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7화-이세계의 덕후들
인벤토리에서 장비를 꺼내서 이윽고 작동시키자 팀원들은 처음 음악을 틀어줬을 때처럼 깜짝 놀라서 다독여야만 했다.
내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니라 빔 프로젝터였다. 하얀 천을 설치하고 빔 프로젝터를 꺼내서 영화를 상영해주자 보인 팀원들의 기겁하는 반응은 마치 처음 영화를 본 1920년대의 대한인들의 반응같았다. 이미 너튜브 녹화를 하느라 카메라를 통해 영상물에 대해서 접한 적이 있었음에도 그것과 다르게 실사처럼 찍힌 영화를 처음 본 이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초고대문명에나 존재했다던 아티팩트에 대한 설명 중에 이런 장치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기록에 따르면 그때 이런 영상기록 장치가 있었다는 것 같았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사실적이네.}
{우리를 찍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야...}
{너, 아까 엄청 놀라더라.}
{그렇게 말하는 누구도 펄쩍 뛰더만}
{그만하자...누워서 침뱉기야.}
난 크로니클의 팀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줄 영화로 뭘 골라야 하는지 엘리스와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이세계에서 상영되는 첫 영화이니만큼 어찌 보면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으니까.
너무 자극적인 영화들은 목록에 올리지도 않았고, 현대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반영되었거나 현대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영화들도 전부 제했다. 세계대전을 다룬 '팀 오브 형제들'이라거나 '사자 이병 구하기'같은 영화들이 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들에게 트라우마를 일으켰듯 너무 실감나는 중세 전투가 담긴 영화들도 다 뺏다. 그렇게 내가 소장하고 있는 DVD들 중에서 괜찮다 싶은 작품들을 고르고 거기서 이거 빼고 저거 빼고 나니 보여줄 작품이 몇 개 남아있지도 않았다.
고심한 끝에 이들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싶어서 고른 영화는 바로 엘프와 드워프가 나오는 영화이자 3부작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의 황제' 시리즈 중 1부였다.
어딘가 다른 듯하면서도 자기들과 비슷한 엘프와 드워프의 모습이 나와서였는지 이들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1편을 보는 내내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모습들을 전부 보여줬다.
‘인도 사람들이 극장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단순히 극장에서 관람하듯 가만히 앉아서 본 게 아니라 장면들에 따라 일어나서 같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마법이 나올 땐 기겁하며 놀라더니 지하에서의 ‘발록’과의 전투에서는 갑자기 모두 무기를 꺼내기까지 했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등장인물들의 위기 순간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거리기도 했다.
빅터 교관의 경우 어째서인지 멸망한 왕국의 왕손이나 적통 후손으로 나오는 원정대원 인간에게 깊게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영화를 보는 리액션은 따로 세팅해둔 카메라에 모두 실시간으로 담겼다.
첫날 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나선 너무 섣불리 보여준 건가 싶어서 2,3부는 나중에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검은 표범'의 상영 이후 많은 흑인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 국가의 흑인들의 태도에 동화되고 제스처를 따라했던 것처럼 '목걸이의 황제' 속 등장인물들이 마치 자신이라고 생각하듯 한동안 이들은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들을 따라 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드워프들은 모습은 우리 선조들의 모습답군.”
“맞아 맞아. 우직하게 도끼를 들고 누구보다 앞장서는 모습이 드워프가 배워야 할 자세였어요.”
‘아닙니다’
“그래, 드워프들은 역시 지저분해 보이더라. 수염도 그렇고. 엘프들은 어때? 딱 봐도 나처럼 아름다운 모습인 게 고귀한 느낌이 팍팍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에요.’
“고귀한 의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는 왕손의 모습은 기사의 표본이었습니다.”
‘칼 집어넣어요, 빅터 교관’
괜히 영화를 보여준 것 같아 2,3부를 보여줄 엄두를 못 내고 매일 1부를 재차 관람해야 하는 와중에도 다행히 팀원들이 1부에 심취한 덕분에 인지를 못하고 있어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디나 누나가 또 내 눈치를 보고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근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될 것 같은데? 정후야 이게 전부야?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게, 일부러 저러는 것 같다니까.’
에디나 누나가 말을 꺼내자 그때까지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 1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가다가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름 돋네. 공포 영화도 아니고.’
“하하, 오늘은 그래서 2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깐?”
“근데 왜 맨날 1부만 틀어준 거야?”
“여러분이 그거만 틀어달라고 하셨잖아요. 밥 먹기 전부터 틀어달라고 하신 분들이 누구였죠?”
“어...흠...”
“내 기억엔 코엘이 좀.”
“얘 봐라. 사람 잡네? 에디나, 넌 안 그랬어? 정후를 제일 닦달한 게 누구였는데 이래.”
“코엘 단장, 진정해. 워워.”
“내가 말이냐? 어따대고 워워야 워워는!”
투닥거리던 팀원들은 말을 멈추고선 그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에디나 누나가 얄미워서라도 저녁까지 2부에 대해선 말해줄 수 없다고 입을 닫았다.
“에이, 말로 설명해서 듣고 나면 막상 2부 볼 때는 재미가 반감될 걸요,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야기를 다 말해 버리는 걸 ‘스포일러’라고 하는데 어떻게 스포일러 좀 해드릴까요?”
“아냐, 아냐. 기다렸다 이따 볼게.”
“정후야, 먹은 것도 다 치웠어. 빨리 보여줘~”
"정후군, 밥 먹는 동안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네."
