천번씩 반복하라고?’
내가 암담해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빅터 교관은 고수가 되더라도 기본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며 마스터의 위치에 오른 자신도 매일 기본기 훈련을 하고 있다고 설명해줬다.
“이제 굳었던 몸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으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제국검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스탠다드 포스’를 가르쳐 드릴 겁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는 제국검술만 정확히 익혀도 비기너, 익스퍼트, 마스터로 이어지는 단계들 중에서 익스퍼트 최상급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빅터 교관의 말에 내 검에서도 조만간 ‘빛’을 뿜어낼 수 있을 것만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정후 단원이 바라는 ‘오러 블레이드’는 보통 마스터의 단계에는 올라가야 합니다. 억지로 뽑아내려고 한다면 익스퍼트 최상급에서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것은 정후 단원이 바라는 진짜가 아닐 겁니다.”
“네?”
어디선가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제가 가르쳐 드린 제국검술 고급 단계까지 마치고 나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기본기를 익히는 동안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자유롭게 검강으로 일기당천의 무위를 보이는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대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가진 재능이나 운에 따라 제국검술 고급에 도달한 자들 중 극히 일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도 합니다.”
내 표정에서 포기의 각을 느낀 것인지 빅터 교관은 처음 날 훈련시킨 때처럼 떡밥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 가르쳐 드리고 있는 제국검술은 제가 와처의 단장으로 활동하며 한 단계 더 가다듬은 검술입니다. 제게 제국검술을 배운 이들 중 대부분이 익스퍼트 최상급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정후 팀원의 습득 속도라면 마스터의 단계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부여 차원에서 제게 잠시라도 마스터의 힘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목표가 있으면 열심히 하는 타입인 것 같으니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빅터 교관은 이내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켜 세우더니 제국검술이 얼마나 멋있는 검술인지를 내 앞에서 시연해 보였다.
부웅 부웅~
빅터 교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 검술은 부드러우면서도 빨랐고 빠르면서도 강맹한 힘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보거나 서울에 세워진 무슨 타워를 볼 때처럼 눈을 돌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원했던 강함은 저런 거였어!’
빅터 교관은 시연하는 내내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냈지만 딱히 지쳐 보이진 않았다.
“빅터 교관님은 현재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랐죠?”
“제 현재 수준은 마스터 최상급입니다.”
‘마스터 최상급은 올라야 방금 전 빅터 교관이랑 비슷한 느낌으로 검을 쓸 수 있게 되는 건가?’
처음 2주간 나와 에디나 누나를 특훈시킬 때 똑같이 훈련을 진행하면서도 왜 땀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호흡하나 흐트러진 적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뉴비가 고인물 따라 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지지.'
버크 아저씨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했는데 마스터 최상급인 빅터 교관이 이 정도라면 버크 아저씨는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했다.
“그럼 버크 아저씨처럼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뭘 할 수 있죠?”
“단장님과 부단장님이 올라간 그랜드 마스터는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전략병기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저 같은 마스터가 단순히 전장을 지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죠.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라면 10명이 달려들어도 이기기 어렵고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으론 1000명이 차륜전으로 덤벼들어도 단장님이나 부단장님에게 집니다. 결코 숫자로 압도할 수 없는 경지죠.”
나랑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알고 보니 재벌이었다는 라는 소리보다 충격적인 소릴 들은 것 같았고 아저씨의 입에서 황제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랑 같이 다닌 사람들 정체가 사실은 ’리틀보이‘와 ’팻맨‘이었다 이거지? 어쩐지 날 처음 봤을 때도 방송에서 원주민을 대하던 연예인들이 긴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도 걱정하는 눈치가 안 보이더라'
“그럼 지금 제 수준은 어디쯤이죠?”
“비기너 상급입니다.”
“비기너도 초급, 중급, 상급으로 단계가 나뉘나요? 마스터 최상급이란 위치가 있는 걸 보면 익스퍼트는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뉘구요?”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묻자 약간 머뭇거리던 빅터 교관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비기너는 그냥 비기너입니다. 익스퍼트는 맞습니다. 마스터도 같은 단계로 나눠집니다.”
“그럼 왜 저한테는 비기너 상급이라고 했어요?”
