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화-어서 와, 엘븐하임은 처음이지?
말은 대부분의 개보다 똑똑하다. 엘리스에 따르면 말의 지능은 IQ가 70에서 80 정도 되는데 자기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기억도 잘 하고 겁도 많고 섬세한 동물이라 자신을 탄 인간이 말에 익숙한지 혹은 초보자인지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반응한다고 했다.
처음 팀원들이 조사하는 동안 연습하느라고 빌린 코엘 누나의 말 ‘포레고’에 탔을 땐 코엘 누나와 다르게 코엘 누나의 말은 착해서인지 내가 초보자임을 알고 상냥하게 날 배려해주는 느낌이었다.
엘리스의 말로는 시속 6.6km 정도 된다는 ‘평보(walk)’를 배울 때는 높이가 있어서인지 포레고를 탄 체감속도가 고작 6.6km의 시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자동차의 경우는 앞의 창이 있어서 바람이 가려지고 자동차 내에 있다 보니 지나가는 시야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기가 어려운데 말은 직접적으로 말 등 위에 올라타서 나를 보호할만한 프레임같은 것이 없이 완전히 노출되어서 겁이 났다.
평보를 배우고 그 다음으로 배운 게 ‘속보(trot)’였다. 속보는 시속 13.2km 정도로 평보와는 완전히 느낌이 달라지는데 숫자로는 2배가 늘어나는 느낌이지만 체감하기엔 4배는 넘는 것 같았다.
말 타는 걸 잘 배운다면서 빅터 교관에게 ‘구보(cantor)’라는 걸 배우기 시작할 때쯤 맛만 보고 조사가 끝나면서 엘프 왕국으로 복귀해야 해서 끝이 났는데 구보는 시속 약 20km라 이쯤되면 미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게 느껴졌다. 적어도 구보를 배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토바이도 한번안 타본 내가 말을 타고 시속 20km라니...’
내가 지금 왜 말 이야기를 꺼내고 있냐면 엘븐하임으로 가는 누나의 닦달 때문에 5일동안 구보의 다음 단계인 마지막 ‘습보(gallop)’라는 단계까지 강제적으로 코엘 누나에 의해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습보는 인간으로 치면 전력질주에 해당되는데 그저 조깅 정도의 느낌인 구보의 3배가 넘는 속도이고 평보를 기준으로 하면 평보의 약 9배는 되는 속도라서 체감 속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를 정도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자동차 타고서도 120km도 밟아본 나인데!’
습보의 속도는 시속으로 치면 사실 약 60km 정도의 속도인데 나중에 한국으로 넘어 왔을 때 시범삼아 타 본 스쿠터의 60km와는 느낌상 차원이 달랐다. 진짜 달랐다. 궁금하면 어디 마장에 가서라도 말 등위에만 올라타 봐도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아무튼 이번 엘븐하임으로 가는 길에 탄 말은 그 전에 얌전했던 포레고와는 다른 ‘켈소’라는 말이었는데 빅터 교관이 빌려준 말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보통의 짐말 한 마리 값이 40골드(=4천만원) 정도고 크로니클 팀이 타고 다니는 말들은 전마(戰馬)중에서도 최상급의 품종인데다 빅터교관의 말은 그 중에서도 좋은 말에 속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따지자면 짐말 수십마리에 비견될 정도로 비싼 20플래티넘(=20억원)은 되는 말이었다.
‘20억짜리 스포츠카를 편하게 타고 오라며 대범하게 빌려주신 빅느님...’
어딘가 장군이 타는 말의 느낌이 나는 ‘켈소’는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말인데 탔을 땐 포레고에 올랐을 때랑은 또 느낌이 달랐다. 이 말의 전력질주는 시속 80km가 넘는다고 했으니까.