"흠흠...정후 팀원 그 비운의 인간 왕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부를 보고 난 팀원들은 이젠 속지 않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3부가 있지 않냐면서 또 보여달라고 했다.
“내일 어떻게 갈려구요?”
“하루 쉬어! 오늘 3부 보고 내일 하루 종일 전체 관람을 하도록 하지. 어때?”
“급할 것도 없는데 나도 좋아!”
하필이면 이들에게 최대한 괜찮은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결과 보여준 것이 최초에 개봉했던 버전이 아니라 트릴로지 확장판이었다. 4시간 30분이 넘는 1부를 몇 번이나 봤는지 나중엔 팀원들은 각자 배역을 부여 받아 대사를 주고받으며 보고 있었다.
‘내가 다음부터 이렇게 긴 상영시간인 영화들 보여주면 개다. 개. 아...지겨워 죽겠네.’
펭귄 친구가 나오는 영상을 무한반복하며 강제 시청하는 유부남 유부녀들의 애환을 크로니클 팀원들과 다니면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젠 1부 시작하는 장면만 봐도 토 나올 것 같아.’
전날 저녁 2,3부를 새벽까지 본 팀원들은 그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자기들이 생각하는 인물들의 심리분석을 비롯하여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해가 지고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버크 아저씨가 직접 빔 브로젝터를 설치했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언제 트는 법을 배운 거지?'
‘그거 몇시간인데?’
‘아무리 내가 그 영화 시리즈들을 좋아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절대 입 밖에도 안 꺼낼 거야.’
이 영화 상영 이후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이들에게 보여줄 영화들의 리스트에서 ‘철남자’로 시작되는 복수자들 시리즈는 아예 빼버렸다.
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발을 붙잡혀 발굴 임무를 부여받은 유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도시에 처음 예상했던 날짜보다 삼일 늦게 도착해야 했다.
‘작작들 좀 보자니깐. 아주 내가 이세계에 덕후들을 만들어 버렸어.’
버크 아저씨가 이끌었던 이들과 와처들로 인해 제국의 영토 내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노예제만 사라졌을 뿐 이세계인들의 도시에는 여전히 계급제도는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도시의 영주는 ‘로만 피델리Roman fideli’ 남작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피델리 남작은 버크 아저씨에게 충성하며 돌진을 담당하고 있는 기병부대 ‘에퀴테스’ 출신이라고 했다.
아저씨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것인지 친분을 증명하는 것인지 도시의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버크 아저씨의 ‘붉은 수염’일 적 모습과 로만 피델리 남작으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서 함께 포효하는 모습으로 된 사람 크기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밑에는 붉은 수염 대장군과 함께 싸운 남작의 일대기가 명판에 대략적으로 적혀 있어 말로만 들었던 아저씨가 대장군이었다는 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동상을 본 빅터 교관은 뿌듯해하면서도 동상이 당시 붉은 수염일적 버크 아저씨의 위엄을 모두 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동상을 본 코엘 누나는 눈에 거슬린다면서 빨리 지나가자고 했고 요크는 동상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가 들어간 도시는 도시 외부엔 농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성벽 안쪽의 도시 내부에는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와 각종 시설들이 존재했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거리에서 풍기는 악취에는 좀처럼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팀원들과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소리가 났다.
“멀, 니 놈은 제국이 영주님께 부여한 권리에 의해 영주님과 국가에 헌납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았다.”
“억울합니다. 그걸 어떻게 다 낼 수 있겠습니까?”
“성실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농부들도 많다. 니 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야!”
“그건 사정이 있...”
“시끄럽다! 혓바닥이 길구나!”
도시에서 트리니티 상단이 운영하는 여관을 찾아가고 있는데 말을 탄 기사 앞에 서있던 어떤 남자가 농부로 보이는 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나 보군요.”
“세금을 못내는 경우 어떻게 되는 거죠?”
“미납액이 일정액수를 넘어서면 자신이 가진 땅을 담보로 삼아 일시적으로 영주의 소작농이 됩니다. 자신이 지불해야할 책임을 모두 마치고 나면 땅을 돌려받고 자작농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작농으로 돌아올 수 있나요?”
“트리니티 상단 덕분에 농기구가 발달했고 그로 인해 소출이 증가해서 몇년 노력한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진 않군요.”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부가 다시 자작농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에 이세계는 다른 건가 싶었다.
빅터 교관과 대화를 나누는데 요크가 안타깝게 쳐다봤다. 나머지 팀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지 말을 몰아 여관으로 계속 움직였다.
‘거 참 찜찜하네. 내가 뭘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니 다들 가만히 있는데 나서서 그만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소작농이 될 것을 요구하는 기사와 남자를 지나쳐서 여관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풀고 모험가 길드의 지부를 찾았다. 모험가 길드 지부로 간 버크 아저씨와 나는 크로니클이 이 도시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이동해야 하는 지역에 대해 현재까지 확인된 정보를 전달받아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정후 팀원, 그동안 익힌 기본기를 아직 까먹지 않았는지 이따가 연무장에서 한번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대련이야? 나도 껴도 되나?”
“아서라. 드마코. 이제 검술 익히기 시작한 애한테 검도 아니고 익숙하지도 않은 창으로 들이밀면 퍽이나 잘 대처하겠다.”
코엘 누나가 지나가면서 드마코 형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갔다.
“심심하단 말야. 나도 끼고 싶어!”
“나중에 해라. 나중에. 좀 더 정후 크고 나서. 아직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