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화-삶의 이유(2)
너무나 높아서 눈바람만 휘날리는 그 곳에서 눈발을 맞으며 버크 아저씨가 지쳐서 주저앉아 쉬고 있을 때 그곳에 사는 거미를 보셨다고 했다.
“거미는 작은 털로 뒤덮여 있었네. 그 추운 곳에서 마치 햇살을 만끽하는 것 같았지. 동굴에 살면서 보던 거미보단 많이 작았지만 거미를 그곳에서 보고 있자니 그것도 생명체라고 반가웠다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이 찾아왔지.”
“그럼, 그때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던 거야?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아저씨가 그랜드 마스터?’
“맞아. 그때 얻은 깨달음을 다크엘프의 마을에서 머물면서 가다듬은 덕분에 그랜드 마스터에 오를 수 있었어.”
“무슨 깨달음이었나요?”
“우리가 태어난 것에는 딱히 이유가 없고 내가 그렇게 별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작은 존재와 같다는 깨달음이었어.”
“좀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흠, 내가 이런 걸 설명하는 재주가 없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말해보자면 정후 군처럼 우리가 뭘 하고 살지 고민할 때 자연스럽게 왜 존재하는지,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게 되네. 그런데 그런 거창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자신을 너무 크게 생각하여 생기는 망상에 속한다네. 그때 난 나란 존재가 그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네. 왜 사는지를,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봐야 거기에 어떤 대단한 이유가 없었어. 일종의 선물이라고나 할까.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군.”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요?”
“말은 쉽지만 그걸 일상에 녹이려면 쉽지 않을 거야.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버크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정후 너에게 갑자기 생겼던 너의 능력처럼 우리도 그렇게 태어난 거야. 즉, 우리의 삶도, 너의 능력처럼 자신이 얻고 싶어서 혹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짠하고 나타났다는 점에선 사실 다를 바가 없는 거지.”
두 사람이 서로 알겠다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난 말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 깊이 와 닿지가 않았다.
“내가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거미는 나의 깨달음을 위해 준비된 존재였을 테지만 난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네. 동굴 속에서 태어난 드워프 돌연변이라고 여겼던 내 삶이 대단하다고 여길 수는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 거미가 거기 있는 것은 드워프들이 그랬고 엘프들이 그랬고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그저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였을 테지.”
“존재의 이유가 딱히 없으니 결국 존재의 가치로만 본다면 조그만 거미나 늙은 버크나 같은 거라는 거야. 작은 것과 큰 것이 사실은 의미상으론 다르지 않은 거지.”
‘물아일체 뭐 비슷한 건가? 설명해주니까 점점 더 모르겠는데’
‘사람이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내 표정이 이해를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버크 아저씨는 괜찮다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언젠가 정후군도 깨닫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네. 내게 큰 깨달음이 꼭 자네에게도 큰 깨달음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잘 하고 있어. 그가 가져올 변화를 생각한다면 그가 선민의식을 가져선 곤란해}
거미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아저씨는 그때부터 그저 주어진 삶에 감사하기로 하고 이 삶을 즐기는 방법으로 모험가라는 직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모험가를 자신의 남은 생의 직업으로 삼기로 하고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또 엘프들을 구해 엘프 마을로 돌아갔지만 이전과 다르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마을 생활이 불편해져서 다시 세상으로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코엘 누나와 만났고 그동안 못했던 ‘칼의 대화’를 격렬하게 나누셨던 것이 크로니클이 시작된 이유라고 설명하셨다.
한가지 의아한 것은 칼의 대화를 나눴다는 이 부분에선 누가 이겼는지가 불분명했다는 것이었다.
“크로니클에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가장 중요해. 누군가 강요해서 누군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하는 거지. 어차피 주어진 삶이니까 이왕이면 세상에 우리가 있었다는 작은 흔적도 남기고 싶었고 도움도 되자고 해서 모였던 거야. 그래서 우리 팀의 이름도 먼 옛날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쓰였던 고대의 단어를 빌려 크로니클(chronicle)이 된 거야. 우리들이 써 내려가는 모험의 기록이 곧 세상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고대 단어가 영어라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왜 여기서 갑자기 영어단어가 뛰쳐나오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내 혼란한 머릿속과 다르게 아저씨는 말을 계속하셨다.
“정후 군이 정후 군에서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다면 우선 정후 군이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를 떠올려 보게.”
“보통은 좋아하고 잘하면 적성이더라고. 도박이나 술 마시는 것들처럼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종류의 것들 말고.”
“백발마녀의 적성은 칼질이었지.”
“넌 도끼질이었네?”
“나에겐 망치질도 있었어! 이거 왜 이래. 칼질만 할줄 아는 누구랑 같은 줄 아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난 10대에도 해보지 않았던 자아 찾기를 27살에 하게 되었다.
‘가끔 쉴 때 시간을 보낼 겸 즐기던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 게임, 너튜브 감상같이 시간 때우기 용 말고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지?’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지. 우리 세상의 인간들은 길게는 80년까지 살지만 극히 드물고 대부분 그보다 훨씬 전에 죽네. 오래 사는 엘프가 1000년을 살고 천수를 다하는 드워프가 800년을 사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짧지. 그러나 인간들의 삶이 짧다고 그들의 삶이 무가치하진 않았네.”
“나무 같은 엘프보다, 쇠 같은 드워프보다 훨씬 격렬한 불꽃같은 삶을 살면서 순식간에 바뀌는 존재가 인간이었어. 내가 만났던 인간들도 그렇게 격렬하게 타올랐고 사그라들어 떠났지.”
“모두의 삶의 속도가 제각기 다르다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속도로 삶을 살고 마감하지.”