말이 사람을 태우고 하루에 50km 정도는 이동할 수 있다. 기사들이 타는 전투마는 하루에 최고 80~100km도 이동 가능하다고 하는데 말도 생명체라 지치기 때문에 중간 중간 목도 축여줘야 하고 풀도 뜯어줘야 하고 잠도 자야 하기 때문에 기름만 넣어주면 12시간도 넘게 갈 수 있는 자동차와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와 다르게 말은 한동안 신나게 달렸으면 천천히 걷거나 아니면 멈춰서 쉬어줘야 하는 순간들이 오는데 이때는 나 혼자 지쳐서 말에서 내린 채로 가랑이를 붙잡고 나무에 기대있기 바빴다.
‘사극에선 연기자들은 말 잘만 타던데...으윽...이런 고통을 다 감수하고 탔던 건가?’
“정후 군이 아직 말을 많이 타보지 않아서인지 그쪽은 단련이 덜 됐나 보군, 하하하하하.”
“웃지 마세요. 진짜 아프다구요.”
‘사타구니가 다 쓸려서 얼마나 아픈데!’
“난 잘 모르겠다. 우리 엘프들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짐승을 타보곤 해서.”
‘몽골인이야 뭐야.’
첫날은 잘 못 달렸다. ‘구보’를 배울 쯤에 끝난 내 실력으로는 속보도 적응이 다 안 된 상태였으니까.
둘째 날은 첫날보다 조금 더 빨라지긴 했지만 코엘 누나가 이 속도로 가면 5일 내로는 못 간다면서 옆에서 엄청 꿍얼거렸다 이전까진 습보를 중간중간 살짝 경험하는 것이었다면 코엘 누나의 혼잣말 이후론 말이 가능할 때마다 ‘습보’로 가야했다. 그딴 식으로는 5일 내에는 못 도착한다고 하도 난리를 피워서.
‘아니, 도로사정도 안 좋은 세상에서 좀 늦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이해해주지 싶은데’
강제로 달린 보람이 있는 것인지 쓰린 가랑이에 연고를 바르고 잔 다음날인 셋째 날은 나도 놀랄 만큼 익숙해졌고 말과 호흡을 나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워~~~~후!”
“신 나지?”
“이거 뭐죠? 내가 꼭 켈소가 되어서 달리는 기분같아요!”
“정후 군이 이제야 말을 타고 달리는 기쁨이 뭔지를 느끼는 것 같군.”
‘그래도 가랑이는 아직도 아픕니다.’
말을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말 위에서 바라보는 시야는 지면으로부터 고작 160~180cm 정도 올라갔을지라도 사람의 어깨 위에 탄 느낌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스포츠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사실은 말의 푸르륵 거리는 소리를 따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달리고 나면 과장을 보태서 말의 폐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걸 양쪽의 다리와 내 하체로 느낄 수 있었다.
‘폭주족이 이 맛에 폭주하는 건가...아닌가 말이랑 바이크는 많이 다를려나.’
쉬는 시간동안 켈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빗질을 해주면서 3일만에 습보를 터득해낸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뿌듯해하고 있는데 코엘 누나가 옆에서 초를 쳤다.
“야 엘븐하임까지 오는데 7일 걸렸다. 7일. 이번에 엘븐하임에서 일 보고 돌아가는 내내 습보 완벽히 익혀놔. 눈 감고 자면서도 습보로 달릴 수 있게.”
“누나...저 말 탄지 그렇게 오래 안됐어요. 그리고 눈 감고 말 타면 그거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야, 말이라는 게 리듬만 잘 맞춰주고 말이 가는 대로 갈 수 있게 해주면 앞의 말 따라서 가게 되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나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말고삐 안 쥐고 습보로 달리면서 가도 여태껏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그랬어.”
“정후 군, 듣지 말게. 절대 배우면 안 되는 짓거리네.”
“뭐, 짓거리? 말이 좀 심하다?”
“이제 배운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자면서도 말을 타라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뚫린 입이라고 너무 막 싸지르는 거지. 말은 지가 심하게 해놓고.”
“이게 선 넘네?”
