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화-동상이몽
어제 뭘 해 드셨냐고 따지는 요크 씨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어제와 똑같은 광란의 파티타임이 또 지나갔다.
술을 마신 요크 씨와는 단원이니까 말을 놓기로 했는데 처음 받은 '미니 코엘'같은 느낌이 맞았는지 소주가 목 넘김이 좋다면서 병나발을 불었다. 드마코 형은 의외로 술이 약한지 춤을 추다가 나보다 먼저 뻗어서 어제의 나처럼 텐트로 던져졌고.
빅터라는 단원은 마치 귀족처럼 조용히 차분하게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고는 맛있게 먹었다며 약간만 술을 마시곤 자신의 임무인 경계를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사람 수가 늘어난 만큼 더 늘어난 음주량으로 인해 다음날 다들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며 좀비 같은 상태였다. 버크 아저씨는 밤에 술 마시다 옷은 또 언제 벗었는지 상의를 탈의하고텐트 앞 숲 쪽에서 널브러져 있었고.
신입 단원인 나를 포함한 모험가 집단 크로니클이 전원 모인 다음 날의 야영지의 모습은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듯 처참했다.
오전 내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가 점심쯤이 다 돼서 라면이라는 걸 내오라는 단장과 부단장의 요구에 그게 뭐냐는 3명의 팀원들의 반응이 이어졌다.
이번엔 모닥불을 피워놓고 Y자의 형태의 나무 두 개를 바닥에 꽂아 굵은막대에 주철로 된 더치오븐 냄비를 걸고 물을 팔팔 끓여서 늘어난 사람 수에 맞춰 이번엔 15개를 끓여 먹고 햇반 7개를 넣어서 말아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거야?”
“이 라면이라는 것과 햇반이라는 것들은 앞으로 이동을 할 때 따로 챙겨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크로니클의 이번 활동 예산이 부족한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식비 때문이 아닐까? 이 사람들 엥갤지수가 도대체 몇인 거야?’
흡입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후식으로 커피믹스를타줬을 때 모두들 한입씩 먹어보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며 좋아하길래 220개짜리 박스를 보여주며 마치 홈쇼핑 채널의 쇼호스트가 빙의한 듯 잠깐의 설명회를 열어야 했다.
단원들의 동의를 받은 드마코 형은 나에게 찾아와 꼭 구매하고 싶다고 요청하셨고 버크 아저씨에게도 리스트 1순위에 적으라고 했다.
버크 아저씨는 달달한 게 일하다 중간중간 먹기 좋을 것 같다며 드워프들에게 공급하고 싶은 물건이라고도 하셨고.
‘암요, 카페인은 피로에 찌든 현대인들에게도 없어선 안 될 필수 약물이죠.’
“달달한 커피라는 거 앞으로 내 인생에 빠질 수 없는 동반자가 될 것 같아. 정후 말대로 입에서 당기는 대로 많이 마시면 잠 못 잘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조금만 마시라고 할 만해.”
‘밤에 잠자는 것보다 믹스 커피 1개로는 부족하다고 5개, 6개씩 타서 그란데 사이즈 용량으로 드시니까 특히 주의를 드렸죠. 나 때문에 당뇨병 걸리면 너무 미안하니까.’
3일 만에 내 인생의 방향이 급속도로 다르게 굴러가는 것 같아. 겁이 나면서도 조금씩 기대가 된다. 술 취하고 한 가입신청서를 무르려고 강하게 어필하지 않은 것도 내심 이들과 다니면서 모험하는 삶이 괜찮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던져주는 걸까? 복이 있으면 화도 있다고 편안할 것만 같은 내 인생에도 고난이 찾아왔다.
“이정후 신입 단원이 우리 모험가 집단 크로니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체력과 근력입니다. 신입의 가입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앞으로 이곳에서 조사기간 동안 식량조달 업무가 없어진 제가 신입단원의 체력훈련을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좀 더 발전이 필요한 에디나 단원도 오전엔 동물 탐사 업무를 하고 오후엔 합류해서 이정후 신입 단원과 함께 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옆에서 벤티 사이즈의 커피믹스를 거의 다 마신 에디나 누나는 왜 갑자기 자기 이름이 거기서 튀어나오냐며 짜증을 내고는 이제 자기는 훈련 안 해도 된다고 어필했지만 빅터 씨의 강력한 요청 아래 단장과 부단장의 승낙이 이어졌고 나머지 단원들의 동의 아래 훈련참가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이럴 땐 또 아주 한마음이지?”
“빅터가 정후 군과 에디나를 챙겨준다면 뭐, 믿고 따를 만하지. 단번에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단련하긴 어려워도 단시일 내에 최대한 성장시키는 것은 빅터의 주특기 중 하나니까.”
“에디나도 좀 구르고 나처럼 좀 더 근육을 키워야 해. 항상 동물 등에 업혀 다니려고 하고 그러니까 빌빌거리는 거야. 이번 기회에 운동 좀 빡세게 시켜. 빅터.”
“제 동의 의사는 아예 중요하지도 않네요.”
내가 옆에서 푸념 아닌 푸념을 하자 버크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셨다.