“두 분의 이야기가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제 삶은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지는 삶이었어요. 그게 불만이었고 어서 빨리 그들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 조급하게 만들었어요.”
내 나름대로 노력을 한 것 같았는데 계속 취업에서 떨어지면서 느낀 감정은 마치 좋아한다고 고백한 여자에게 몇 번이나 차이는 것처럼 나라는 인간이 차이는 기분이었다.
나란 사람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아서, 나란 사람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고 한심해서 차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남들보다 조금 빠르다고 들뜰 필요가 없어. 삶의 정점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찾아와. 숲에서 자라는 꽃들을 보면 어떤 꽃들은 이른 봄에 피고 어떤 꽃들은 추운 겨울에 피어나는데 그 꽃들이 피는 시기만으로 어떤 꽃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어?”
“똑같은 철도 언제 어떻게 녹이고 어떻게 섞는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물건이 다르네. 자네가 못 나서가 아니야.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시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지. 날 보게. 드워프 세계의 괴물이 인간 세계에선 그저 평범한 존재가 아닌가? 단지 있던 공간만 달라졌을 뿐인데.”
‘에이, 아저씨가 평범하진 않죠.’
두 사람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고서 마음이 울컥해지나 싶었는데 코엘 누나는 여지없이 현실로 날 잡아 끌었다.
“그래, 우리 정후 이제 겨우 비기너 수준인데 언제 익스퍼트 되고 언제 마스터 되냐? 빨리 가자!”
코엘 누나가 내가 타고 있던 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하고 치자 켈소는 앞으로 치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올 때는 갈 때보다 빨리 12시 마을로 도착하고 나서 켈소를 잘 탔다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빅터 교관에게 돌려준 나는 15일의 쿨타임도 찼고 거의 텅빈 인벤토리도 다시 채울 겸해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지구로 넘어왔다.
나는 일종의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한동안 못 본 부모님 얼굴과 군대에서 제대하고 집에 있을 동생 지후도 볼 겸 해서 오랜만에 본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따로 챙겨갈 것도 없나? 지갑만 잘 챙기면 되겠다.”
새로 뽑아서 반짝거리는 suv를 만족스럽게 빙 둘러보고 나는 경기도의 본가로 향했다.
지금은 지은 지 20년이 넘은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이 없는 본가가 있는 동의 지상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집 근처의 마트를 찾았다. 어쩐지 집의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을 것 같아 소고기를 비롯하여 각종 식재료를 주문해서 일부는 박스에 담아서 내가 들고 가기로 하고 일부는 배달을 부탁했다.
철컥
“지후야! 형님 왔다!”
우리 집은 그 흔한 도어락도 없어서 한 손으로 박스를 들고 한 손으로 챙겨온 열쇠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생은 방에서 자다 나왔는지 머리에 새집을 짓고선 ‘니가 여긴 뭐하러 왔냐?’하는 표정으로 날 멍하니 쳐다본다.
“야 뭐하냐? 받아!”
그 모습이 갑갑해서 동생에게 박스 받아서 식탁에 올려놓으라며 닦달을 하고 신발을 벗고 집을 한바퀴 빙 둘러봤지만 내가 떠나기 전이랑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오~ 이거 뭐야? 얼마 전에 엄마한테서 형이 500이나 붙여줬다고 좋아하시는 건 봤는데 요즘 돈 잘 버나보다. 오늘은 소고기 구워 먹나?”
박스를 열고 물건을 꺼내서 냉장고나 식재료를 보관하는 펜트리로 옮겨 넣던 동생은 소고기를 보더니 좋아하며 김치 냉장고에 넣었다.
“형님 왔는데 집에서 먹겠냐? 나가서 먹자. 형이 사줄게. 저건 뒀다가 나중에 엄마, 아빠랑 같이 먹어.”
“우리 정후가 이제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군대 갔다 왔다고 이젠 형이랑 맞먹으려고 한다?”
나랑 5살 차이가 나는 동생은 항상 나보다 작았다. 이제는 어느새 키가 커서 이세계로 넘어가기 전의 내 키랑 비슷한 180cm가 되었지만 아직도 내겐 코를 찔찔대며 쫓아다니던 어린 동생처럼 보였다. 군대 가기 전에도 이렇게 능글맞진 않았던 것 같은데 군대가 순수했던 애를 망쳐 놓은 것만 같았다.
“에이~ 설마~ 어떻게 우리 형님하고 맞먹겠어. 그나저나 군대는 내가 갔다 왔는데 몸은 왜 형이 좋아졌어? 저번만 해도 배가 불뚝 나오는 게 보였는데 요즘 무슨 운동같은 거 해? 와, 이 근육 딴딴한 것 봐.”
티셔츠 위로 보이는 팔근육과 가슴근육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는지 동생 놈이 몸 앞 뒤를 주물럭거렸다.
내심 그동안 흘린 땀방울의 결과를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살짝 좋기는 했지만 뿌리치고 평소처럼 거실에 나와 있는 선풍기 버튼을 누르며 아이스크림이나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고기도 아닌데 뭘 그렇게 주물럭거리냐? 덥다, 저리 가. 냉장고에서 내가 사온 아이스크림 좀 꺼내와 봐.”
“정후야~ 내 예전에 니 라면 끌여주던 이지후 아이다. 뭘 잘못 잡수셨나~ 갑자기 찾아오셔 가지곤 왜 이러실까”
“이 새끼 군대 갔다 오더니 형 무서운 줄 몰라. 할 줄도 모르는 사투리는 하지도 말고. 경기도에서 자고 나란 놈이 할 줄도 모르는 경상도 사투리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