{말 탄지 2달도 안 된 사람이 이 정도를 탄다고 하면 누구라도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말을 잘 타는 엘프들도 이렇게 빨리 익히진 못하는데 말이야. 근데 적당히 해라. 아무리 연막이어도 좀 듣기 불편해질라고 그래.}
{밀어 붙이면 붙일수록 실력이 빠르게 늘더군. 에헤이, 그리고 이렇게 해야 믿지. 어설프게 하면 믿나?}
{그런가? 아무튼 조금 기분 나쁘다. 살살 말해.}
“코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넌 엘프라서 금방 익혔고 나도 수십년에 걸쳐 배워서 지금처럼 타는 건데 2주도 안되서 어떻게 습보를 다 익힐 수가 있겠어?”
“크로니클 팀의 일원이면 그정도는 해야지”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하아...”
7일 내내 저 상태였다.
말도 하나 제대로 못 탄다고 구박을 그렇게 했는데 아저씨도 하도 코엘누나가 닦달하니까 많이 위로해주시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말과 친해질 수 있게 말의 습관이라거나 말이 좋아하는 먹이, 말한테 해주면 좋아하는 스킨십 같은 걸 가르쳐 주신 것이 도움이 되어 마침내 셋째날 말 타고 잘 달리 수 있게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때 아저씨는 내 편을 들어주면서 말씀하셨다.
“코엘은 지가 엘프라서 동물하고 금방 친해지거든. 지가 되니까 남도 다 할 줄 아는 줄 착각하는 거지. 난 정후군을 이해하네.”
그러면서 코엘 누나에 대해서 뒷담화도 살짝 하셨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뒷담화가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대답만 하지 않았을 뿐 무언의 응답으로 동조해버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도착한 엘프왕국의 수도 엘븐하임은 12시 마을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12시 마을은 외부인과의 교류를 위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모두에게 오픈되어 있는 느낌이 있었다면 엘븐하임은 거대한 성벽이 중심에 있는 내성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저 성벽은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어 준 것이지.”
성벽을 마주했을 때 드워프가 만들어 준 거라면서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돌들을 짜 맞춰서 끼워 넣어서 만든 장벽은 돌멩이 하나 안 들어갈 정도로 빈틈이 없었으니까. 그 모습은 마치 마야문명이 세웠다는 건축물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나 확인된다는 초정밀 건축물의 양식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와, 이걸 드워프들은 손으로 깎아서 만들었다고? 대단하다.’
‘그래? 이상하네. 아무리 초고대문명의 건축물이라지만 아저씨가 만든 장비가 대단하긴 해도 지금은 그 정도 기술력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오파츠?’
‘난 그런 건 안 믿는데 이걸 보고 니 설명을 듣고 나니 확실히 오파츠인지 뭔지 그거 같아보인다.’
한참을 장벽 앞에 서 있으면서 그 거대함과 정밀함에 놀라고 있다가 참외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딸기맛 아이스 바를 먹듯이 돌려서 빨아 먹던 누나에게 엘프들도 이런 요새로 둘러싸인 수도 엘븐하임에 몰려 와서 살고 싶진 않은지 물어봤다.
“우리 엘프는 어디 한군데에서 태어나면 우리가 있는 숲이 불타버리는 대형 산불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어디로 크게 이동하지 않는 편이야. 그래서 자기가 태어난 숲이 있는 각 마을에 있는 걸 좋아하고 보통 나무처럼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태어난 곳에서 나무 밑에 묻혀 죽지.”
내가 본 엘븐하임의 첫인상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랏빛 노을로 물든 평야 위에 거대한 숲이 크게 펼쳐져 있고 12시 마을처럼 높은 마을들이 가운데에 유독 거대한 ‘세계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구획되어 돌로 된 성벽으로 감싸져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인간이 사라지고 오래 지나 초록 빛의 식물들이 감싼 것만 같은 도시 아포칼립스의 모습같았다.
“여기가 바로 엘븐하임이야.”
코엘 누나의 안내를 받고 드디어 엘븐하임 안으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