“정후 군, 체력은 관찰력, 친화력, 의지력 등과 함께 모험가에게 필요한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야.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목적을 실현하려고 할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네. 의지력이아무리 강해도 체력이 없다면 그 의지력은 오래 갈 수 없어. 이건 모험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며 노력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마음속에 품어두어야 할 삶의 기준 같은 거라네. 더구나 최상위 모험가 집단 크로니클의 일원이라면 요구되는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아. 자네의 능력이 우리 집단에 필요한 부분이 있어 영입한 것도 맞지만 객관적으론 단원으로서 아직 부족하고 채워야할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버크가 하는 소리가 꼰대같을지 몰라도 나랑 버크가 팀의 선발대 역할을 맡고 있는 것도 우리가 기본적으로 무력으로 팀에서 강한 것도 있지만 팀원들 중에서 체력이 가장 좋아그런 거야. 우리는 많이 움직여도 여유가 있으니까. 팀원들의 경우 한번에 다 같이 움직이려면 짐 때문에 기동성이 좀 떨어지기도 하고 말이지. 아무튼 체력단련은 모험가가 되려면 필요한 과정이야. 체력 말고 부족한 다른 부분들은 팀원들이 키워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느슨해보이던 두 사람이 이렇게 팀장, 부팀장다운 이야기를 할 때면 투닥거리는 것과 너무 달라서 이질적이었다.
‘이럴 땐 멋있는데...군대 유격보다 힘들...지는 않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PTSD가 도질 것만 같은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예비군 훈련도 가면 흐느적거리는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자 평소처럼 각자 임무 시작해. 정후는 빅터한테 훈련받고. 에디나는 내일부터 훈련 참가하는 걸로 결정.”
“아우.....그 훈련 또 받을 생각하니까 짜증나!!!!!!!!!”
“그러니까 언니는 평소에 너무 안 움직여서 그런 거야.”
“꼬맹이, 옆에서 긁지 말고 따라와. 동물 조사하려면 가지고 가야 하는도구들도 있으니까 챙겨서.”
“내가 왜? 이번엔 나도 식물조사 담당이야. 나말고 코엘 언니나 드마코한테 도와달라고 하든가! 버크 오빠, 나 좀 도와줘요.”
요크가 에디나 누나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빅터 씨가 옆으로 다가왔다.
“정후 단원, 훈련에 들어가기 앞서 정후 팀원의 현재 체력 수준에 대한 측정이 필요합니다. 측정을 하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구체적인 훈련방향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실까요?”
“제가 2일 연속으로 술을 마셔서 체력이 좀...”
“그 부분은 체력 측정 전에 워밍업을 하면서 땀을 흘리면 괜찮아질 겁니다. 어느 정도 감안해서 파악하면 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숙취가 무슨 땀 흘린다고 사라져요...’
속에 품은 마음과 다르게 냉기를 폴폴 풍기는 듯한 빅터라는 남자에게 내 의견은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꼭 그만 쳐먹고 운동해라 돼지야! 라고 말하는 것 같네.'
엘리스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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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하기로 결정이 되고 빅터라는 남자는 백사장으로 날 데려갔다.
“지금부터 절 교관님 혹은 빅터 교관님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얼마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땡볕 아래에서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에이 아니겠지. 이 사람은 영화 속의 광대처럼 광기가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었어.’
“이는 훈련하는 과정에서 좀 더 몰입하여 훈련의 성과를 높이기 위함이니 너무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난 그날 백사장에서 뛰고 구르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하면서 마치 영상으로만 봤던 UDT 훈련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 뭐하던 남자인데 이런 훈련법을 알고 있는 거야?’
‘이 남자, 뭐하던 남자인데 덩치는 이렇게 크면서 체력과 근력이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거지?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은 안 받았더라도 꼭 속이 텅 빈 빵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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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헉”
‘지금 여긴 어디? 나는 어디의 누구?’
길게 펼쳐진 백사장을 왕복으로 2시간 넘게 걷다가 뛰고를 반복하고 있자니 토할 것만 같았다. 평소에 운동을 좀 많이 해뒀어야 하는 걸까?
“정후 단원과 에디나 단원, 조금 지친 것 같군요. 잠시 걸어도 좋습니다.”
내 옆에서 함께 뛰는 빅터라는 남자는 KGB의 냉혹한 느낌을 풍기는 러시아 스타일의 미남으로 난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은데 나에게 물통을 건네 준 이 사람은 땀도 안 흘리고 있었다.
“잠시 물을마시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지금 걷는 속도는 유지하세요. 두 사람 다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교...교관님....살려...살려주세요.”
“빅터....야...내가 너한테 ...뭐...잘못한...건...없지 않아?”
“정후 단원, 이 정도로는 절대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에디나 단원. 훈련 중에는 교관으로 호칭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훈련은 기초측정을 토대로 짜둔 정해진 과정에 따라 현재 신체상태에 맞춰 진행되는 것입니다. 한번만 더 5분간 전력질주하고 정리운동하고 마치도록 할까요?”
피트니스를 하면서 빌어먹을 ‘한번만 더’를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불같은 분노가 솟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사람은 숫자 세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건가 싶은 생각과 함께.
“헉헉허헉헉....빅터 새끼 죽어버려.”
내 옆에 다 죽어가는 시체 하나가 저주의 말을 담아 씹어 먹듯이 내뱉으며 똑같이 걷고 있다. 살아 있는 시체의 이름은 에디나. 동물조사 담당이자 드루이드로 평소에는 동물과 놀거나 동물의 등에 업혀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산골마을에서 살아서 그럼에도 근력도 유산소 능력도 나보다 높았지만 기본적인 신체 능력은 크로니클 단원들보다는 낮았는지 지금 체력을 증진하는 오후타임에만 내 옆에서 뛰고 있다.
“분노할 기운이 있다는 건 아직 운동할 여력이 있다는 거죠. 자 마지막입니다.”
“너 이번에 헉헉...그 마지막이란 헉헉... 말 사실 아니면...나중에 나랑 친한 ...헉헉...곰한테...너... 찢어 ...헉헉..달라고...부탁할...거야. ”
내용만 들어보면꽤나 무서운 협박인데도 빅터 교관은 가볍게 무시하고 외쳤다.
“마지막입니다. 뛰십시오!”