“제 나름대로 가르친 경험에 따르면 정후 단원이 이제 곧 익스퍼트에 오를 것 같다는 의미였습니다. 정후 단원은 충분히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나도 과외하는 학생과 부모님에게 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서 그 뉘앙스가 이해되는 것만 같았다.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날 구슬러서 열심히 수련하도록 응원하고자 한 빅터 교관의 마음이 느껴져서 더 반항하진 못하고 억지로 오러를 뽑아낼 수 있다는 최상급까지 도대체 몇 단계가 남은 건가 싶어 손가락을 접으며 세고 있는데 엘리스가 조용히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말이 쉽지. 게임으로 치면 실버 랭크가 마스터 랭크까지 올라가는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막연한 기대로 시작했던 수련의 현실을 접하게 되자 어쩐지 허탈해져서 맥이 탈 풀리는 것 같았다.
빅터 교관도 내 마음을 이해해줬는지 기초훈련만 마치고 오늘 훈련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난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리스, 내가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르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빅터 교관도 10년이 걸려서 수련한 뒤에야 깨달음을 얻고 나서 마스터가 되었다는데”
“같은 재능일 때 6년은 단련을 해야 익스퍼트 최상급인건가?”
어쩐지 인공지능에게 위로받는 것만 같았다.
“빅터, 정후 군의 검술 습득 속도는 어떤 것 같으냐?”
“제가 가르쳐 본 제자들 중에선 그 속도가 수위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제 검을 익힌 지 두달이 된 성인이 익스퍼트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니까요.”
“그렇구나. 나가서 일 보렴.”
“편히 쉬십시오.”
빅터가 자리를 비우고 나가자 코엘과 버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후우, 정후와 같은 이들은 전부 정후처럼 검술을 빨리 익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지금으로썬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둘은 이후 엘프차를 마시면서 각자 생각에 잠겼다.
단원들과 도시 가까이에 있는 유적지 입구에 도착하자 제국에서 나왔다는 조사단으로부터 주의사항과 현재까지 진척 사항을 한 번 더 전달받았다.
유적지 입구에서 출발한 뒤 여러 사람의 피가 묻은 위치들을 지나자 전달받았던 표시된 지역이 나왔다. 그러면서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발대는 여기까지밖에 못 들어 왔나봐.”
‘피...’
“나의 크고 아름다운 ‘레오’의 힘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 같네? 흐흐”
“언니, 그렇게 웃지 마요.”
“각자 가지고 있는 LED 랜턴을 켜도록 하지.”
“자..잠깐만! 내 것만 켜도 되지 않을까?”
우린 코엘 누나의 말을 무시하고 각자 자신의 LED 랜턴을 꺼내서 켰다.
“아니...내 ‘레오’의 강력한 빛의 힘을 독자적으로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는데...”
코엘 누나의 랜턴보다는 작았지만 6명이 함께 켜자 딱히 코엘 누나의 랜턴을 꺼도 상관없었을 정도로 어두웠던 유적지 지하가 환해졌다.
“뭐 이렇게 환해서야 어지간해선 트랩을 밟을 일도 없겠는데?”
“드마코, 그래도 조심해야지. 팀원들 모두 지금부턴 척후경계 임무 담당인 제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라주셔야 합니다.”
“알았어, 알았어.”
빅터 교관은 마치 게임 속의 도적처럼 먼저 한발짝 한발짝 앞으로 나가면서 유적 속의 터널을 샅샅이 랜턴으로 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빅터 교관의 지시에 따라 밟아야 할 위치와 밟지 말아야할 위치를 지시받으며 조금씩 움직였다.
“잠시 대기!”
푸슉
빅터 교관이 대기하라는 곳 앞에선 화살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빅터 교관이 빠르게 뛰라고 할 때는 기관이 움직여 천장이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여기는 우리한텐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유적은 아닌 것 같네”
“빅터처럼 능숙한 탐사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을 때나 할 소리지.”
잠시 쉬자는 빅터 교관의 지시에 물을 마시고 에너지 바로 영양섭취를 할 때 팀원들이 너무 긴장하면 오히려 실수할 수 있다고 다독거려주긴 했지만 눈앞에서 독이 묻은 칼날이 날아가고 화살이 아래에서 위로 튀어 나오는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니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유적지 내의 트랩들을 지나갈 때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혼자 왔다면 벌써 죽었을 위협의 순간들을 여러 차례 경험하고 나자 흔한 말로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내가 뭐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면서 이러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